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번 ‘특별 기고’ 코너의 내용은 (2021. 1월호, vol.121)에서 소개되었던 ‘언택트 시대에서 바라본 선교’라는 글입니다. 이 글을 본웹진에 실을 수 있게 허락해주신 김동화 GMF법인 전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직 진행 중인 팬데믹 상황, IT의 발달은 비대면 접촉을 심화시키고 있는 가운데 “참된 영적인 삶은 오히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존재의 토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대로의 삶에 관여하는 끝없는 과정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본받는 삶”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크게 공감합니다. 독자님들도 성경적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절박한 시대적 과제임을 기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난 한 해 일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하는 엄청난 일을 겪었으며 그 일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COVID-19라는 명칭이 부여된 이 팬데믹은 지구촌 전체를 들쑤셔 놓았고 곧 희생자가 1백만을 돌파할 것이라고 한다. 첨단 바이오 기술 덕분에 신속하게 백신이 개발되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향후 1년 동안은 마스크를 벗기 어려울 것 같다.
이러한 팬데믹 상황은 이미 IT의 발달로 인해 생겨난 비대면 접촉을 선호하는 경향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기기는 인간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회의 중에도, 모임 중에도, 이동 중에도, 눈을 마주치면서도, 심지어는 장례식이 진행되는 자리에서도 전화기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대부분 이 기기가 없으면 안절부절못하는 현상이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연결되어 있지 못하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런 연결성 테크놀로지들은 즉각적이고도 상시적인 연결을 가능케 해 줌으로써 우리에게 시간적인 여유를 가져다줄 것 같지만 오히려 늘 시간이 부족하게 만들고 있다. 스마트폰이 일과 여가의 경계선을 잠식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을’ 때조차 ‘통화 대기’ 상태에 놓이는 게 현실이다. IT의 발달은 우리에게 자유를 약속하면서 우리를 구속한다.
이러한 변화를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증기 기관의 등장으로 일어난 산업혁명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평범한 개인이 잉여재산을 보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 이전에는 유럽에서조차 모든 사람이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근과 역병 등으로 인해 언제나 생사의 기로에서 아슬아슬하게 생존하고 있었으며, 그 누구도 공동체를 따나서는 생존할 수 없었다. 산업혁명은 이제 개인이 공동체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개인주의의 등장을 가져왔다. 역사상 처음으로 자율적 개인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자기 인생은 자기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였다. 양로원, 고아원 등이 생겨난 것도 이때였다. 이처럼 기술 문명의 발달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기술의 발전은 산업혁명을 불러왔고, 산업혁명은 개인주의의 등장을 가져왔으며, 이는 공동체의 약화 또는 붕괴를 야기하게 되었다.
신앙생활은 관계의 문제로 정의할 수 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자기 자신을 포함하여)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개인이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첫 번째 교회(예루살렘 공동체)의 모습에서 이를 잘 알 수 있으며, 초창기 교회의 모습 또한 그러하였다. 그런데 계몽주의의 등장과 산업혁명은 이러한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20세기 후반부터 IT에 의해 인간관계의 변화는 더욱 심화되고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왔고, COVID-19는 이를 가속화하고 있다. 언택트 시대의 전개 오늘날의 세계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자동화와 전산화의 길을 가고 있다. 공장은 자동화하고 상거래도 대부분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진다. 사물 인터넷 시대가 시작되었고, 사람 대신 로봇이 사람을 돌보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시장에서 흥정하는 일도 사라져 가고, 더 나아가 물건을 사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어지고 있다. 상점에 가서도 계산대의 직원조차 점점 만날 필요가 없어져 간다. 그리고 허리가 쑤시면 비가 올 것 같다고 말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물어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 있다. 간단하게 스마트폰으로 날씨도 알 수 있고, 엄청난 양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방식도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의사소통에 있어 직접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신체 접촉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모니터와 스크린을 통해 대부분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전화로 대화하는 것조차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식사도 혼자 하고 개인적인 생활의 대부분을 혼자서 영위한다. 한국의 경우 이미 전체 가구의 30% 이상이 1인 가구가 되었고, 고독사가 사회 문제가 된 지도 오래되었다.
