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차
서론
Ⅰ. 종교 문제 1. 종교에 대한 물음: 중국에 종교가 필요한가? 2. 기독교의 대안: 중국은 어떤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Ⅱ.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 1. 근대 기독교 복음 메시지에서의 변화 2. 그리스도 중심의 변증론(호교신학)의 등장 3. 신학적 평가
III. 기독교 신앙의 본색화 문제 1. 본색화를 위한 노력을 촉진했던 힘들 2. 오사운동 시기 지식인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태도들 3. 본색신학의 건설을 향해 4. 신학적인 공통 기반, 공통된 원칙
IV. 민족주의: 반(反)기독교 운동에 미친 영향 1. 반(反)기독교운동: 초기의 발전, 1922년과 1924년의 반기독교 활동들 2. 제국주의의 도구라는 공격 3. 오삼십참안(五卅慘案, 5월 30일 사건) 4. 기독교 교육 - 민족주의의 걸림돌인가? 5. 국민당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 아래의 기독교
V. 민족주의: 중국교회의 대응 1. 공산주의에 대한 대응 1) 자본주의에 대한 평가 2) 선교와 제국주의 3) 공존의 가능성 2. 민족주의에 대한 대응 1) 정치적인 참여 2) 정치에서의 도덕성 문제 3) 기독교 교육과 도덕적 덕성의 함양 4) 당(黨)과 기독교
3. 정교(政敎) 화해의 탐색
1920년대 중국의 민족주의운동은 ‘안으로는 국적(國賊)을 제거하고, 밖으로는 강권(强權)에 저항하라(內除國賊, 外抗强權)’는 구호로 대변된다. 오삼십참안(五卅慘案)과 다른 유사 사건들은 제국주의적 침탈에 대한 중국인들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었다. 비록 중국의 민족주의가 아직 제국주의적인 힘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발전의 범위와 강도는 제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거대한 민족적 에너지의 분출을 역사적 맥락에서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모든 면에서 중화민국의 역사는 당시 아직 실제로 시작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중국 내에서 자행된 외국인들의 침탈행위는 중국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국가가 반(半)식민지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음을 각성하게 하였다. 군벌의 할거(割據)는 사분오열의 국면을 조성하고 있었으며, 중국이 통합된 국가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불평등하고 부당한) 조약 체제의 존재는 인민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각처에서 발생한 애국배양(愛國排洋)운동은 국민의 정치의식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그들은 중국이 아직 민족 역사의 주체로서 서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국은 아직 근대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 권리를 가지고 국제관계에서 동등한 독립과 자유의 권리를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인들은 수십 세기 동안 그들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하여 왔지만 당면한 상황은 그와 정반대의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민족(국가)의 존망을 위해 투쟁에 나서야 하는 것이 뼈아픈 현실인 동시에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자신들의 국가를 위해 역사의 한 장을 열고자 하였던 중국 민중들의 그러한 내면의 열망을 이해할 수 있다면, 1920년대 중국에서 격하게 요동쳤던 민족주의운동의 열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기독교와 민족주의 사이의 대결은 각 진영이 상대방을 종교적인 경쟁자로 여기는 ‘종교적’ 충돌이었다. 유정방(劉廷芳)은 적절하게 “민족주의는 이미 하나의 거대한 열망이며 거의 종교가 되었다. 그것은 유구한 윤리 제도와 종교적 신앙을 대체하였다. 그것은 모든 행동을 지배했으며, 아울러 젊은 세대의 모든 관심과 의욕을 빨아들이는 중심이 되었다.”1)라고 하였다. 민족주의는 의심의 여지없이 자체 내에 종교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만약 종교가 양계초(梁啓超)가 그렇게 생각한 것처럼 풍부한 정서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민족주의는 확실히 정서적 요구의 충족을 위한 기회들을 제공하며, 만약 종교가 양수명(梁漱溟)의 정의처럼 현재의 상황을 초월함으로써 안락과 격려를 구하는 일종의 내재적 경향이라고 한다면 민족주의는 유사한 방식으로 민족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공하여 주는 것이다.2)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중국 지식인들에게는 일종의 종교적 소명이었다. 중국 민족주의의 종교의식(意識)은 자신의 교리(敎理)와 의식(儀式)과 책무(責務)를 가지고 있었다. 국민당의 정치제도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구국(救國)의 열심은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마치 중국인의 성경(聖經)과 같이 만들었으며, 또한 손중산(孫中山)을 지고의 권위로 받들게 했다. 그러한 정치적 종교의 등장은 오사(五四)신문화운동 이후의 상황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당시 중국 지식인들은 중국 전통이 쇠락함에 따라 마침 민족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종의 새로운 신앙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초기 민족주의는 공산주의보다 더 인기가 있었으며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마르크스 공산주의와 비교했을 때 민족주의는 더 개인적이었으며, “공산주의에 결여된 따뜻함과 경건한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3) 공산주의가 자유를 약속할 때 민족주의는 그와 함께 개인의식을 또한 들여왔으며, 공산주의가 수입된 이데올로기였다고 한다면 민족주의는 비록 서구에 기원을 두기는 했지만 좀 더 쉽게 토착적인 색채를 더하였다. 민족주의의 흡인력은 사회의 일부 계층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나라 전역에서 전 계층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일종의 ‘근대의 세속화한 종교’4)로서의 민족주의는 그리 어렵지 않게 민중들의 아낌없는 헌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당시 민족에 대해 각성하기 시작하던 젊은이들은 조국을 위해 전적인 헌신을 하고자 하였다. ‘옳든 그르든 그 모든 것이 공히 국가의 이익을 전제로 삼는다.’라고 하는 이러한 종류의 신념은 다른 신앙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헌신도 허용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었다.
