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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4  통권 218호  필자 : 주안  |  조회 : 6258   프린트   이메일 
[기획]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선교적이었다” – 산둥(山東)성 선교사 3인의 이야기
【편집자 주】 필자는 ‘들어가는 글’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 치러진 비대면 총회라고 하지만 지난 1년을 점검하고 새로운 회기에 대한 의제 설정과 계획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서둘러 마무리한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 총회 성적표였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 어디에서도 이 땅과 열방, 시대를 향한 기독인들의 선교적, 전도적 열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선교하지 않으면 진정한 장로교회가 아니며 모든 장로교회는 선교회이고 장로교인들은 선교회의 평생선교회원’이라는 과거 선배들의 고백이 무색했다.”라고 밝힌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선교적이었다'–산둥(山東)성 선교사 3인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한국교회와 세 분의 산둥성 선교사들이 품었던 선교적 열정과 선교적 교회로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다음 호에 걸쳐 연재를 하려고 한다. 독자들에게도 유의미한 일깨움을 주기를 기대한다. 


들어가는 글
“교계, 쫓기듯 반나절 온라인 총회… ‘전광훈 이단’ 논의 못해” “화상회의 통한 분산 개최… 안건 많은데 시간 태부족” “진행 미숙에 ‘진땀’도… 명성교회 부자세습 철회 헌의안도 건너뛰어” 지난 9월 21∼22일 연합뉴스 등이 대한예수교장로회 105회 총회와 관련해 타전한 주요 헤드라인의 일부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 치러진 비대면 총회라고 하지만 지난 1년을 점검하고 새로운 회기에 대한 의제 설정과 계획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서둘러 마무리한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 총회 성적표였다. 비대면이기에 대면에 따른 불필요한 현장의 기 싸움은 하지 않고 좀 더 깊이 있는 논의를 이어갈 수 있다는 역발상이 가능하건만 ‘창의력 제로의 올드’한 총대들의 모습만 보여주었다. 그 어디에서도 이 땅과 열방, 시대를 향한 기독인들의 선교적·전도적 열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선교하지 않으면 진정한 장로교회가 아니며 모든 장로교회는 선교회이고 장로교인들은 선교회의 평생선교회원”이라는 과거 선배들의 고백이 무색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길선주 등 장로교 최초의 목사 7명을 안수하고 그중 이기풍 목사를 탐라(제주도)로 타문화권 선교사로 파송한 1907년의 독노회, 중국선교에 힘쓰기로 한 1912년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와 같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간절한 결기를 전혀 엿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팬데믹 상황이 가져다준 ‘전 세대를 위한’, ‘전 세대에 의한’, ‘전 세대의’ ‘전 영역에서’ 미디어 활용이라는 기회를 선교적 아젠다로 소화해내려는 시대정신은 온데간데없다는 것이다. 

이에 필자는 113년 전, 아니 108년 전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환경 속에서도 타문화를 넘어 타민족 선교를 나선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선교적 열정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본고는 조선(한국)교회의 초기 산둥(山東)성 선교 1차 자료와 논문들을 중심으로 초기 선교사 3명의 삶과 활동을 조명하면서 그동안 실패한 선교사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써야했던 점을 교정하는 동시에 한국교회는 원래부터 선교지향적이었다는 것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선교 결의로 시작된 조선(한국)교회
“(1907년) 로회(노회)를 시작할 때에 졔쥬(제주도)에 선교사를 보냄으로 신령한 교회를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우리에 깃븜(기쁨)이 충만한 바이온즉 지금 총회를 시작할 때에도 외국 전도를 시작하되 지나(支那·중국)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청원하오며.”

