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서는 지난호에 이어서 한국어 성어와 중국어 성어가 ‘형태는 동일하지만 의미가 다른 사자성어(同形异义)’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교토삼굴 (狡兔三窟):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숨을 수 있는 굴을 파 놓는다’는 뜻으로, 사람이 교묘하게 잘 숨어 재난을 피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 성어는《사기(史记)》 <맹상군열전(孟尝君列传)>에 나오는 데,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재상 맹상군과 풍환(冯驩)의 일화에서 유래하였다. 맹상군의 식객(食客) 중에 풍환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설(薛)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맹상군에게 진 채무를 면제해 줌으로써 맹상군을 노엽게 만들었다. 일 년 후에 맹상군이 민왕(泯王)에게 미움을 사서 재상 자리에서 쫓겨나자 풍환은 그를 설 땅으로 모셨다. 풍환은 맹산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혜로운 토끼는 굴을 세 개 파 놓는다(狡免三窟)고 하는데, 주군께서는 이제 한 개를 마련했습니다. 제가 나머지 두 개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그후 풍환은 탁월한 기지를 발휘해서 위나라 혜왕(慧王)이 맹상군를 등용하도록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민왕은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하고 맹상군을 재상의 직위에 복귀시켰다. 그후 맹상군은 아무런 어려움없이 순조롭게 제나라 재상을 지냈다. 이와 대응하는 중국어 성어는 ‘狡兔三窟’ [jiǎo tù sān kū]이다. 감출 수 있는 장소가 많거나 숨기는 방법이 많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한국어 성어는 원래의 뜻에서 파생되어 ‘사람이 교묘하게 잘 숨어서 재난을 피한다’는 것을 뜻하는 데 반해, 중국어 성어는 ‘숨기는 장소나 방법이 많다’는 뜻으로 원래의 의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2. 암중모색(暗中摸索): ‘물건 따위를 어둠 속에서 더듬어 찾거나, 막연한 상황 속에서 일의 실마리나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성어는 당(唐)나라 유속(刘餗)이라는 역사학자가 편찬한 《수당가화(隋唐嘉话)》에 나오는 말이다. 당나라 제3대 황제인 고종(高宗)이 황후 왕씨를 폐하고 측천무후(则天武后)를 황후로 맞이했다. 이때 측천무후를 옹립하는 데 중심역할을 한 사람이 허경종(许敬宗)이다. 그는 성격이 오만하고 건망증이 심해서 사람을 여러 번 만나더라도 그 얼굴을 곧 잊어버리고는 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비난하자 허경종은 “당신 같은 사람의 얼굴이야 기억하기 어렵지만, 만약 하손(何逊), 유효표(刘孝标), 심약(沈约), 사조(谢朓) 같은 문단의 대가들을 만난다면 어둠 속에서 더듬어 찾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다(暗中摸索者亦可识之).”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에서 암중모색이 유래하였다. 이와 대응하는 중국어 성어는 ‘暗中摸索’ [àn zhōng mō suǒ]이다. 원래는 어둠 속에서 물건을 찾는다는 뜻이었으나, 현재는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혼자서 그 뜻을 깊이 연구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한국어 성어는 ‘막연한 상황에서 해결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을 뜻하는 데, 중국어 성어는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혼자서 연구하는 것’을 뜻한다.
3. 행운유수(行雲流水): ‘떠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을 이르는 말로, 일의 처리가 자연스럽고 거침이 없거나 사람의 마음씨가 시원하고 씩씩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성어는 《송사(宋史)》의 <소식전(苏轼传)>과 소식이 친구의 문장을 칭찬하기 위해 쓴 글인《답사민사서(答谢民师书)》에 나오는 말이다. 소식은 《답사민사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글은) 대략 구름이 떠가고 물이 흐르는 것처럼, 처음부터 정해진 모양은 없으나, 항상 마땅히 가야 할 곳에 가고, 그치지 않으면 안 될 곳에서 항상 그친다(大略如行云流水,初无定质,但常行于所当行,常止于所不可不止).” 이 글에서 행운유수가 유래되었다. 이와 대응하는 중국어 성어는 ‘行云流水’ [xíng yún liú shuǐ]이다. 떠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처럼 글이나 문장이 자연스럽고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어 성어는 원래의 의미와 같이 반드시 ‘문장의 수려함을 형용하는 말’로 쓰이지만 한국어 성어는 ‘일을 처리할 때 막힘이 없거나 사람의 마음씨가 시원스럽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4. 기불택식(飢不擇食): ‘굶주린 사람은 먹을 것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빈곤한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은혜에도 감격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 성어는 송(宋)나라의 승려 보제(普济)가 쓴 《오등회원(五灯会元)》에 나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승려에게 물었다. 스님은 어떻게 생활을 하십니까? 그러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먹을 것을 가리지 않습니다(问: 如何是和尚家风? 师曰: 饥不择食).” 이와 비슷한 성어로는 ‘한불택의(寒不择衣)’가 있는데, 이것은 ‘추우면 옷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와 대응하는 중국어 성어는 ‘饥不择食’ [jī bù zé shí]이다. 