중국 민족주의자들에게 기독교는 민족의 성전(聖殿)을 더럽히는 정치적 우상숭배로서 반드시 즉각 척결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제창한 국제주의는 민족주의를 포용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지나치게 발전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그러한 제안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일부 중국 기독교인들에게 민족주의는 만약 그것이 기독교의 도덕 원칙을 위배한다면 종교적 우상숭배가 되고 마는 것으로 여겨졌다. 기독교인은 마땅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인간에게 복종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또 다른 기독교인들은 마음속으로 정부와 합작할 수 있는 기회를 찾기를 원했으며, 그를 통해 기독교가 정치적 압력 아래에서 계속 발전하여 가기를 원했다. 그들에게는 당연히 신앙적인 타협 혹은 신학적 재고(再考) 등이 있을 수 있었다.
반(反)기독교 인사들이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의 입장으로부터 가한 공격에 대응하여,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그것들과의) 합작가능성을 강조하는 호교(護敎) 이론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물론 사적유물론(私的唯物論), 경제결정론, 계급투쟁 등의 관념이 모두 기독교 이론의 범위 밖에 있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날로 확장되어 가고 있었던 공산당 세력의 울타리 안에서 강경한 반공(反共)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위험하고 또한 어리석은 것이었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같이 공존할 수 있기를 희망했으며, 기독교가 공산주의운동에 협조하면서 그것을 변형하여 개선하고 보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기독교 자체는 결코 어떤 특정한 정치 구조가 유일하게 자신의 신앙에 부합하는 신성불가침의 것이라고 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특정한 교리와 의식(儀式), 공동체 활동을 가진 종교인 것이다. 하나의 보편적 종교로서 기독교는 어떤 사회·정치적 체제 속에서도 존재할 수 있으며, 어떤 체제와도 완전히 일치하거나 또는 완전히 모순되지 않는다. 이것은 당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공산주의운동에 대응하고자 하였던 많은 중국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공통의 신학적 신념이었다. 그들은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최종적으로 달성하고자 하였던 궁극적인 목적을 포용할 수 있으며, 더욱이 공산주의로 하여금 현대 세계에서 건설적인 힘이 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20년대의 공산주의운동을 그 후 중국에서 발전하였던 그것과 동일시해서 논할 수 없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1920년대 중국교회 지도자들은 모두 기독교가 당시의 정치·사회적인 제도 속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곧 일련의 도덕적이고 영적(정신적)인 원리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의(正義, [公平]), 봉사 그리고 희생(헌신) 등은 고유한 내재적 가치를 지닌 미덕으로서 어떠한 시간적이고 지역적인 정치제도(체제)의 제한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들은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 속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가장 완전한 반(反)제국주의자로서 실로 중국인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인격 논증(personality argument) -즉, 역사적 예수의 인격을 바탕으로 하는 호교신학-은 1920년대 반(反)기독교운동의 격랑 속에서 기독교 변증(혹은 본색신학)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기독교회가 민족주의의 도전을 맞이해서 응전한 태도는 적극적이고 또한 낙관적이었다.
결론 1920년에 중국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는 것, 곧 호교하고 전교[傳道]한다는 것은 아직 유년 단계에 있었던 중국교회로서는 매우 감당하기 어려운 신학적 과업이었다. 복잡하고 다양하게 변화하는 정치·사회적 상황 속에서 중국 기독교인들이 직면한 도전은 매우 번다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적절하고 정확하게 복음 메시지를 건립하여 당대 사람들에게 선포할 수 있을까? 이것이 1920년대 본색신학(本色神學)의 문제였다.
