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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6.2  통권 238호  필자 : 앤드류 김  |  조회 : 2940   프린트   이메일 
[기획]
미래선교, 남반구선교운동(Global South Mission Movement)

[편집자 주] 현대 선교운동이 서구(북반구) 중심에서 남반구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다. 아직까지 선교적 경험과 자산을 축적할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놀라운 큰일들을 행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지난 5월 초에 중어권한인선교사협의회(KMAC)가 진행하고 있는 ‘2022 중어권 선교 온쉐어링(On Sharing) 시즌2’에서 ‘남반구선교운동과 시대적 도전’이라는 주제로 현재 남반구선교운동의 컨설턴트와 퍼실리테이터로 섬기는 앤드류 김 선교사님이 필리핀, 중국, 동북 인도, 브라질, 이디오피아 등의 남반구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교운동을 조망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중어권 선교사들에게 주는 선교적 의미와 그동안의 중국선교를 성찰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앞으로 선교중국을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사역을 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하며 성찰적 실천가로서 섬기는 사역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1984년 5월부터 지금까지 만 38년 동안 선교현장에서 사역해 온 풍부한 경험을 기반으로 남반구지역에서 선교의 새로운 연결과 촉진을 위해 선교지식경영, 통합적 선교 리더십 개발 등의 영역에서 사역하고 있는 앤드류 김 선교사님의 사역을 본 웹진에 소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또한 이 글은 ‘선교한국’ 매거진에 게재된(2018년) 필자의 글을 ‘선교한국’의 허락을 받아 내용의 일부를 새롭게 다듬었음을 밝혀 둔다.


남반구교회들, 미래선교의 대안
지금 남반구선교가 상당히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은 미흡한 면이 많다. 그러나 향후 5~10년이 지나면 남반구에서 선교사 자원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선교의 지평에 상당한 변화가 오게 될 것이다.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가장 큰 선교적 잠재력과 선교사 자원을 갖고 있는 중국과 동북 인도, 남미의 브라질 그리고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 나이지리아 등에서 미래 선교사 자원들을 건강하게 일으키고, 선교 지도자들을 개발하는 일은 향후 선교계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필자의 남반구선교운동, 아시아 비전 단기선교 프로젝트
2002년 10월 캄보디아의 프놈펜에 출장을 갔다가 투올슬랭대학살박물관(Tuol Sleng Genocide Museum)과 킬링필드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1975년 4월 크메르루주가 집권한 뒤 1979년까지 ‘사회주의 세상을 건설한다’는 미명 아래 지식인과 부유층 등을 탄압해, 학살과 굶주림, 과로 등으로 캄보디아의 인구가 700만 명에서 400만 명으로 줄어들었고, 200만 명이 희생되었으며, 100만 명 가량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들이 고문당하고 희생당한 현장에서 가누기 힘든 슬픔과 마주했고 내가 누리고 있는 약간의 편안함이 도리어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캄보디아로 사역지를 옮기려고 가족과 함께 다시 방문하였는데 선교후원 형편이 좋지 않은 우리로서는 아이들을 보낼 만한 마땅한 학교가 없었다. 아이들을 영어로 교육하는 학교에 보내려면 우리가 받는 후원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교육 환경이 낮은 현지 학교에 보내거나 아예 학교에 보내지 말든가 해야 하는데 어느 것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답답한 가슴을 끌어안고 필리핀으로 돌아와 대학원 강의를 하던 어느 날, 학생들 앞에서 “주님은 내게 캄보디아의 영적 빈곤을 보여 주시며, 그 백성을 섬기라고 도전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런데 내 아이들을 보낼 만한 학교가 캄보디아에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헌신된 선교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식의 교육 하나 포기하지 못하는 형편없는 선교사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때 몇몇 학생들이 손을 들더니 “교수님, 당신이 가시기 어렵다면 우리를 그곳에 보내 주십시오”라고 했다. 

