천문 역법 부문
건륭 연간 금교 정책이 유지되었지만 북경에 체류하면서 청조에 복무한 선교사들의 종교활동은 허용되었고, 이 선교사들은 과학 기술 부문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천문과 역법 방면에서 선교사들이 남긴 업적은 흠천감에서 감정(監正) 등 요직을 맡아 복무한 포르투갈의 선교사 쾨글러, 페레이라(徐懋德, Andres Pereira), 고가이슬(鮑友管, Anton Gogeisl), 할러스타인, 에스피냐(高愼思, José de Espinha), 알마이다(索德超, José-Bernardo d' Almeida)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쾨글러(戴進賢, Ignatius Kögler, 1680-1740)는 독일 출신 선교사로 1616년에 중국에 들어와 강희, 옹정, 건륭 치세를 이어 청조를 위해 서양식 천문 역법을 소개하는 일에 기여했다. 그는 1723년에 천문도인 《황도총성도(黃道總星圖)》, 1742년에는 행성 관측지를 정리한 《역상고성후편(歷象考成後編)》, 《의상고성(儀象考成)》 등의 책을 저술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그는 아담 샬, 페르비스트의 뒤를 이어 중국 천문학 부문에서 가장 공헌을 크게 남긴 선교사로 칭송받고 있다.
할러스타인(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 1703-1774)은 남슬로베니아 출신 선교사로, 1738년에 중국에 들어와 쾨글러의 뒤를 이어 흠천감의 감정을 최장수 29년간 담당하였다. 그가 쾨글러를 도와 제작한 혼의(渾儀)는 건륭제로부터 기형신무의(璣衡撫辰儀)라는 이름을 얻었다.
건축 부문 건륭제는 서양 그림책 가운데 있는 서양 분수대를 보고 크게 흥미를 느껴 1747년 분수대를 설계할 수 있는 선교사를 찾았다. 선교사들의 추천을 받은 브느와(Michael Benoist, 1715-1774)는 건륭제에게 분수대의 모형을 보여주었고, 시연을 본 건륭제는 매우 기뻐하며 원명원 구역 내에 서양식 궁전을 짓고 그곳에 서양식 분수대를 조성하도록 브느와에게 책임을 맡겼다.
최초의 서양식 궁전이 카스틸리오네와 브느와 두 사람에 의해 설계되었고, ‘해기취(諧奇趣)’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궁전에는 가장 규모가 큰 ‘해안당(海晏堂)’을 비롯하여 ‘원영관(遠瀛觀)’과 ‘대수법(大水法)’ 등이 건축되었다. ‘해안당’ 건물의 남쪽 면에 브느와가 설계한 분수대가 설치되었고, 서북쪽에 수루(水樓)를 설치하여 분수대에 물을 공급하게 했다. 분수대에는 중국 전통의 십이지상으로 12시각을 표시한 ‘분수시계(水鐘)’가 설치되었고, 시각 단위로 돌아가면서 가운데 분수대로 물을 공급하여 정오가 되면 분수가 솟아오르게 했다. 이 외에도 브느와는 ‘맹수상박(猛獸相搏)’, ‘군견위록(群犬圍鹿)’ 등의 조각상을 조성하고, 동물들의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게 했다. 이처럼 화려함을 자랑하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식 석조 건축물은 1860년 영불연합군과 1900년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침략하는 전란 중 파괴되어 현재는 안타깝게도 잔해만 남아 있다.