이처럼 기기들이 자아와 대인관계를 조정하는 현상은 한국과 같이 인터넷 사용이 상시로 이루어지는 많은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SNS를 통해 하루 종일 소통하지만 상대방과 친해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스마트 기기 스크린 위의 삶에서 진정한 우정을 찾을 수 있을까? 로봇과의 진정한 교감은 가능한가? 이모티콘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성찰보다는 신속한 반응을 요구하는 디지털화한 우정은 자칫 피상적인 관계에 머무르게 한다. 사람들은 늘 연결되었지만 갈수록 더 불안하고 고립되고, 외로워진다.
서로 보여주고 싶은 것만 편집해서 보여주고 나타나고 싶을 때만 나타나도 되는 문자 교환과 SNS상의 대화는 진정한 대화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러한 현상을 연구하는 사회학자에게 어떤 사춘기 소년은 “언젠가 저도 정말로 대화를 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그렇지만 분명히 지금은 아니에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는 친밀한 유대(intimacy)를 두려워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는 것도 힘들고,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도 알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손쉬운 연결성은 로봇처럼 편리하게 친구관계를 맺을 수 있는 대체물을 제안하며 유혹하고 있다. 우리는 인터넷상에서 늘 누군가를 찾을 수 있으며, 자리를 함께하는 사람과 깊은 대화를 하기보다는 문자와 SNS로 교신하는 것에 더 익숙하다. 그 자리에 있기는 하지만 정말로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대합실과 카페, 라운지와 같은 곳들도 이제는 더 이상 공동의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집합의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언택트와 탈육화(excarnation) 마이클 프로스트는 이러한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공항 대합실이라고 하였다. 공항 대합실에서 사람들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관여(engage)하지 않는다. 일행이 아닌 사람들과는 대화할 필요도 없다. 마치 투명 인간처럼 서로를 대한다. 무슨 일을 할 것인지는 모니터를 보면 된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에는 모두들 각자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이러한 상시적인 연결성은 또한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는 고독(solitude)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방해한다. 서로를 깊이 알고 상호 교감하고 삶을 나누는(engaging) 것 그리고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피상적으로 서로를 대하고 자신을 대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처럼 모니터상에서 서로 대화하고 만나는 일이 많아지고 육신으로 만나고 부딪히고 어울리는 일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현상을 탈육화(脫肉化, excarnate) 현상이라고 부른다. 언택트 또는 비대면 현상이 바로 탈육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인간의 경험을 탈육화하고 사람들을 마치 물건이나 아아디어 정도로 대한다. SNS나 블로그상에서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것과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비정하고 냉혹한 이념적 토론이 그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다. 도덕과 윤리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인간을 비인격적 존재로 대하는 것은 포르노와 인터넷 도박, 좀비와 뱀파이어 영화 등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한 가상의 공간에서 어디에든 순식간에 들어갈 수 있지만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영적, 정서적인 단절을 경험한다.
언택트/탈육화의 역사적 배경 이러한 탈육화/언택트 현상의 배후에는 계몽주의에서 비롯된 합리주의와 기능주의의 도도한 흐름이 있다. 계몽주의는 초자연적인 것을 배제하고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자연질서와 자연법칙에만 의존하는 합리주의, 과학주의의 세계관이다. 계몽주의 이후에 사람들은 인간이 미신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사고를 극대화하면 인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머지않아 종교는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모더니티 현상은 20세기의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중국, 러시아, 캄보디아 등에서의 이념 투쟁으로 인해 한꺼번에 수천만 명이 죽게 되는 끔찍한 상황으로 인해 주춤하는 것 같았다. 세상이 발전하려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말살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그러한 합리주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끔찍한 일을 태연하게 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포스트모던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모더니티는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계속 맹위를 떨치고 있다. 세계화는 비용 절감을 통한 경쟁력의 확보를 위해 기계화, 자동화, 전산화, 규격화를 지나 인공지능과 로봇 시대까지 도래하게 하였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햄버거 가게에서 시작된 규격화, 표준화, 자동화의 맥도날드화(MacDonaldization) 현상은 모든 산업에서 맹위를 떨치며, 급기야 AI시대를 열어놓았다. 그리고 COVID-19라는 엄청난 재난은 이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언택트/탈육화와 선교 늘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를 깊이 알아가고 삶을 나누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이러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의 공동체로 존재하며 그 안에 깊은 교제와 친밀성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그렇게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위협이 된다. 깊은 관계는 많은 힘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선교도 결국 이러한 관계, 즉 하나님과 이웃들과의 관계 속으로 사람들을 초청하고 삶을 나누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것인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우리의 선교적 삶에 엄청난 도전이 되고 있다.