가난한 필리핀교회의 상황을 너무 속속들이 잘 알고 있던 나로서는 필리핀 사람들을 선교지에 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언젠가 주님이 원하시면 여러분들이 선교지에 가서 사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변을 하고 수업을 마쳤다. 그런데 이날 이후로 기도할 때마다 주님은 ‘필리핀 사람들을 선교지로 보내라’고 하시는 것 같아서 기도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주님, 필리핀교회가 얼마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있는지 아시면서 어떻게 그들을 선교지로 보냅니까?”라고 항변하며 기도하는 내게 주님은 계속하여 선명하게 ‘필리핀 사람들을 선교지로 보내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역하기 힘든 어떤 영적인 힘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여러 날을 씨름하듯 기도하다가 하루는 수업 시간에 “여러분 가운데 혹시 주님이 캄보디아에 가라고 하면 갈 분들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대략 11~12명 정도가 손을 들었다. 

필리핀 사람들의 ‘예스’에는 대략 여섯 가지 다른 뜻이 있다. 그들은 직설적 언어로 자신들의 언어를 표현하지 않고 그들의 문화 안에서만 해독이 가능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기 때문에 그들의 예스를 순전한 의미의 예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단기선교 참가 신청서’ 양식을 만들고 여기에 10달러 정도의 등록비를 내어 신청하도록 하여 그들의 진정성을 확인하려고 했다. 며칠 만에 단기선교에 참가하겠다고 신청서를 써낸 사람은 34명이었다. 아마 그동안 내가 선교학을 강의하면서 선교현장에 대한 다양한 도전을 준 이유도 조금은 있겠지만 예상보다 많은 학생들이 신청하였다. 필리핀 교수 한 분은 내게 찾아와 “김 교수님, 아마 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참가하지 못할 것이니 혹 그렇게 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그들의 참가 신청서 제출은 그들의 희망을 표현하는 예스이지 실제로 참가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내가 사역하던 필리핀 침례교신학대학원(PBTS)을 포함한 필리핀 침례교단(LCSBC)은 교세가 크지 않은 편이고,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학비도 제대로 못 낼 만큼 궁색하였다. 이들이 단기선교에 참가하겠다고 했지만 우리가 대면한 현실은 (1) 단기선교를 나가겠다고 신청한 34명 중 등록비 10달러를 낼 수 있는 학생들은 9명에 불과했다. 사진 한 장 찍어 신청서에 붙일 형편이 안 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2) 선교비도 없는데 무작정 가겠다는 무모해 보이는 헌신. (3) 미국 교수들을 중심으로 교수회의에서 ‘단기선교를 가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교수들에게는 모금을 할 수 없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그때까지는 미국 교수들이 필리핀 학생들을 위해 여러 모양으로 후원을 하였었다). (4) 이들이 단기선교에 참가하려는 것은 ‘미국 가는 비자를 다른 나라에서는 받기가 쉽기 때문’이라든가 ‘다른 나라에서 전자 제품을 저가에 구입할 수 있어서’라든가, 아니면 ‘단순한 해외 여행(관광)을 하기 위해서 선교를 이용하려는 것이다’라는 등의 소문들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믿고 기댈 곳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위대한 것을 기대하라. 하나님께 위대한 것을 시도하라’고 한 윌리엄 캐리가 남긴 말의 순서를 바꾸어 ‘먼저 믿음으로 하나님께 위대한 것을 시도하자. 그리고 하나님께 위대한 것을 기대하자’라고 도전하면서 ‘믿음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자. 기적을 경험하자’고 외쳤다. 학생들도 기도모임을 시작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CCC와 네비게이토선교회에서 모금 교육을 강의하는 필리핀 분을 초청하여 성경이 말하는 모금에 대한 강좌도 열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학생들이 달려와 “교수님, 어느 교회에서어느 성도님이저희가 선교하러 가는 데 후원하고 싶다면서 후원금을 보내왔어요”라는 가슴 설레는 간증을 매일 듣게 되었다. 어떤 친구들은 단기선교에 나가는 친구들을 위해 교회를 청소해 주거나 세차를 해 주는 활동을 통해 그들의 선교비가 마련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드디어 모든 신청자들의 후원금이 채워졌다. 그런데 교수회의에서 다시 제동을 걸었다. 학교에 등록금이나 기숙사비 등 내야할 돈을 내지 못한 친구들 가운데 갚아야 할 돈이 일정액 이상이면 단기선교에 참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명분은 ‘학교에 빚이 있는 사람이 선교하러 간다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선교비로 후원 받은 것을 학교에 밀린 빚을 갚고 선교하러 가지 않는 것은 윤리적으로 합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어 하면서도 학생들은 약자였다. 34명 중 25명 정도가 학교에 빚이 있었고 그들이 갚아야 할 빚은 상당했다. 그들은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적같이 교수회의에서 지정한 마감 시간 10분 전에 모든 빚이 갚아졌다. 필리핀 침례교신학대학원의 50년이 넘는 역사 속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필리핀교회는 오랜 세월 ‘하나님께 위대한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언젠가 그 위대한 것이 주어지는 날 하나님께 위대한 것을 드리겠다’는 의식이 있었는데 그 의식이 변화되는 역사였다. 그때 교수들의 놀란 표정과 다물지 못하던 입들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일부 교수들은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혹 김 교수가 학생들의 빚을 대신 갚아 주었느냐?” 하고 아내에게 묻기도 했다. 사실은 나도 어떻게 그들이 그 빚을 다 갚았는지 궁금할 정도로 주님은 기적을 베푸셨다. 