1912년 9월 1일 오전 10시 30분, 평안남도 평양 경창문 안 여성경학원에서 시작된 조선(한국)장로교회 제1회 총회의 첫 번째 안건은 황해노회가 내놓은 선교사 파송 청원이었다. 당시가 일제강점기라는 점에서 우리 민족은 고난 속에서도 선교를 최고 가치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앞서 우리 기독인들은 1902년 12월 22일 미국 하와이에 홍승하 전도사를 파송했다. 그 뒤 1907년 장로교회 독노회를 설립하고 탐라(제주도), 일본 도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 동포 및 유학생 선교를 위해 목회자들을 지속적으로 파송했다. 1884년 서양선교사를 통해 복음이 전파된 지 20년도 채 지나지 않을 때였다. 한국교회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자민족 타문화권 선교에 나선 지 5년여 만에 타민족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장로교 총회는 선교사 파송과 함께 1년 중 한 주일을 특별히 정해 각 교회에서 기도와 헌금을 할 것도 결의했다. 지금의 선교주일 헌신예배가 108년 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당시 교회가 컸기 때문에 눈을 외부로 돌린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재정적으로 풍족해서도 아니었다. 어린이들은 자신의 저금통을 깨고 선교비를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초기 선교사들 중에는 총회 부총회장, 서기 등 교단 정치 거물도 적잖게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선교사가 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선교사들은 현지어를 배우는 걸 당연시했다. 현지인을 통한 통역설교를 상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든지 현지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런 뒤 현지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했고 미래의 교회 지도자를 양성해나갔다.

곽안련(郭安連·Charles Allen Clark)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중국선교사 선발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교회의 모든 목회자가 자발적인 해외 근무 직원이 된다는 것은 한국의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러한 외지의 선교사역을 위해 사람을 선정할 때는 각 경우마다 담당 위원회가 선교지에 있는 선택 가능한 사역자들을 조사하여 그 선교과업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선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때 선택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선교사로 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1912년 총회 결의에 이어 1913년 9월 실제로 선교사가 정식으로 파송되기까지 적잖은 과정이 필요했다. 박태로(朴泰魯)와 김찬성(金燦星) 목사가 1913년 5월 산둥선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옌타이(煙臺)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마침 중화예수교장로회 화북(華北)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중국선교사 파송 의지를 밝히자 중국인들 사이에서 처음에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곱지 않은 반응이 나왔다.

“중화(中華)는 고대의 문명국이오 역사가 심장한 대국(大國)이며 세계 4분지 1의 인구를 가진 국가라 교만과 자존심이 많아 자칭 대국이라 하야 소국을 멸시하는 고래적 습행이 있으니 중화와 조선(朝鮮)은 자고로 관계가 되어 대소와 조완의 차별을 두는 관계로 조선교회가 중화에 선교는 다방으로 고난이라.” 분명한 반대의사였다. 나라 잃은 민족과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라고? 너무나도 생소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삐딱하게 나오던 중국 목회자들이 결국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산둥선교를 허락하게 됐다. 한위렴(韓韋廉·William Blair Hunt) 선교사의 사전 조율이 힘이 됐고, 한국교회 또한 겸손히 현지교회와 협의를 통해 협조를 구한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산둥성 선교를 위한 준비 작업
한국교회가 왜 중국, 유독 산둥성을 선교지로 꼽았을까. 초기 선교사들이 활동할 당시 유교와 도교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1900년 산둥성을 휩쓸었던 ‘의화단운동’의 여파도 만만치 않았다. 19세기 말 결성된 비밀사회단체 의화단이 옌타이 등지에서 교회와 외국대사관을 공격하며 외국인과 중국인 성도들을 대량 학살한 의화단 사건으로 인해 중국 기독교는 깊은 수렁에 빠지는 듯했다.

천만 다행스럽게 한국선교사들이 활동하기에 앞서 산둥성에서 1908∼1909년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907년 1월의 평양대부흥이 중국에도 불을 지핀 것이다. 허난(河南)성에서 사역하던 선교사 조나단 고포드(Jonathan Goforth, 1859-1936) 부부와 멕라렌 부부가 직접 평양을 방문, 부흥운동을 목격한 뒤 1907년 5월 장로교 라이양(莱阳)대회에서 이를 소개했다. 이어 중국인 목회자 장츠전(張賜禎), 후완청(胡萬成), 류진위에(劉金岳)가 다음해 1월 평양을 방문해 부흥의 실체를 경험했다. 이들은 훗날 중국교회 부흥운동의 주역이 됐다. 산둥문과대학과 허베이(河北)성 웨이현(威縣)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황현(黃縣), 칭다오(靑島), 지난(濟南), 지닝(濟寧), 라이저우(萊州) 라이양, 옌타이, 핑두(平度) 등지로 이어졌다.