서구의 선교사들도 중국교회가 그러한 다원적인 문제에 대응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 중에는 신학적으로 보수파도 있었고 자유파도 있었으나, 서구의 전통을 통째로 동방에 도입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였다. 그들에게는 넘쳐나는 열정이 있었지만 정보는 부족하였다. 그들이 전파한 선교 메시지는 대체로 서구사상의 형식과 문화적 배경을 벗어버리지 못한 것이었고, 그것은 중국 신도들로서는 대체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중국 기독교인들 중 비교적 계몽된 일부 사람들은 본색신학을 건립하는 것이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당면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다시 검토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운용하여 교회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였다. 시국은 그들이 잠시라도 지체할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의 존망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성공적이었든 아니었든, 그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1920년대 반기독교운동 시기 동안의 기독교 호교사상의 일부 면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초대교회의 신학사상이 형성되던 때 그러했던 것처럼 이 시기의 중국 신학의 건설에서 하나의 기본적 요소는 곧 당일의 시국과 교회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해 대응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덧붙여 수년간 지속되었던 기독교에 대한 중국인들의 적대감이 또한 이 외래종교에 대해 적지 않은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20년대 초반에 있었던 종교에 관한 토론에서 종교의 무용성이 선언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중국 기독교인들은 자신 앞에 놓여 있는 길이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과학과 민주로 특징지어지는 신문화운동의 영향은 그들로 하여금 종교 자체의 본성에 대해 적극 반성하게 하였다. 과학과 민주의 감시 아래에서 종교는 스스로 자신의 설(說)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을 것인가? 교회 지도자들은 소년(少年) 중국은 종교를 배제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국가를 중건하는 과업을 도울 수 있는 일종의 새로운 시대 종교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젊은 중국에 필요한 새로운 시대 종교는 반드시 사회와 개인의 정황, 현재와 미래의 관계, 육체와 정신의 수요 등에 대해 세심하게 배려하고 대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당면한 중국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유효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일체의 서구 전통의 교조주의(敎條主義), 성례주의(聖禮主義)와 종파주의(宗派主義) 등등은 모두 중국교회에 적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교 사업을 방해한다. 새로운 시대 종교는 인간의 삶을 그 실존의 복합성 속에서 다루어야 한다. 자신의 교의와 의식(儀式)과 종파의식을 벗어버린 근대적 형태의 기독교야말로 중국에 적합한 종교이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 종교에 대한 열정과 확신에 가득차서 본색교회운동과 조화될 수 있으며 동시에 또한 신문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지식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러한 복음 메시지를 적극 찾아 나섰다. 우리는 확실하고도 자세하게 분석한 뒤에 당일의 신학 토론 중에서 서구의 기독교사상에서 매우 친숙한 주제들이 토론되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중에는 적지 않은 본색화사상이 있었으며, 이것이 새롭고 지역적인 의미를 부여하였음을 발견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는 20년대의 종교운동에 대해 다양하고 다채로운 서술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의 메시지는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하되 그의 영원하고 초월적인 ‘신성(神性, 신적인 본질)’보다는 사회와 역사상에서의 그의 ‘인성(人性, 인간적 표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회의 수요에 적응하기를 모색하고 있었던 당시 중국 신학의 노선과 일치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우주적 질서 속에서 인륜 관계를 중시하였던 유가(儒家)의 전통적 인생관에도 접근하는 것이었다.
일부 급진적인 교회지도자들, 예를 들어 오뢰천(吳雷川)과 같은 이는 역사적 예수를 강조하였다. 그는 예수의 혁명 생애를 표준으로 삼아 중국 기독교인들이 그를 그들 자신의 투쟁에서 모범으로 삼도록 고무하였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조자신(趙紫宸)과 유사한 관점을 취하여 비록 자신들이 신앙하는 그리스도에게 인생을 변혁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지만, 역사상의 예수는 다만 인간이며 결코 신이 아니라고 보았다. 반면에 보수적인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던 대표적 인물들 중에서 장역경(張亦鏡)과 양균묵(梁均黙)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인 동시에 또한 완전한 신(神)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인간적 그리스도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의 모델을 제시하여 주며, 신적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생명력을 공급해 주신다. 앞에서 서술한 교회 내의 호교 이론가들은 다양한 신학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그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한 해석에서도 각각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용(功用, 기능)에 대한 해석에서는 서로 일치하는 점이 매우 많았다. 그리스도 중심의 호교신학(변증론)을 건설함에 있어 이들 공통점들은 피차간에 적지 않은 대화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서구교회로부터 수입된 근본주의[基要派]와 자유주의[自由派] 사이의 논쟁(대립)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찾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복음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결합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삶 속에 체현된 정의(공평), 박애, 봉사의 정신은 이제 바로 중국 사회에 적용하여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통 신학의 서구적 체질은 깨끗이 제거될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기독교 신앙을 당대의 중국인의 경험과 연결하기 위한 교량(해석학적 원리)이 되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이렇게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간다고 하는 신학적 방법은 간단하고 직접적으로 기독교의 주요 신앙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종교를 삶의 도정으로서 긍정하고 또한 그리스도를 기독교의 핵심으로 제시할 때 그들의 그리스도론은 실로 포괄하는 범위가 광대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지는 못하였다. 그러한 중국적 그리스도론은 중국의 문화적 유산(전통)과 민족주의의 문제를 다루어야만 했다. 당시의 반기독교운동은 두 방면의 문제에 더욱 초점을 맞추게 하였으며, 중국교회에 강력한 지적 도전을 가하였다. 중국교회는 사상에서든 행동에서든 이런 문제들에 대해 다시는 피동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뒤로 물러나 도망갈 수 없게 되었다.