34명의 단기선교 헌신자들에게 무작정 선교지로 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연말연시(12월과 1월 중 한 달간) 방학을 이용하여 배낭을 메고 가장 저렴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이동을 하고, 가장 저렴한 숙소를 찾아 머물고, 가장 싸면서도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식사를 하면서 한달 동안 290여 시간 이동하면서 이들을 배치할 곳을 찾아다녔다. 

이들이 단기선교 사역을 마치고 필리핀으로 되돌아왔을 때 대학원 안에는 변혁이 일어났고 삶의 변화를 통해 사역자로서 당당함을 갖고 있었다. 캄보디아를 비롯하여 태국, 베트남, 라오스 등의 필드에 나가 사역하면서 선교가 서구교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이며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이 변화되는 경험들을 하였다. 어느 누구도 미국행 비자를 신청하거나 전자제품을 사려고 전자상가를 두리번거리지 않았으며 관광지를 찾아 다니지도 않았다. 이들은 현지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 그들과 동일시하려고 노력하였고 자신들의 삶으로 복음을 전했다. 

이들의 변화를 보면서 필리핀의 여러 교회들이 동참하고 싶다고 우리에게 단기선교의 문호를 열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 온 형제와 자매들이 이 단기선교 프로젝트에 참여한 뒤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저비용으로 선교가 가능하며 어떤 면에서는 보다 효과적’이라고 도전하기 시작하면서 남반구선교운동은 중국과 인도네시아, 인도, 이디오피아 등 여러 나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남반구선교운동, 작지만 큰 변화
우리가 선교는 ‘주님의 지상명령’이라고 말하지만 이제까지의 선교 구조로는 가난한 나라의 교회들이 선교적 과업에 동참하기가 쉽지 않았다. 남반구선교운동을 하면서 현장에서 배우게 되는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가 ‘남반구교회 역시 주님의 교회로서 선교 지향적 공동체’라는 것이다. 단기선교 프로젝트를 통해 배우게 된 교훈들은 대략 아래와 같다.