이미 21세기에 들어 이러한 상황은 세상을 기계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어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치고 결국 교회의 사명/선교(mission)도 탈육적인 접근을 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가 사는 삶의 구질구질하고 구체적인 현실 속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멀찍이 거리를 두는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단기선교 여행이 그렇고 전도에 있어서 다시 만날 일이 없는 낯선 사람들을 향한 사역 형태(치고 빠지기)를 선호하는 것에서 이러한 경향이 잘 나타나고 있다.
마이클 프로스트는 이러한 현상을 볼룬투어리스트(Voluntourist: Volunteer + Tourist)와 버케이셔너리즈(Vacationaries: Vacation + Missionaries)라는 신조어로 설명하였다. 휴가 기간을 이용하여 여행 겸 자원봉사로 선교지에 다녀와서 선교에 참여하였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몇 번의 클릭을 하는 것만으로 선교에 참여하였다고 생각하는 클릭 액티비즘(Click Activism)도 널리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형태의 사역으로는 삶에 관여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으며, 참된 회심도 기대하기 어렵다. 선교는 신념(교리)체계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의 방식으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신념체계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며 사람들과 식탁에서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만나고 음식을 나누고 삶에 관여하시었다. 초대교회는 늘 함께 식사하고 소유와 재산까지도 나누는 것이 선교적임을 보여주었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언택트가 크게 확산돼 가는 이때 초대교회의 ‘거룩한 입맞춤’은 언감생심이 되었다. 그러나 신앙은 추상화한 교리체계의 전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삶의 나눔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언택트 시대에도 서로 대면하여 만나는 것은 꼭 필요하며 그 만남의 질을 높이는 것만이 복음 증거의 올바른 방법이다. 근래에 미션 퍼스펙티브를 주관하는 미션 파트너스에 의하면 퍼스펙티브 과정을 비대면 강의로 진행하면서도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면, 그 만남을 통해 서로 간의 관계가 매우 돈독해지는 것을 경험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이렇게 언택트 접촉을 진지한 면대면 만남으로 보충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선교학에서 ‘선교적(missional)’과 ‘성육신적(incarnational)’은 동의어이다. 언택트와 탈육화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보다 철저히 육화된(embodied) 신앙을 갖도록 애써야 하며 예수님의 성육신하신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엄청난 도전에 직면해 있다.
COVID-19 상황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며 동시에 상호 연결되어 있는가를 절실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리 개인주의적 영성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일로 인해 국제관계에 있어 고립주의와 각자도생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참된 공동체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절박한 과제가 되었다. 모두가 서로 떨어져서 각 개인이 혼자서 일하고 생활하며 지내는 것이 더욱 조장되는 상황이어서 사람들의 영적, 정서적 피폐함이 더욱 확산되고 심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비롯되는 성경적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절박한 시대적 과제이다. 복음의 진보는 훌륭한 신자 개개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공동체로서의 증거(‘보라 저들이 서로를 어떻게 사랑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요즈음 많이 사용되는 컨택트(contact)와 언택트(untact)라는 말과 아울러 인택트(intact)라는 말이 있다. 인테그리티(integrity)라는 말도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로서 ‘인테그럴(integral: 필수 불가결한)’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인택트를 가지고 우리의 삶이 부서지는 것을 삶의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확실성(certainty)이 믿음의 적이라고 지적한 어느 영성 신학자의 말처럼 믿음은 이러한 혼란과 불안을 끌어안고 나아가는 것이다.
파커 팔머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모든 실수와 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은총, 용서, 가족과 친구에 대한 무조건인 사랑 그리고 대화를 나누며 우리 각자의 외로운 싸움에서 외로움을 덜어준 사람들의 개방성 때문이라고 밝혔다.
세상은 언제나 엉클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다시 짜 맞추는 일을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영적인 삶을 이 세상에서의 구질구질하고 구차스러운 현실 속으로 들어가 분투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넘어 비상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참된 영적인 삶은 오히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존재의 토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대로의 삶에 관여(engage, have a life)하는 끝없는 과정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본받는 삶이다.
사진 | 픽사베이 김동화 | GMF법인 전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