1920년대 중국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거대한 문화적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고전 중국은 점점 과거가 되어 갔으나 아직 새로운 중국은 탄생하지 않았다.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의 전환 국면에서 어떤 문화적인 간격(틈)이 중국 지식인들의 사상 속에서 겉으로 드러났다. 중국 문화의 위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중국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이러한 질문이 기독교인들의 뇌리 속에서도 항상 맴돌고 있었다. 특별히 본색신학을 적극 연구하였던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나타냈다. 다른 근대 중국의 사상가들처럼 그들은 결심을 하기 위해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중국 고유 전통의 상실을 두려워하였기에 결코 ‘전반서화(全盤西化)’의 노선을 취하지 않았다. 더욱이 민족주의가 소리를 높이고 있던 때에 이런 노선을 취하는 것은 기독교가 서구의 침략 국가와 완전히 동일한 진영에 속한다는 그릇된 인상을 다시 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또한 중국의 유구한 유가 전통 속에서 문화적인 안정감을 찾을 수도 없었다. 당시의 반(反)유교의 분위기 속에서 전통 문화 일체가 스스로를 보존하기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은 양계초, 채원배(蔡元培)와 동일한 문화 노선을 채택하여 중서합벽(中西合璧, 중국과 서구의 반쪽 옥을 합쳐 온전한 하나의 옥을 이룸)과 사단취장(捨短取長, 서로의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함)의 조화 절충의 방법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한편으로는 중화 민족의 특징을 보전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문화의 우수한 점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모순에 대해서는 깊이 감지하지 못하였다.
기독교 복음(신앙)을 본색화하고자 연구하는 과정 중에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을 시도하였다. 중국 고전 문학 속에서 기독교 신앙적 요소를 찾기도 하고, 기독교와 중국 문화의 융화를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기독교로 전통 문화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도 하였고, 기독교와 문화 사이의 대립적인 면을 지적하기도 하였고, 혹은 기독교가 중국 문화를 비판하는 표준이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하였다.5) 그러한 여러 시도들의 배경에 있는 문화 관념과 신학 방법은 서로 유사한 점이 많았으나 차이가 나는 부분도 또한 적지 않았다. 그들이 종교와 문화 사이의 관계를 처리한 방식은 곧 그들의 호교신학의 효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신중하고 비판적이었지만 전통에 대한 그들의 경도(傾倒)는 당시 일반적인 지식인들이 근대화와 신중국의 건설을 중시하였던 사상 경향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일반 지식인들은 과거 낙후한 중국을 완전히 뇌리에서 지우고자 하였으며 다시 거론하지도 다시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기독교와 유교사상의 관계(대화)를 건립하려고 노력하였을 때, 그들은 모두 전통의 사상 형식과 내용이 아직 여전히 신문화운동의 분위기에 적합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인사들의 비평 중 사용한 많은 말들, 예를 들어 ‘시대착오적’이라거나 ‘비과학적’이라거나 ‘미신’이라고 하는 것들이 일찍이 이미 공학(孔學, 유교)을 반대하는 풍조 속에서 출현하였다는 사실은 괴이할 것이 없었다. 당시 교회 대변인들은 자신의 힘을 다하여 매우 세심하고 신중하게 신학적 입장으로부터 중국 문화의 문제를 정시(正視)하였다. 다만 당시의 문화적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좀 더 유효한 방법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비효율적인 접근을 했다고 전적으로 비난할 수만도 없다. 왜냐하면 좀 더 생명력 있는 문화신학으로 이끌어 줄 더 나은 길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1920년대에 또 하나의 매우 시급하였던 신학적 문제는 어떻게 기독교 메시지를 운용하여 국가 중건(重建)의 사명을 촉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민족주의운동의 세력은 매우 강대한 것이어서 민족을 위해 새로운 정치 체제를 창출하여 국제관계에서 중국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민중의 열망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군벌주의의 이중의 압박 때문에 민족의 미래는 불투명한 상태에 있었으며, 민중들의 이러한 열망은 실현하기 어려울 것 같은 형세였다. 민족주의의 발흥은 주로 다른 민족에 종속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정치적 운명의 주체가 되고자 했던 인민들의 결단으로부터 파생된 것이었다. 이러한 민의(民意)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종류의 행동들은 교회 신도들로부터 동정과 찬조를 얻었다. 예를 들어 ‘오삼십참안’이 발생했을 때 그들이 자발적으로 외국에 대해 공격하고 후원을 진행하였던 일은 가장 좋은 사례이다. 