남반구에 속한 대부분의 아시아와 아프리카교회들의 연약함은 부족한 재정이 아니라 교회와 선교 지도자들이 외부 지원 등에 기대려는 의존적 사고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풀어내지 않는 한 우리가 남반구에서 선교를 일으키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가난한 선교지에서 선교사들과 현지인들의 삶에는 상당한 간격이 있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선교사들에게 은과 금을 기대하고 있고, 아프거나 재정이 필요할 때 하나님이 아니라 선교사를 찾아와 그들의 궁핍한 사연을 털어 놓는다. 하나님께 부르짖기보다 재정적 여유가 있는 선교사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더 쉽게 응답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하다. 이처럼 어떤 면에서는 현지인들은 그들의 필요가 있을 때 주님을 향해 기도하기보다 선교사에게 기도하듯 요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선교사들이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혹시라도 우리 선교사들이 물질이나 그와 유사한 어떤 힘을 지나치게 갖고 있다면 이제 그 힘을 내려 놓고, 그들의 요청이나 기도를 듣는 자리에서 겸손히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오히려 현지인들과 교회를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준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현지교회들이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변화하려는 현지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성숙한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따라서 ‘선교적 교회’가 되도록 돕는 일은 병들고 연약한 아시아와 아프리카교회들을 건강하게 세워 줄 수 있는 중요한 틀이 된다

 가능하면 잘 준비되고 적합한 사람들을 발굴하여 선교사로 내보내는 것이 좋지만 이러한 노력이 오히려 남반구선교를 위축시킬 수도 있다. 준비가 덜 된 사람일지라도 선교현장에서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고 사역적 역량을 점검하면서 필요한 부분을 준비해 가도록 도울 필요도 있다. 이것은 여러 문제를 내포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남반구의 젊은 선교사 자원들이 가볍게 선교에 참여하도록 하면서 선교의 정도를 높여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울러 남반구 출신의 선교사들에게 서구 선교사와 같은 교육과 훈련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남반구 사역자들에게 적합하고 그들이 실제로 일할 사역현장에 맞는 훈련과 교육을 개발하도록 도전할 필요가 있다. 

 다소 역설적이겠지만 남반구 선교사들이 적은 비용으로 현지인들과 함께 살면서 사역하는 경우 언어습득, 문화습득에 있어서도 진보가 빠르며 사역적 결실도 더 탄실할 수가 있다. 서구 위주의 선교는 남반구에서 선교운동을 일으키는 데 적용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한 달에 100~300달러 정도의 저비용으로 선교를 할 수 있는 남반구형 선교 구조가 오히려 많은 선교지에서 좋은 열매를 거둘 수도 있다. 선교사들이 현지인들의 수준에 맞춰 그들과 동일시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이것은 선교의 돌파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남반구에서 선교에 헌신한 이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 부족한 재정이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당신 스스로 경험하라. 괜히 당신도 못 믿는 하나님을 전하려고 생고생하지 마라.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인지 아닌지 선교 동역자들을 개발하면서 먼저 경험해 보라. 그리고 당신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확신할 때 나가서 일하라.” 선교는 서구나 비서구의 구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역자들 스스로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자신의 삶 가운데 영적 돌파가 일어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선교사 배치에 있어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공급자 중심의 사고인가 아니면 수요자 중심의 사고인가’ 하는 점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선교현장의 요구를 정확히 인식할 때 선교사들은 더 깊은 헌신을 드릴 수 있다. 현장에서 선교사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존엄을 확인하고, 사명에 집중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선교 지도자들이 더 열정적으로 준비하면서 필요한 사람을 필요한 지역과 사역에 투입하는 ‘선교 지식경영적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나는 1년에 6개월에서 8개월, 때로는 10개월을 선교지 개척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보내기도 했는데 이러한 작업은 선교에 있어서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지역에 들어가 사역하면서 불필요한 낭비 요소를 줄이고 사역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유익이 있었다.

 서구와 비서구를 막론하고 기존의 고비용/저비용 선교 패러다임을 저비용/고효율 구조로 전환하는 일을 통해 선교의 새로운 장르들을 개척해야 한다.