상황이 급박하면 어떤 것을 선택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한국어 성어는 원래 뜻에서 파생되어 ‘가난한 사람은 작은 것에도 감격한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데 반해, 중국어 성어는 원래의 의미와 같이 ‘상황이 급박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5. 군경절축(群輕折軸):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도 많이 모이면 수레의 굴대를 부러뜨릴 수 있다’는 뜻으로, 작은 힘이라도 뭉치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성어는《전국책(战国策)》<위책일(魏策一)>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 전국시대에 진(秦)나라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 약소국인 한(韩)ㆍ위(魏)ㆍ조(赵)ㆍ초(楚)ㆍ연(燕)ㆍ제의 여섯 나라가 종(從)으로 동맹을 맺어 진나라에 대항하자는 합종책(合從策)을 세웠다. 그러자 진나라의 장의(张仪)가 제의하여 이들 여섯 나라와 횡(橫)으로 각각 동맹을 맺어 화친하자는 연횡책(连橫策)이 등장했다. 장의는 합종책을 깨기 위해 위나라로 가서 애왕(哀王)에게 제나라와 초나라를 정벌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애왕이 머뭇거리자 진나라가 위나라를 침략해서 승리했다. 이듬해 위나라는 또 제나라의 침략을 받고 패했다. 위나라의 거듭되는 패전으로 합종책에 분열이 일어나자 이때 장의가 애왕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듣기에는 새의 깃털도 쌓이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것도 모이면 수레의 굴대를 부러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臣闻, 积羽沉舟,群轻折轴).” 이 말에서 군경절축이 유래하였다. 이와 대응하는 중국어 성어는 ‘群轻折轴’ [qún qīng zhé zhóu]이다. 작지만 나쁜 일을 그냥 내버려두면 나중에 쌓여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다. 한국어 성어는 ‘아무리 작은 힘이라도 뭉치면 큰 힘이 된다’는 말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중국어 성어는 ‘작은 나쁜 일이 쌓여서 큰 재앙이 된다’는 뜻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6. 엄이도령(掩耳盜鈴):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친다’는 뜻으로, 모든 사람이 그 잘못을 다 알고 있는데 얕은꾀를 써서 남을 속이려고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성어는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자지편(自知篇)>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 춘추시대 말엽에 진(晉)나라에서 치열한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이때 세력이 가장 막강했던 범씨(犯氏)와 중행씨(中行氏)가 신흥세력의 공격을 받아 무너졌다. 범씨가 몰락하여 어수선하게 되자 도둑이 그 틈을 노려 범씨 집에 몰래 들어가 큰 종을 훔쳐가려고 했다. 하지만 종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도저히 들고 갈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도둑은 그 종을 조각내서 가져가기로 마음먹고 큰 쇠망치로 종을 힘껏 내리쳤다. 그 순간 ‘꽝’ 하는 종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 펴졌다. 도둑은 다른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을까 무서워 얼른 자기의 귀를 틀어막았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된 사자성어는 원래 ‘엄이도종(掩耳盜钟: 귀를 가리고 종을 훔친다)’이었다. 후세에 ‘쇠 종(钟)’ 대신 ‘방울 령(铃)’이란 글자를 사용하게 되어 ‘엄이도령’이 되었다. 이와 대응하는 중국어 성어는 ‘掩耳盗铃’ [yǎn ěr dào líng]이다. 나쁜 짓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속이고, 숨길 수 없는 일을 억지로 덮으려고 애쓰는 행위를 말한다. 한국어 성어는 그 의미가 파생되어 ‘졸렬한 방법으로 남을 속이려고 하는 것’을 비유한 말인 데 반해, 중국어 성어는 원래의 의미대로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행동’을 이르는 말이다.
7. 총욕약경(寵辱若驚): ‘평범한 사람은 사소한 총애와 모욕에도 놀라지만 사물의 도리에 정통한 사람은 그런 것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총애와 모욕을 초월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 성어는 노자(老子)의《도덕경(道德经)》13장에 나오는 말이다. “총애를 받으나 모욕을 받으나 놀란 것같이 하라. 큰 걱정을 귀하게 여기고 내 몸과 같이 하라. 총애를 받으나 모욕을 받으나 늘 놀란 것같이 하라는 말은 무엇을 일컫는 것인가? 총애는 항상 모욕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얻어도 놀란 것처럼 할 것이요, 그것을 잃어도 놀란 것 같이 하라. 이것을 일컬어 총애를 받으나 모욕을 받으나 늘 놀란 것같이 하라는 것이다(宠辱若惊,贵大患若身。何为宠辱若惊?宠为下,得之若惊,失之若惊,是谓宠辱若惊).” 이 성어는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이와 대응하는 중국어 성어는 ‘宠辱若惊’ [chǒng rǔ ruò jīng]이다. 총애를 받으나 모욕을 받으나 마음이 놀란다는 뜻으로, 사람은 언제나 이해 득실을 따진다는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한국어 성어는 ‘총애와 모욕에 흔들리지 말고 그것을 초월함’을 비유한 말이지만, 중국어 성어는 ‘총애와 모욕에 놀라면서 이해득실을 따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 | 바이두 석은혜 | 본웹진 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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