자신들의 포용적 그리스도론 중에서 이들은 복음의 의미를 확장하여 정치적인 참여활동을 포함시켰다. 예수 그리스도의 혁명성이 풍부한 인생은 그러한 정치의식을 지지하는 근거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정치와 종교는 충돌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도인 공산주의자 혹은 기독교도인 국민당 당원은 모두 나름의 신학적 이유를 가진다. 당시의 종교적 경험에서 그러한 정치활동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신(神)은 중국을 향한 자신의 뜻을 정치 투쟁의 과정 속에서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이들은 정치 비평가를 자임하면서 마땅히 종교적인 도덕 표준을 정치활동에 대해 적용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국민당에 대한 충성과 기독교에 대한 복종은 당교(黨敎, 국민당과 기독교) 합작에 의지하여 상호 조화될 수 있으며, 손중산과 장개석(蔣介石) 두 사람의 예는 곧 이러한 합작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좋은 실증이라고 생각하였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에 관해 평론할 때, 일반 교회의 호교가(護敎家)들은 모두 그리스도 중심의 원칙을 채택하였다. 공산당원과 대화할 때 그들은 예수가 역사상 첫 번째 프롤레타리아(無産階級人)로서 부자와 권력자를 비판하고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켜 주는 복음 메시지를 전파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국민당 당원과 대화할 때에 그들은 예수는 한 사람의 애국주의자로서 일찍이 예루살렘을 위해 울었으며, 또한 선교 순서에서는 먼저 유대인들이 구원의 복음을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예수가 민족을 중시하였다는 것을 실증한다는 것이다. 중국 신도들이 건립한 본색화 호교신학은 상당한 정치적 유연성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어서 당시의 불안정한 정국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즉, 정국의 발전이 어떠하든지 간에 교회는 다양한 정치 체제 속에서 계속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중국교회가 민족주의의 도전에 대해 취한 대응은 일종의 생존을 위한 신학적인 전략에 지배받는 것이었다. 즉, 반기독교운동이 민족주의라고 하는 정치적 종교로서 기독교를 대체하려고 시도하자,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그들 사이에 어떠한 적대관계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썼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치적인 방편으로 당교의 협력관계에 매진하면서 적지 않은 중국 기독교인들이 선교 사명에서의 또 하나의 중요한 측면, 곧 (정치 문화에 대한) 복음의 심판적(審判的, 개혁적) 의의를 무시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 선교사역의 역할을 위험에 빠뜨리고 마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치적인 풍향이 어떠하든지 간에 상관하지 않고 교회의 본색화 호교신학의 입장을 지지할 수 있는 그래서 때에 따라 변화하고 상황에 따라 적응하는 그러한 종교적 인물로 변모시켰던 것이다.
이 시기의 호교사상은 또한 농후한 말세(末世)신학의 의미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었다. 적지 않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민족(국가)의 중건 사업에 모셔 오면서, 동시에 천국(天國, 하나님 나라)의 이상이 금일의 신중국(新中國)에서 곧 실현되려고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소망은 일종의 낙관적인 태도를 형성하여 본색화교회운동으로 하여금 적지 않은 격려를 받게 하였으며, 지극히 가시가 가득한 험난한 노정에도 불구하고 앞을 향해 굳건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 예수를 본받는다고 하는 것은 ‘인격을 통한 민족의 구원(人格救國)’운동에 열심히 참여하는 신도들의 기본 원칙이 되어, 예수의 인격과 정신이 국민의 생명을 관철하여 중국 민족을 개선하는 데 힘썼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육가들은 모두 이러한 논점을 견지하여 중국 기독교 교육 사업의 기능은 말살시킬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이 국가의 미래에 기여하는 공헌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게다가 ‘하나님은 아버지[天父]이시며, 세상 사람들은 형제이다’라고 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협애한 민족주의가 야기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또한 이 신학사상을 근거로 한 국제주의는 더욱 신중국이 국제관계에서 평등한 지위를 찾고 제국의 침략주의가 조성한 재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러한 고상한 종교 이상은 비록 중국 내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국제관계의 분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지시해 주었으며, 정계 인사들로 하여금 평화적 공존이야말로 진정으로 국제 정치의 최종적인 목표라는 것을 깨우치게 하였다.