 우리는 2002년부터 현재까지 약 30만 불 정도의 재정을 남반구선교운동의 마중물로 투입하였는데 이 사역의 결과로 필리핀,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 파푸아 뉴기니 등 아시아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유럽, 북미주 등의 45개국에서 나온 단/장기 선교사는 6,000명을 웃돌고, 이들이 섬긴 나라들은 50여 개국에 이른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모금한 선교 재정은 수억 불을 훨씬 상회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더불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수십여 개의 선교단체가 새롭게 창설되거나 활성화하였다. 

남반구선교운동, 미래선교의 대안
선교에서 단편적 사고보다 통찰력을 가지고 선교지와 사역의 다양성을 보기 시작하면 선교적 융합이 일어난다. 무엇보다 지금은 서구교회들의 선교적 지식과 자산과 경험 등을 남반구선교운동에 적절하게 풀어 담아낼 수 있는 통섭(統攝)적 선교가 필요한 시기이다. 전략적 사고를 통해 이질적 요소를 결합하여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는 선교적 통섭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 오늘의 선교현장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도전의식과 창조적 열정으로 가득 찬 통섭적 지도자, 선교의 다양한 영역을 아우를 수 있는 융합형 선교 지도력을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선교의 대안으로 부상하는 남반구선교운동을 주목하면서 미래선교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 가야 할 필요가 있다.



남반구선교운동, 한국선교사의 역할

예수님의 삶: 성육신과 동일시 & 거시적 비전
‘예수님이 3년의 공생애를 통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실 전략적 목표를 설정해 두셨더라면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들이 있었지 않았을까?’ 만약 내가 예수님이었다면, 나는 목회학 석사(M.Div.)를 줄 수 있을 정도의 3년제 신학대학원을 설립하여 이스라엘 각지에서 가장 믿음이 돈독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찾고, 엄격한 선발 기준을 거쳐 100명 정도를 뽑고 그들에게 집중했을 것 같다. 그리고 3년 정도 집중교육을 통해 모든 면에 탁월한 인재들을 세상에 내보내 그들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여 사역자들을 재생산해 내도록 하거나 교회를 개척하도록 하여 사역을 하도록 했을 것 같다. 대형 집회를 열 때마다 천국에 대한 비전을 나누면서 세계선교센터를 예루살렘에 건립하여 선교운동이 지속되도록 했을 것 같기도 하다. 세계선교센터를 크게 짓고, 여기에 수익 사업도 함께해서 예수님이 안 계셔도 계속 선교사역이 유지되도록 재정적인 자립도도 높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갖고 계신 엄청난 사명에 비해 선발하신 제자들은 그 당시 기준으로 봐도 엘리트들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거기에다가 제대로 된 강의실 하나 없이 계속 이동식 수업을 하는 것 등을 볼 때 정규 교육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의 훈련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선교를 알아가면 알아 갈수록 예수님의 훈련 방식이나 훈련 철학이 가슴에 와 닿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에 집중하신 것은 무엇인가? 즉 예수님 사역의 본질과 그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주님께서는 선교센터나 신학교, 교회당과 같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 들어가 동일시되는 삶을 사셨고(요 1:14), 제자들과 함께 삶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DNA를 불어넣으셨고, 마태복음 6:33절의 말씀처럼 철저하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셨다. 더불어 예수님은 언제나 다음 동네, 다음 지역, 다음 나라, 더 나아가서 천하 만민, 땅 끝까지의 거시적 비전을 품게 하셨다. 