기계 부문 1752년 1월 11일 황태후가 6순 생일을 맞게 되자, 카스틸리오네는 태후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벤트를 위해 궁중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만년환(萬年歡)’이라는 기계 장치를 설계하여 시연하였다. 중국 시녀 복장을 한 기계 인간 셋이 생일을 축하하는 ‘만년환’이라는 글자가 쓰여진 패를 각각 손에 들어 보여주었다. 그리고 기계 인간 여섯이 옆에서 일제히 징과 바라 등 소리 나는 악기를 두드리며 달려 나와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이 공연은 태후와 황제에게 찬사를 받았고, 황제는 선교사에게 많은 금은으로 상을 내리고, 이 모든 기계 장치를 궁전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건륭 9년(1744년) 황제의 요구에 따라 청 궁정에 시계 제작 부서가 세워졌다. 시계 제작을 담당하던 샬리에(沙如玉, Valentin Chalier, 1697-1747)는 수위(守衛)활동에 활용할 수 있는 대형 시계를 제작하였다. 테보(楊自新, Gilles Thebault, 1703-1766)는 시계에 쓰이는 태엽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완구 사자와 호랑이를 제작하여 저절로 걸어가게 했다. 방따봉(汪達洪, Jean-Mathieu de Ventavon, 1733-1787)도 글을 쓸 수 있는 기계 인형을 제조하였다. 건륭제는 이들이 만든 시계와 구동 완구들에 대해서도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리 부문 지리 측량 방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기여를 하였다. 1707년부터 1717년까지 제르비용(張誠, P. Jean Francois Gerbllon, 1654-1707), 부베(白晉, Joachim Bouvet, 1656-1730), 레지스(雷孝思, Jean Baptiste Regis, 1663-1738), 자르투(杜德美, Pierre Jartoux, 1668-1720), 프리델리(費隱, Xavier Ehrenbert Fridelli, 1673-1743), 파브레-봉주르(潘如, Guillaume Fabre-Bonjour, 1669?-1714) 등이 대지삼각측량 등 서양 기술을 활용하여 전국을 돌며 실지 측량을 실시하였다. 험준한 티베트, 전란 중이던 신강(新疆)지역을 제외한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실지 측량을 한 결과를 바탕으로 마침내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가 제작되었다.
뒤에 호샤(傅作霖, Felix da Rocha, 1713-1781)와 에스피나(高慎思, Joseph d' Espinha, 1722-1751) 두 명의 선교사가 두 차례 황명을 받아 신강지역 실지 측량을 실시하여 1761년에 《서역도지(西域圖志)》를 제작하였다. 같은 해 브느와는 러시아와 몽골 문헌을 이용하여 티베트와 신강지역 지도를 보충한 《건륭십삼배지도(乾隆十三排地圖)》를 제작하였다. 《건륭내부지도(乾隆內府地圖)》라고도 불린 이 지도는 이후 목판과 동판으로 제작된 당시 세계 최대의 아시아 지도였다. 브느와는 또 황명을 받아 《곤여전도(坤與全圖)》와 《대청제국전도(大淸帝國全圖)》를 제작하였는데 이들 지도는 《황조중외일통여도(皇朝中外壹統輿圖)》라고도 불린다. 회화 예술 방면에서도 선교사들은 많은 성과를 남겼다. 카스틸리오네와 아티레(王致誠, Jean Denis Attiret, 1702-1768), 시켈타트(艾啓蒙, Jgnatius Sickeltart, 1708-1780), 살루티(安德義, Bishop Damascenus Salutti, ?-1781) 등은 1765년 합작으로 《평정이리회부득승도(平定伊犂回部得勝圖)》를 그려 준 대가로 평정의 무공을 기리고자 하는 건륭제의 요청에 부응하였다. 이 그림은 프랑스로 보내져 동판으로 제작되었고, 복제한 200폭의 그림과 함께 1772년 북경으로 보내졌다.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판지(潘廷璋, Guiseppe Panzi, 1733-1812)는 카스틸리오네, 아티레 등의 뒤를 이어 건륭제의 화가로 임명되어, 황제와 관원들을 위해 각종 유화와 수채화를 그렸다. 카스틸리오네 등이 전래한 서양 화법은 점차 민간에 확산되었고, 중국의 저명한 화가인 초병정(焦秉貞)의 《경직도(耕織圖)》는 그 대표적 사례이다. 건륭 시기 소주(蘇州)의 도화오(桃花塢) 판화도 서양풍의 연화(年畵) 기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사진 설명 및 출처 | (위) 해안당(海晏堂) → 바이두 바이커(百科) | (아래) 대청제국전도(大淸帝國全圖)》→ auction.artron.net/paimai-art90775331/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