1920년대 중국교회의 본색화신학은 한편으로는 서구 전통 중 보수적 풍격을 적지 않게 보유하고 있었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를 위해 사상(思想)의 출로(出路)를 찾고자 시도하였던 자유주의신학의 훈도를 받은 일군의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결코 서구신학을 그대로 답습하고자 하지 않았으며, 토착적이고 독립적인 신학을 건립하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은 중국 기독교인들 중 지식 계층에 속하는 이들의 토착적 사유의 다양성과 활력을 반영하였다. 그들은 종교를 삶(인생)의 운동(과정)으로 생각하고,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의 신학사상은 단순한 이론적 관심들을 넘어서서 실천적 유용성으로 나아갔다. 그의 신학 입장이 보수적이든 혹은 개방적이든 상관없이 교회 지도자들은 모두 중국 신학은 시대(의 맥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오늘의 신학이지 내일의 신학은 결코 아니라는 데 동의하였다. 이러한 ‘상황적 신학(contextual theology)’은 당시의 개별적인 사건들과 특정한 문제들로부터 시작하였다. 거기에는 어떠한 체계적인 신학 혹은 형이상학적 틀도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 사회의 상황은 혼란스럽고 복잡하였으며, 시대의 문제들이 이미 충분하게 그들의 관심을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시기 본색신학은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인민들의 일반적인 심리 상태를 표출하고 있었다. 곧 두려움과 소망, 좌절과 기쁨의 감정들이 뒤섞여 분분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시대적인 요구와 신앙적인 사명이 그들이 본색신학을 건설하는 데 있어 동력(動力)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1920년대 중국교회의 본색화 호교(변증)신학의 성패와 효과는 실로 측량하기 어렵다. 당시 반기독교운동은 결코 그러한 교회의 대응으로 말미암아 감소되거나 약화되지 않았으며, 그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 중에 태도를 바꾸거나 기독교로 전향한 인물들 또한 많지 않았다. 이론상에서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미 자신들의 역량을 다하여 신앙적 입장으로부터 당면한 국가(민족)적 문제(위기)에 대해 발언하였으며, 그들이 실행 가능하다고 생각한 방법(해결책)을 제출함으로써 문화적으로 충격을 받은 상태에 있었고, 또한 정치적으로 혼돈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던 동포들을 돕고자 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중국의 전통적인 반(反)외세적 심리와 불가지론에 기초한 반(反)종교적 정신은 근대의 민주와 과학을 숭상하는 태도와 결합하면서 지식인들로 하여금 어떤 종교적 해결책(답안)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였다. 기독교도가 아닌 이들에게 기독교의 ‘십자가의 복음 메시지(scandal of the Cross)’는 어리석은(불쾌한) 것이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었으며, 역사적 인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간다는 것은 낙후한 것이요 현실 적합성이 없는 인생관으로 여겨졌다. 1920년대의 반기독교운동은 신도(信徒)와 비신도(非信徒) 사이의 대결과 대화의 시간이었으며, 결국 최종적인 문제는 지적(知的)이고 도덕적인 선택의 문제였다. 즉, ‘중국인의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본색화 호교신학의 사명은 곧 중국 동포들이 그에 대해 자신의 선택을 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미주 1) Timothy Tingfang Lew, "Some of the Factors, Dangers and Problems in the Christian Missionary Enterprise in China Today through Chinese Eyes", Addresses on China at the Thirty-fourth Annual Session, Foreign Missions Conference of North America, Atlantic City, N. J., January 11-14, 1927 (New York: Foreign Missions Conference, 1927), p.13. 2) 앞의 제1장에서의 종교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참조. 3) Carlton J. H. Hayes, Nationalism: A Religion, p.15. 4) Ibid., p.176. 5) 제3장, pp.57-81.의 논의를 참조.