후츠파 정신: Make ‘No’ to ‘Yes’
한국선교사들이 선교현장까지는 찾아갔고 그들과 거주하는 자리까지는 다가갔지만 과연 얼마나 철저하게 현지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경우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한국선교사들이 선교현장에서 현지인들과 문화적 거리를 좁히려고 노력하거나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 동일시하려는 노력은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선교사 훈련을 하면서 가능하면 음식이라든가 훈련 환경을 일반적으로 선교지보다 한 단계 낮은 상황을 설정하여 훈련했다. 그렇게 훈련을 받고 나간 선교사들이 캄보디아의 오지에서, 인도네시아나 이디오피아의 거친 선교현장에서 그곳의 열악한 환경을 보지 않고, 선교의 본질인 사람들에 집중하면서 사역을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정이나 선교적 경험이 부족한 남반구 선교사들을 훈련하면서 나는 강소국가 이스라엘의 숨겨진 DNA라고 할 수 있는 ‘후츠파(Chutzpah)’ 정신을 차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후츠파는 이스라엘의 국민성으로 ‘당참, 당돌함’, 혹은 ‘도전적 정신’을 의미하며 이것은 역설적으로 ‘결핍’을 ‘자원’으로 삼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정신,’ 즉 ‘No’를 ‘Yes’로 만드는 정신1)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남반구가 당면한 결핍을 역설적으로 자원으로 삼아 새로운 창조를 창출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시아 역내의 다양한 선교 모델
우리가 사역하고 있는 현장의 선교적 환경은 여전히 어렵다. 그렇지만 어렵다고 마냥 주저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선교지에서 후츠파의 정신처럼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 가는 많은 동역자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나는 여러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선교적 시도와 돌파를 주목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프놈펜에서 Oral Bible School 사역을 하는 Woody Thigpen선교사는 여성 문맹률이 높은 캄보디아의 특성을 감안하여 성경을 68장의 그림에 담아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Oral Bible School이나 라오스에서 조용하지만 알찬 열매를 맺고 있는 One Story Telling 사역은, 문해 사역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스토리 텔링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현지 밀착형, 성육신적 선교라고 할 수 있겠다.

 라오스의 지방 도시에서 사역하는 어느 분은 현지인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 함께 생활하던 중 현지인들의 요청에 따라 유치원을 설립했다. 지금은 중학교까지 운영하고 있는데 그 지역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 도시에서 아주 멀지 않은 다른 도시에서는 생물학 박사인 아내와 함께 양어장과 버섯농사 사역을 통해 지역 주민들의 필요를 채우면서 사역하는 분이 있다. 이분들은 모두 현지인들의 필요를 살피고 그 지역에 맞는 사역들을 개척한 분들이다. 라오스와 태국에서 축구를 통해 사역하는 좋은 모델들이 있는 것도 상당히 고무적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자신들의 전공을 내려 놓고 현장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 내어 그 사역을 새롭게 학습하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는 것을 우리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말레이시아의 KL에서 오랫동안 타문화권 선교사 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G단체의 훈련원 모델은 출신 지역과 선교현장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완충해 주는 역할과 함께 보다 전략적인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단일문화권과 단일언어권에서 생장한 우리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던지고 있다. 어느 중국선교단체의 경우 선교사들을 자국에서 1년가량 훈련을 하다가 지금은 선교현장의 한복판에서 3개월간의 훈련을 하고, 두 나라에 가서 각각 1개월 반씩 아웃 리치를 하면서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프놈펜 근교에서 천연 염색을 통해 직물류를 생산해 내는 사역자는 미국에서 파일럿 과정을 이수한 분인데 자신의 사역 현장에서는 현지인들의 필요에 맞춰 천연 염색을 새롭게 배워 현재 상당히 좋은 직물류를 생산해 내고 있다. 이분은 공정 무역을 지향하면서 함께 일하는 캄보디아 사람들을 중심으로 건강한 크리스천 공동체를 일구어 가고 있다. 태국의 북부지역에서 커피를 통해 선교하는 사역자의 경우도 선교사의 필요가 아니라 현지인들의 필요를 먼저 살피고 그 안에서 사역의 기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베트남의 호찌민 쪽에서는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베트남의 젊은이들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선교 모델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들이 경영하는 기업들을 기독교적인 기업인가 아닌가로 가름하기보다는 이들이 미치는 선한 영향력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라지연이라는 스터디 그룹이 라오스에 있는데 이 그룹에 참여하는 분들은 매년 다양한 정보를 담은 기도 일력을 출판하고 있다. 선교사 지원재단에서는 Mission Index 작업을 통해 선교현장에 대한 연구와 함께 전략적 선교를 추구하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선교적 토양을 마련해 가는 분들을 통해 선교의 지평이 넓혀져 가는 것이 우리에게 격려가 되고 있다. 

