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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7  통권 242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1862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천주교 금교(禁敎) 시기(2) 건륭 초기

천주교 금교 정책의 유지
1736년 즉위한 건륭제(乾隆帝)는 즉위 직후 사면령을 크게 내렸고, 윤사를 황제로 옹립하려다가 옹정제 즉위 뒤 투옥되었던 천주교도 소노 일가도 석방하고 종친으로서의 명예도 복구해 주었다. 건륭제 즉위 직후 사면을 받은 어떤 관원이 북경의 자기 집으로 돌아간 뒤 잔치를 열고 조상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천주교도였던 자신의 누이가 이 잔치가 미신이라고 여겨 참여하지 않자 천주교를 엄금해야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예부를 통해 올려진 이 건에 대하여 건륭 황제는 1736년 4월 26일자로 천주교 신앙자를 중형에 처하며 입교를 권하는 것도 금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당시 건륭제를 위해 서양화를 그려주면서 궁중에서 지내던 선교사 카스틸리오네(郎世寧, Giuseppe Castiglione)가 예부를 통해 선교의 자유를 허용해 줄 것을 황제에게 청원하였으나, 건륭제는 이를 수용하지 않고, 서양인들의 종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서양 종교를 신봉하는 것을 금지할 뿐이라고 답했다.

1737년 북경에서 중국인으로서 선교를 하던 유이(劉二)라는 인물이 선교 금령을 어긴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이는 교당 부근에서 버려진 유아를 발견하고 교당으로 데려가서 보살피며 세례를 주었는데, 북경 관아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하고 황제의 선교 금령을 어긴 것으로 판단하여 그를 형부로 압송하였다. 형부에서는 그에게 장형 1백 대 등 처벌을 하고 그 판결 사실을 각 성으로 통지하고 금령을 재확인하는 포고문도 다시 발표하였다.

유이가 체포된 뒤 북경 예수회에서는 유이를 구하기 위해 흠천감 감정(監正) 쾨글러(戴進賢, Ignatius Kögler), 프랑스 선교사 파르냉(巴多明, Dominique Parrenin), 포르투갈 선교사 피네이로(陳善策, Dominigo Pinheiro), 그리고 궁중에서 복무 중이던 샬리에(沙如玉, Valentin Chalier, 1697∼1747)와 카스틸리오네 등이 천자에게 탄원 상소를 올리려고 했다. 형부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엄금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을 건의했고, 건륭제는 서양선교사들 본인이 교당 안에서만 천주교를 신봉할 뿐 중국인들에게는 선교할 수 없다는 지침을 다시금 발표하였다.

각지의 교안 사례
1746년 복건성에서 선교사들이 체포 처벌되는 교안이 발생하였다. 일찍이 옹정제에 의해 마카오로 쫓겨났던 예수회 선교사 페트루스 산쯔(桑白多祿, Petrus Sanz)가 건륭 3년(1738)에 몰래 복귀하여 선교하다가, 1746년에 요아네스 피구에라(費若望, Joannes Alcober Figuera), 프란시스쿠스 세라노(德方濟各, Franciscus Serranno), 요아킴 페레즈(華若亞敬, Joachim Royo Perez), 프란시스쿠스 디아즈(施方濟各, Franciscus Diaz) 등과 함께 발각되어 복주(福州)로 압송되고, 수녀 5명과 신도 9명도 함께 압송되었다. 금교령 위반 죄로 페트루스는 참수형, 다른 선교사들은 교수형, 중국 교도들은 유배되었고, 수녀들도 처벌을 받았다. 

강소성에서는 1748년 선교사 엔리케(黃安多, Henriquez)와 아르테미스(談方濟, Arthemis) 등 2명이 소주(蘇州)에서 선교활동 중 체포되었고, 북경의 카스틸리오네와 할러스타인(劉松齡, Ferdinand Augustin Hallerstein, 1703∼1774) 등이 구명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성과 없이 교수형을 당하였다. 

강서성에서도 같은 해 이세보(李世輔)와 두 명의 중국인 교우들이 선교하다가 체포 구금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 내 각지에서 금령을 피하여 비밀리에 선교하던 선교사들이 잇달아 체포 처형되는 사태가 이어지자 마카오 선교본부는 부득이 1749년 중국인을 대상으로 선교하지 않고 세례도 베풀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비밀 선교는 계속되었고 교안도 이어졌다. 1754년 5월 예수회 선교사가 강남에서 체포되어 형을 받았고, 같은 해 복안에서 중국 신부 한 사람도 처벌을 받았으며. 1757년 남경에서도 선교사들이 체포 수감되었다. 1769년 사천성에서는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가 백련교와 연루 혐의로 체포되면서, 성 전역을 대상으로 기독교도들에 대한 대대적 검색이 전개되어 이안덕(李安德)이 운영하던 신학원 한 곳이 폐쇄되었고, 이어 1774년에는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마르탱 모예(Martin Moye) 신부가 체포되었다.

비밀 선교의 진행
1746년 복건 교안 발생 이후 반 세기 동안 크고 작은 교안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지만 천주교 선교는 여전히 비밀리에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1746년 사천성에서 유럽 신부들이 추방된 이후 중국인 신부 이안덕이 교회를 이끌었고, 이후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포티에(范益盛, François Pottier) 신부가 도착하여 왕성한 선교의 결과 교인 5,000∼6,000명의 성과를 올렸다. 호광 총독이 천주교도여서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4명과 중국인 선교사 5명이 관내 두 성의 교무를 담당하였고 천주교인 가정이 300여 개나 되었다는 자료도 있다. 

1773년 강서성 남창(南昌)에서 100명의 중국인이 영세를 받았다.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는 북경, 직예, 동북, 서북 변경에서 적극적으로 선교를 진행하여 나갔으며, 내몽고 지구의 교인은 모두 3만 5천 명에 달했다. 북경도 1741년에만 대략 1,200명의 교인이 영세를 받았고, 그중 4명의 ‘왕자’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건륭 치세 기간에도 금교 법령은 유지되었으나 방대한 중국 전역에서 모두 엄격히 집행된 것은 아니었고, 그러한 상황 가운데 천주교는 단속이 느슨한 지역 환경을 잘 이용하여 선교는 계속 이어졌다.








사진설명 | 건륭제(乾隆帝)
사진출처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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