【부록 1】
중화기독교교육계선언(中華基督敎敎育界宣言), 1925년 4월 2일
근래 사회 일부 인사들이 기독교 교육의 종지에 대해 상당한 오해를 하고 있으며, 기독교 신도들 중에서도 기독교 교육의 기능과 국가 교육 사이의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소수 있다. 본회(本會)에서는 이에 중서(中西) 교육가들을 한 자리에 모시고 여러 차례의 토론을 거쳐, 기독교 교육의 근본 원칙 아홉 개 조항[九條]을 작성하였으며, 그것으로 전국 인사들의 양해를 구하고 아울러 금후 기독교의 각급(各級) 학교들이 이 원칙을 기본으로 하여 우리 소년(少年) 중국을 위해 계속해서 복무할 것을 원하는 바이다.
이 선언은 중문(中文)과 영문(英文)으로 되어 있으며, 검토를 거쳐 중화기독교교육회(中華基督敎敎育會) 판공처(辦公處)와 교섭할 것을 청한다.
또한 이 선언은 교사 회의와 교육 회의, 기타 기독교교육 관련 토론회에서 토론할 근거로 제공될 수 있다. 교사 혹은 학생들 중에서 중국 교육 체제에서의 기독교 학교의 지위에 대해 회의하는 자들도 참고할 수 있다. 이것 외에 본회에서 출판한 교육총간(敎育叢刊) 제5종 《국가교육계통 중 사립학교의 지위(國家敎育系統中之私立學校的地位)》와 중국기독교교육고찰단(中國基督敎敎育考察團)이 편집하고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출판한 《중국기독교교육사업(中國基督敎敎育事業)》 등의 책자들이 참고할 만하다.
1. 기독교 학교의 특수 기능 기독교 학교들의 특수한 기능 그리고 중국의 공립학교를 보완하는 것으로서 그것들이 유지되어야 할 정당성은 기독교 공동체의 성원들의 자녀들과 그러한 유형의 사립학교들을 이용하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독교적 교육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2. 민주주의 국가의 사립학교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공교육 체계에 덧붙여 원하는 개인들과 사회적 그룹들에게 사적인 교육 기구들을 설립하고 유지할 수 있는 허가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신 및 모든 근대 세계의 민주주의 국가들에서의 관례와 일치한다. 이러한 권리는 사립학교들이 국가가 공립이든 사립이든 관계없이 모든 학교들에게 합법적으로 부과한 최소한의 기준들을 준수하는 한에서 그리고 국가와 사회 전체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는 한에서 부여된다.
3. 사립학교와 교육의 진보 교육에서의 진보는 다양한 유형의 학교들의 존재와 변화를 위한 최대한의 가능한 자유에 의존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동의되는 사실이다. 변화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 모든 학교들이 동일한 획일적 과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가의 교육적 이익들과 배치될 것이다. 사립학교들이 모든 학교들에 요구되는 핵심적인 요구사항들을 충족한다면, 변화의 자유를 더 크게 허용하는 만큼 교육을 위해서 그리고 국가를 위해서 유익함이 더 커질 것이다.
4. 사립학교와 신교(信敎) 자유 교육 과정 속에 종교를 필수적인 구성 부분으로 가지고 있는 사립학교들을 유지하는 것은 중화민국의 헌법에 허용된 종교적 자유의 원칙과 일치하며, 또한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의 관례와 일치한다. 종교적 자유는 개인적인 종교적 믿음과 관련하여 자신의 양심을 따를 수 있는 개인의 권리뿐 아니라 자신의 자녀들에게 종교적인 훈련을 제공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를 포함한다. 이러한 원칙은 그가 신봉하는 종교적 신앙이 무엇인지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
5. 기독교 학교와 국가 교육 체제 중국에서 사립학교들이 공적인 교육 당국의 감독을 받으면서 국가적 교육 계획의 한 부분을 형성하게 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러한 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립학교들이 마땅히 관청에 등록하여야 하며 규정된 학교 법령을 준수하여야 하고 인정된 유효성의 기준을 달성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들의 유지를 보증하기 위한 관청의 감찰을 받아야 한다. 이 외에는 사립학교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교육을 담당하는 이들은 공적인 교육 당국과의 그러한 관계를 매우 환영한다. 기독교 학교들이 설립한 연구와 건의 기관의 성격을 지닌 교육회(敎育會)는 그 목적이 내부의 단결에 있고 효율성을 증진하기 위한 보조 기관일 뿐 결코 주관 기관이 아니며 더욱 공적 교육 당국의 일반적인 감독활동을 대행하는 기관이 아니다.