 동북인도 출신의 사역자들은 선교 초기라서 선배들도 별로 없고 선교지에 플랫폼을 설치할 만한 여력이 없지만 이들은 자민족을 99% 이상 복음화한 사역적 DNA가 있다. 동북인도침례교단협의회가 주창한 ‘Adopt the 110 Districts’운동은 동인도의 8개주에 거주하는 4억에 가까운 영혼들을 타깃으로 한 거대한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실행할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의 경험이나 지식을 활용할 공간은 없을까?

 동티모르 CV – 마스터 플랜: 동티모르가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시기였던 2000년. 그 나라에 들어가 12년간의 사역을 시작하며 처음부터 철저한 리서치 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사역에 대한 예견(envisioning)을 통해 선교의 큰 그림을 그려낸 ‘마스터 플랜’과 ‘출구전략’을 설정하고 일했던 브라질의 크리스천 비전(CV) 팀처럼 영적인 암흑에 있는 아시아지역에서 사역의 지향점을 보다 확실히 설정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선교지에 얼마나 더 오래 있었는가,’ ‘얼마나 큰 선교센터를 갖고 있는가’ 혹은 ‘얼마나 큰 사역을 하고 있는가’를 놓고 우리의 권위를 찾기보다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현지인들의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 속에서 복음의 핵심. 선교의 본질을 놓고 씨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들의 선교, 그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선교현장의 급격한 변화를 보면서 이제까지 우리가 해왔던 익숙한 선교를 내려 놓고 이제는 우리의 생각이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눈길이 머무는 선교지는 어디일까를 주목해야 한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동유럽 등 여러 지역에서 우리가 향후 전략적으로 집중해야 할 지역이나 종족은 어디이며 어떤 사역이 필요하고 보다 효과적일까? 그리고 이러한 정보는 어디에 어떤 방법으로 집약이 될 수 있고, 어떤 경로를 통해 필요한 사역자들에게 제공이 될 수 있을까? 선교의 지식 경영을 창출해내는 통로는 어디에 있는가를 놓고 고민을 해야 할 지점에 우리가 서 있다고 생각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선교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해 누구도 쉽게 예상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럼에도 몇몇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선제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선교사가 더 이상 선교의 주역이 되기 어려운 환경이 올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선교는 더 이상 평생 직업이 아닌 일정한 기간의 섬김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필드 사역을 마쳤거나 더 이상 현장에서 사역할 필요가 없을 경우라면 굳이 선교지에 머물려고 하기보다 새로운 직업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선교사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그동안의 선교, 선교단체나 교단 중심의 선교가 이제는 개교회나 일반 성도 중심의 선교로 바뀔 가능성도 크다. 지금까지 지역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후원하고, 선교단체나 교단 선교국에서 관리하는 형식의 선교에서 일반 성도들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주도적으로 선교사역을 하고, 지역교회가 선교적 공동체가 되거나 주도적으로 선교할 가능성도 예상해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들은 선교사로서 정체성보다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을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있고 이것은 직업과 경력으로서 새로운 선교사적 정체성을 발견해 내고 찾아가야 할 것 같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선교를 잠시 멈추는 시간에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삶과 가정을 돌아보고 회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복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단어는 통전성으로 번역되는 integrity로서 이것의 실제적 구현을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영역을 ‘통섭하는 선교’의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다. 단순한 형태의 선교에서 통섭적 선교로 전환을 해야 할 필요가 있고, 이런 전환을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지식과 이론 위주의 훈련에서 벗어나 새롭고 창의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선교의 지식경영이 가능한 통섭적 선교 리더십 풀을 우선적으로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선교단체와 개개인의 선교지 사역자들은 ‘전략적 선교의 마스터 플랜’ 설정을 통한 입구전략과 사역전략, 출구전략을 확실하게 만들어 실행할 필요가 있다.

