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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3  통권 221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2148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마지막까지 불태운 선교의 열정

마테오 리치의 마지막 소원
마테오 리치가 만년에 가진 마지막 소원은 자신의 죽음 이후 중국교회의 선교 성과가 더 크게 발전하였으면 하는 기대였다. 

마테오 리치는 만년에 사상적으로 삼중고(三重苦)에 시달렸다. (1) 마테오 리치는 중국선교를 위한 장기적 점진적 과업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본부와 상급자들은 빠른 성과를 요구하는 가운데 상당한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2) 마테오 리치는 중국의 현실을 고려하면 개별 선교와 학술서적 전파 방식으로 지식인과 사대부를 집중 교화하는 방식의 채택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롱고바르디, 판토하와 페레이라 신부 등 동료들이 자신의 조언을 수용하지 않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공개 선교활동에 열을 올림으로써 관아의 금령을 초래하는 상황조차 선교 성과로 상부에 보고해야 하는 고충을 감수해야 했다. (3) 비록 니콜라스, 롱고바르디 등이 성급하고 실정에 어두워 교회를 위험한 상태로 몰아넣었다 할지라도 마테오 리치는 자신이 나서서 중국에서의 선교가 중단될 수 있는 위기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그런 과정에서 그의 고충과 노력에 대해 본부에서는 제대로 된 이해나 존중이 없었다. 오히려 오해와 비난이 넘쳐났다. 겉모습은 온화하고 부드럽지만 속은 단호하고 강인했던 마테오 리치는 엄청난 상처의 아픔을 견디면서도 자신의 죽음과 은퇴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마테오 리치는 만년에 주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하나는 “저는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문지방 앞까지 당신들을 인도하였는데 이 문은 큰 상급을 받는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힘들고 좁은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였고, 또 하나는 “내가 힘써서 무엇을 해야만 중국교회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한 적이 있는데, 내가 얻은 결론은 교회 발전을 위한 가장 유익한 일은 죽음을 맞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1)라는 말이었다.

또 그는 1605년 5월 10일 매우 절친한 코스타(Costa, 高斯塔) 신부에게 쓴 서신에서도, “사랑하는 신부님! 저를 위해 많이 기도해 주세요. 하느님이 저에게 은총을 내려 주사 거룩한 죽음으로서 이 고난을 끝낼 수 있게 해 주시고, 우리가 세운 중국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못하게 되지 않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땀으로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선혈로 물을 주어 가꾼 것입니다”라고 했다.2) 


마테오 리치의 마지막 열정
순교를 결심한 마테오 리치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끊임없는 대인 교제, 서신에 대한 빠짐없는 답장 쓰기, 저술과 서적 간행, 신부들에 대한 교육 등의 과중한 업무 부담은 자신의 건강을 희생하는 대가를 치르게 했다.

만력 38년 윤3월(1610년 5월) 오랫동안 쌓인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마테오 리치는 병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이 해는 3년마다 치러지는 정기 과거시험이 있는 해여서 3∼4월부터 전국 각지로부터 북경으로 응시자들이 몰려들었고, 그들 중 ‘서학(西學)’에 관심을 가진 응시생들이 마테오 리치의 큰 명성을 듣고 그를 대면하고자 하는 요청이 쇄도했다. 마침 사순절(四旬節) 기간이어서 오찬을 금식하면서 수많은 방문객을 맞이하고, 예물을 보내오는 사람들에 대한 답례에 온 정열을 집중하였다.

5월 3일(양력, 음력 3월 11일),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 온 외지 손님들을 예방한 뒤 교회 거처로 돌아와서는 기진맥진하여 쓰러졌다. 의사를 불러 진료를 받았으나 별 차도가 없었고, 6일째 밤과 그 다음 날까지 줄곧 고열로 인해 의식이 혼미한 상태였다. 의식이 불분명한 가운데서도 그는 교우들, 교회 건립, 중국인들의 그리스도교 교화, 나아가 황제의 귀의를 말하기도 했다.

마테오 리치는 약한 소리로 마지막 소원을 말하고 판토하, 우르시스, 페레이라(Pereira, 費奇觀) 신부와 신자들에 둘러싸여 축복을 받으며 일생을 마감하였다. 때는 5월 11일(윤3월 19일) 황혼 노을이 질 무렵이었고, 향년 58세였다.