6. 기독교 학교와 종교 교육 교육의 형식은 다양할 수 있지만 교육의 기본 목적은 건전한 인격과 도덕적 품행을 양성하는 데 있다. 기독교인들은 국가의 미래에 대한 자신들의 특수한 공헌이 곧 바로 이 점에 있다고 믿는다. 교육 행정 관청이 기독교 학교의 등록과 관련하여 종교 교육을 제한하고 기독교적 학교생활을 금지하는 것을 등록 조건으로 하는 것은 교수(敎授) 자유와 신앙자유의 원칙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기독교 학교의 설립 취지와도 충돌한다. 이는 이들 학교들이 중국 교육의 특수한 수요에 공헌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7. 기독교 학교와 애국주의 기독교의 정신은 실로 계몽된 애국활동으로 표현될 것이며 따라서 애국주의와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 기독교 학교들은 본래 학생들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만약 이렇게 하기를 실패하면 그것은 자신들의 목적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 된다. ‘학생들의 민족성을 말살한다’거나 혹은 ‘기독교 학교를 이용하여 외국의 제국주의를 선전하는 기관으로 삼는다’라고 운운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잘못된 말일뿐 아니라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동기(動機)는 또한 기독교 교육계의 중서(中西) 인사들도 모두 깊이 미워하는 것이다.
8. 기독교 교육은 마땅히 중국적이어야 한다 비록 중국의 기독교 학교들은 원래 외국선교사들과 서구에 있는 그들의 후원자들에 의해 설립되었고 또한 현재에도 대체로 그들이 운영하고 있지만 그 목적은 중국 인민들의 최대 이익에 봉사하는 데 있다. 기독교 교육이 정신에서, 내용에서, 유지와 관리에 있어서 모두, 마땅히 중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본래 중국 기독교 교육가들이 항상 표명해온 소원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기독교 학교를 후원하여 온 선교단체와 교회들, 후원과 통제를 받아들였던 중국 기독교 공동체들도 모두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러한 이상(理想)은 이미 점차 현실이 되어 본국(本國, 중국)의 신도들이 점차로 그것들을 취하여 유지, 관리하고 있다.
9. 기독교 교육의 영구적 기초 기독교 교육의 영속적 유지는 기독교 공동체의 열렬한 지원과 계몽된 일반 중국 대중들의 여론에 달려 있으며, 중국과 외국 간에 체결된 조약(條約)상의 특별 권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위의 내용은 《宗敎思潮》 pp.365-370.으로부터 재인용한 것이다.)
【부록 2】
새로운 교육 규정1) 새로운 교육 규정에 대한 비공식적 번역이 중화기독교교육회(中華基督敎敎育會)에 의해 다음과 같이 만들어졌다.
1. 외국인에 의해 기부된 기금에 의해 설립된 각급의 기구는 무엇이든지 만약 그것이 교육부(敎育部)에 의해 공표된 각급 기구들에 대한 관리 규정들에 따라 운영된다면, 모든 교육 기구 분야의 인가와 관련해 교육부에 의해 공표된 규정에 따라, 정부의 해당 교육 당국의 담당 부서에서 인가를 위한 지원을 할 수 있게 허용될 것이다. 2. 그러한 기구는 그 공식 명칭 앞에 ‘私立(사적으로 설립된)’이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 3. 그러한 기구의 총장 혹은 교장은 중국인이어야 한다. 만약 총장 혹은 교장이 지금까지 외국인이었다면, 인가를 신청할 때는 그 기구를 대표할 수 있는 중국인 부총장이 있어야 한다. 4. 만약 그 기구가 이사진을 가지고 있다면, 이사진의 반수 이상은 중국인이어야 한다. 5. 그 기구는 종교의 선전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6. 그러한 기구의 교육 과정은 교육부에 의해 설치된 기준에 맞아야 한다. 필수 과목들 속에 종교적인 과정들을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
(China Christian Year Book 1926, pp.227-228.에서 가져 옴.)
미주 1) (역주) 이것은 이 책의 중국어본에는 실려 있지 않다.
문석윤 |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
[편집자 주] 문석윤 교수님께서 ‘중국 신학의 건설-1920년대 반(反)기독교운동에 대한 중국교회의 대응-’ 관련 글을 ‘오늘의 중국교회’ 코너를 통해 연재를 시작한 지가 1년 6개월입니다. 1920년대 중국 반기독교운동 시기 동안의 기독교 호교사상의 면모를 볼 수 있게 도움을 주신 문석윤 교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마치 초대교회의 신학사상이 형성되던 때 그러했던 것처럼 이 시기의 중국 신학의 건설에서 하나의 기본적 요소는 곧 당일의 시국과 교회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해 대응해야 한다는 것과 그에 덧붙여 수년간 지속되었던 기독교에 대한 중국인들의 적대감이 또한 이 외래종교에 대해 적지 않은 압박을 가하고 있는” 일은 지금도 여전한데, 그러기에 더욱더 역사를 알고 역사에서 중국선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가르침을 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본웹진의 필진으로 모시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관심을 갖고 읽어주신 독자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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