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적인 국가에서 인권 문제를 들여다볼 때, 어린이나 여성은 늘 뒷전이다. 어린이와 여성 그리고 고령층에 대해 그 사회가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해볼 수 있다. 인류학과 교수이자, 중국연구소 소장인 저자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 산간마을을 토대로 마오(毛) 시대의 공산당 시절과 개혁개방 후 달라진 여성들의 생활과 문제점을 밀착 취재했다. 중국 여성과 사회에 대한 이해에 한 발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펑롱(风龙)현은 중국 허베이(河北)성 동북 지방의 끝자락으로, 베이징(北京)에서 25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며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지에 자리 잡고 있다. 펑롱현은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허베이성 내에서 가장 빈곤한 현 중 하나로 꼽혔지만, 2021년 개통된 친황다오(秦皇岛)시와 탕산(唐山)시를 잇는 고속도로가 펑롱현을 지나가게 되면서 가장 빈곤한 지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주변에는 최근 광산개발이 한창이다. 철광이 스무 군데 이상이고 매년 40만 톤 이상의 철광석을 생산한다. 이 광산들은 펑롱현 사람이 직접 운영하는 경우도 소수 있지만, 대부분은 가깝게는 산둥(山东)성에서부터 멀리는 네덜란드에 이르기까지, 돈 많은 외부 사업가들이 투자하고 펑롱현 정부가 개발을 인준해주며 현지 농민들이 계약직 광부로 고용되는 삼자간 협업 형태를 띠고 있다.
농촌 여성들의 자살률 증가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여성의 역할은 별로 달라진 점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비판과 계몽의 대상이 되었다는 현실이다. 경제구조 개혁의 달라진 양상 중 ‘개별가족의 특수성’은 일견 좋아 보이는 듯하나, 여성의 입장에선 달갑지 않다. 주민들에게 여성의 문제는 남녀차별이나 (가정 내) 구조적인 폭력의 문제라기보다 해당 가족의 사사로운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만큼 여성들의 인권 문제가 심각해졌다는 이야기다. 안타까운 것은 중국 농촌 여성들의 높은 자살률이다. 세계보건기구로부터 ‘세계가 주목해야 할 정신보건 문제’ 중 하나로 지적하고 있다. 중국 농촌 여성들의 높은 자살률에 대해 여성의 입장과 그들을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이 상반된다. “여자들 속이 너무 좁아서 그래(女性的心眼太小)”라는 마을 주민들, 농촌 여성들은 배운 것이 없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집안에 무슨 사소한 일이라도 발생했다 하면 대뜸 농약부터 마시려고 하기 때문에 자살률이 높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러나 경제적 곤란, 친척과 이웃 간의 질투, 배우자의 외도와 도박, 강요된 혼인 등과 같은 일들이 여성들에게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사느니 죽는 게 더 낫다(死的比活着更好)”라는 말을 하겠는가.
“결국 중국 농촌에서 여성의 자살이 빈번했던 이유는 한편으로 농촌의 전통적인 성별 구조와 개혁개방 이후 혼란스러운 사회·문화적 환경이 야기한 다양한 삶의 문제들과 다른 한편으로 고립된 농촌 공동체에서 세대를 거쳐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문화적 대응전략이 함께 관여한 결과이다.” 여성의 속이 좁아서라기보다는 마치 경주마의 차안대(遮眼帶)처럼 중국 농촌의 사회 구조와 역사적 환경이 여성의 속마음이 도달할 수 있는 지평을 그만큼 좁힌 것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오늘날의 10대나 20대 여성들은 왜 윗세대 여성들이 굳이 자살을 선택해왔는지 잘 납득하지 못하는 변화가 오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사회의 변화와 성적 쾌락 근대 이후 중국에서 성적 쾌락이 사회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개혁개방 이후의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에서 17세기 이후에는 성에 대한 모든 관용이 사라졌으며 경직된 태도가 유지되어 왔다. 청나라(1644-1910)는 유교의 금욕주의를 강요하고 백성들의 성행위를 제한했다. 만주국에서 성이란 전통적인 젠더 역할에 한정된 것이었다. 아이들의 출산을 유일한 성의 목적으로 간주했다. 혼인과 관련 없는 성행위는 금지되었지만, 매매춘이나 일부다처제 결혼은 허락되었다. 국가는 결혼과 출산을 장려했지만, 성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행위는 억압되었다.
시대를 훌쩍 건너뛰어 문화대혁명 시기(1966-76)를 거치면서 성 억압 문화는 더욱 극심해졌다. 의복, 직업, 심리적인 차별에서 성 차이는 완전히 부정되었다. 결혼도 평가절하되었다. 혁명 영웅들은 모두 총각이나 과부들이었다. 부부간의 감정은 이들이 계급투쟁에 얼마나 헌신하는가에 따라서 평가되었다. 문혁 시기에 낭만적인 사랑은 부르주아적 감상주의라며 경멸을 받았다. 음악, 시각, 예술 그리고 문학에서 섹스와 관련된 것들은 모든 문화와 즐거움의 영역에서 사라졌다. 생식(生殖)을 위한 부부관계는 허용되었지만, 개인적인 친밀감은 외부에 의해 심각하게 방해되었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극단적인 현상도 같은 시기에 나타났다. 1968년 문화대혁명 때, 예를 들어 일부 지역에서는 불법 매춘부들이 등장했으며, 무분별한 성행위와 청소년들의 집단 성관계가 활발하게 나타났고, 성병 발병률이 증가했으며 손으로 쓴 에로틱한 글들이 떠돌아다녔다. 이처럼 청왕조 이후 개혁개방까지 중국에서 성은 전반적으로 젠더, 혼인, 생식, 사랑 그리고 일상생활을 규제함으로써 이성애적이고 혼인과 관련된 성행위 이외에는 억압되었다. 그리하여 겉으로 보기에 이 시기의 중국의 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시기에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마오쩌둥(毛泽东)은 인구의 규모가 국력을 상징한다고 보았고 더 많은 자녀를 낳을 것을 권장했다. 맬서스의 인구이론에 적용해볼 때 과도한 인구증가는 생산력 발전을 침해한다. 이러한 비판은 마오가 죽은 1976년부터 ‘한자녀정책’으로 자리 잡는다. 개혁기 중국에서 성에 대한 개념과 성도덕은 어떤 혁명적인 시도나 공식적인 국가의 정책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점진적인 외부의 문화적 유입과 사회적 수용 속에서 성과 관련된 다양한 사상과 실천에 대한 억압의 감소, 관용의 증가를 통해서 변해왔다. 그에 따라 오늘날 혼전 섹스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거나 혼외 연애를 부도덕하다고 보는 사람들, 성이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