 비거주선교: 한 지역에서의 평생 사역에 집착하기보다 이제는 여러 지역에서 사역하거나 다양한 필드를 이동하며 전략적으로 사역하는 노마드형 선교의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다.

 젊은 세대를 위한 ‘매력 있고 흥미로운 선교’를 개발하며 가야 할 필요가 있다. 현재 선교사들의 노령화가 심각한 상태이기 때문에 향후 15년 이내 많은 선교단체가 소멸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새로운 세대에 적합한 선교를 창출해야 한다. 더불어 선교사들의 노령화에 적합한 선교정책의 개발과 대책 마련도 필요하다.

 하나의 대륙이나 하나의 국가, 하나의 종교 전체를 바라보며 거시적 선교전략을 구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각 나라의 전략적 주요 리더들을 중심으로 사역할 수 있는 효율적/전략적 선교 구조를 만들어 보면 좋겠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단기적인 선교전략 개발도 필요하지만, 10년 후나 20년 후의 선교를 예견하고 전략을 개발하는 거시적 선교 리더십 개발과 함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선교를 위한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가동이 필요하다.

얼마 전 아내와 충남 태안의 ‘천리포 수목원’에 다녀왔다. 귀화 미국인 1호인 민병갈 박사(Carl Ferris Miller)가 버려진 바닷가 땅을 일궈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만들어 낸 곳이다.2)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선교의 지향점이다. 아직은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 같은 척박한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이미 여러 지역과 영역에서 좋은 선교 모델들을 창출해 내고 있다. 비록 누구도 우리를 알아주지 않고, 후원도 넉넉하지 않아 한결 더 고독한 싸움을 해야 하는 이 사역 현장에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거룩한 돌파를 이뤄내야 한다. 

우리가 개척한 지역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자리매김하도록 돕는 일에서 이러한 건강한 교회들의 재생산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이제는 교회개척을 넘어 선교개척을 소망하여야 하며, 창의적인 다양한 선교적 시도와 돌파를 이뤄 내는 일이 필요하다. 아울러 우리의 경험과 자산은 서구와 비서구의 선교를 이어 주는 역할에서 더 나아가 서구의 선교를 갱신할 수 있는 지혜와 역동성을 갖고 있어야 하며, 남반구의 선교를 새롭게 이끌어 낼 수 있는 통합적 역량과 경험을 동시에 갖고 있음을 기억하고 남반구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어 가도록 함께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생각하기
- 우리가 당면한 선교적 장애물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이 장애물들을 제거할 수 있을까? 
- 우리가 창의적으로 개척해야 할 선교 영역들은 어떤 것들인가?
- 우리가 선교적 돌파를 위해 우리가 업그레이드해야 할 부분들은 무엇인가?


미주  
1) 참고로 ‘후츠파’에 담긴 7가지 정신은 아래와 같다. 
- Informality(형식의 파괴). 
- Questioning on Authority(권위에 대한 의문. 기존의 것에 대한 의문)
- Mash-Up(상상력과 통섭), 통섭/융합을 통한 창조
- Risk Taking(위험 감수)
- Purpose Driven(목적지향적)
- Tenacity(끈질김)
- Learning from Failure(실수를 통해 배움)
2)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 민병갈에 대한 기사들이 많이 실려 있다. 






사진 출처 | 위키백과(맨 위)
앤드류 김 선교사 | GCFA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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