마테오 리치의 사후 영예
마테오 리치가 세상을 떠나자 교회 관례상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은 마카오신학원 내 묘지에 안장하도록 하는 규정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잇달아 조문에 나선 사대부들과 조정대신들, 교회 내 지식인들은 모두 마테오 리치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어서 그를 북경에 안장하기를 원했고, 결국 선교사들을 설득하여 북경에서 안장할 묘지를 하사해 주도록 만력 황제께 간청하기로 했다.

이지조(李之藻)가 상소문을 준비하여 올렸고, 마테오 리치에게 호감을 가졌던 만력 황제의 승인과 서학에 상당한 흥취를 가졌던 대학사(大學士) 엽향고(葉向高)의 중재를 거쳐 신청서는 곧 비답(批答)을 받았다. 

새로 하사받은 부동산의 영구 면세권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공문서만으로 뛰어난 인물에 대한 존경과 우의를 표현하기에 역부족했던지, 북경 소경조(大京兆) 황길사(黃吉士)는 “모의입언(慕義立言)”이라고 쓴 편액을 보내 마테오 리치의 묘지 위에 걸어두도록 했다. 

별장 귀속권 문제가 해결된 뒤, 판토하 등 북경 주재 신부들은 묘지 조성 공사에 분주하였고, 마테오 리치 후임 예수회 중국선교구 교구장 롱고바르디의 북경 부임을 기다리고 있었다. 묘지 조성 공사는 이듬해(만력 39년, 1611년) 여름에 끝났고, 롱고바르디도 만력 39년 5월 3일 북경에 도착했다. 같은 해 11월 1일, 제성절(諸聖節)을 맞아 롱고바르디 신부가 마테오 리치 안장예식을 주관했고, 황제도 관리를 파견하여 제를 올렸다. 서광계(徐光啓)가 북경 교우들을 데리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울타리로 두른 묘지 정문 위에는 ‘흠사(欽賜)’ 두 글자가 새겨져 있고, 묘원에는 《리마두묘지명(利瑪竇墓志銘)》이 세워졌다. 비석 좌측은 라틴어로, 우측은 중문으로 되어 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리(利) 선생의 이름은 마두(瑪竇)이고, 호는 서태(西泰)이며, 대서양(大西洋)의 이탈리아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수도회에 들어가 수련하고, 명 만력 임오년(壬午年) 바다로 처음으로 중화로 들어와 가르침을 전했다. 만력 경자년(庚子年)에 수도에 입성하여 만력 경술년(庚戌年)에 서거했다. 향년 58세이며, 수도회 경력은 42년이다.”3)

수년 후(1615년 3월 29일), 대경조(大京兆) 왕응린(王應麟, 玉沙, 그는 마테오 리치를 광동에서 이미 알고 지내던 관계였음)도 돌에 글을 새겨 〈흠칙대서양배신장지거사비기(钦勅大西洋陪臣葬地居舍碑记)〉 혹은 〈이자비기(利子碑记)〉를 세우고 그 뜻을 기렸다. 이 비문의 전반부는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건너온 뒤, 그의 경력과 조정·지방사대부와의 교제 현황 및 사후 묘지 하사 과정 등을 서술하였고, 비문의 후반부에서는 마테오 리치의 계승자와 그 교리와 서학을 찬양하고 그가 중화를 보좌하고 도운 것이 큰 유익이 있었음을 기록하였다. 

마테오 리치의 죽음이 갖는 의미, 특히 사후 영예가 갖는 상징적 실제적 의미는 특히 주목된다. 마테오 리치 사후에 하사받은 묘지는 중국에서 기독교가 합법적 지위를 쟁취했다는 하나의 상징이자 표시로 볼 수 있다. 마테오 리치의 역사적 의미는 적응성 선교 노선의 계승과 중서문화교류의 개척에 전례 없는 계기를 이루게 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미주           
1) 何高濟 等譯, 《利瑪竇中國札記》 下冊, pp. 613, 616.
2) 史若瑟(施省三), 〈利瑪竇中國札記1978年法文版序言〉 (《利瑪竇中國札記》 下冊), p.670. 
3) 引自羅光, 《利瑪竇傳》, pp. 231~232; 林金水, 《利瑪竇與中國》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1996),p. 144.







사진설명 | 마테오 리치 묘소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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