통설에 따르면 중국은 한국과 문화적으로 유사성이 강했고 지리적으로 가깝다. 또 당시 많은 산둥인이 경제적 어려움을 피해 한국에 거주했던 터라 우리에게 산둥하면 곧 중국이 연상됐다. 다음으로 국제관계상 교섭이 가장 무난한 곳이었다. 당시 한국과 중국은 거의 국제법을 초월해 양국민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었다. 아울러 산둥성은 한국선교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지역이다.

당시 산둥성 선교는 미국 북장로회와 영국·미국 침례회가 주도하고 있었다. 북장로회는 산둥성의 3분의 1 이상, 미 침례회는 5분의 1 구역을 담당했다. 이어 영국 침례회와 스웨덴 침례회, 공리회(감리회) 순이었다. 서양선교사들은 교회와 학교, 병원사역을 통해 교육, 출판, 노동자·농민의 복지, 공공보건 분야에 크게 공헌했다. 1920년까지 산둥에서 공식 활동하던 외국선교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와 미국 선교회 9개, 영국 4개, 유럽 3개, 국제단체 4개 등이었다. 훗날 산둥성에 한국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라이양 노회는 미 북장로회 산하 산둥지역 일부와 교회들이 한국선교사회에 이양되면서 노회 조직으로 발전한 것이다. 즉, 한국선교사들이 단기간 많은 열매를 맺은 뒤 독자적으로 만든 노회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선교를 필연적이었음을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길선주 목사가 제주도에 선교사(이기풍 목사)를 보내 전도를 시작하자고 보고하기 전인 1906년 제주도가 아닌 중국선교의 뜻을 밝혔다. 이는 길 목사의 아들인 길진경 목사가 지은 《영계(靈溪) 길선주》에 나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길 목사는 “우리는 불원에 우리나라 전역에 복음을 전파하게 될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흑암 속에 묻혀있는 수억의 중국인들에게 미국 교인들이 우리에게 한 것처럼 선교사를 보내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도를 전하는 의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때의 주장이 제주도에서 먼저 경험을 축적한 뒤 중국선교를 하려 했던 것인지, 선교 의지가 제주도로 변경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매우 선교지향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타민족 선교를 결의한 1912년 당시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의 교인 총수는 14만 4260명, 세례교인은 5만 300명이었다. 이는 제주도 선교가 시작된 1907년에 비해 교인 수 8만 7317명, 세례교인 3만 4927명이 각각 늘어난 것이다. 1912년 통계에 따르면 목사 66명, 장로 225명, 교회 총수 2054곳에 달했다. 그중 가장 먼저 중국선교사로 선택된 박태로 목사는 1912년 평양신학교 5회 졸업생이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 파송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황해노회는 선교사 파송 청원서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인물 선정을 책임졌다. 아울러 총회가 선교사 파송을 받아들이면 선교사 재정까지 담당하겠다고 했다. 당시 황해노회원으로 총회에 참석한 이는 한위렴, 사우업(史佑業·Charles Edwin Sharp), 공위량(孔偉亮·William Charles Kerr) 선교사와 우종서·김익두·최병은·박태로·이원민 목사, 장로 18명 등이었다. 한위렴 선교사는 이에 앞서 1912년 6월 30일 제2회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당시 대형교회인 성도 1000여 명의 재령읍교회 위임목사로 시무 중이던 박태로를 눈여겨봤다. 박태로 목사는 선교사 중심으로 운영되던 한국교회에서 첫 번째 위임목사가 된 한국인이다. 물론 선교사의 영향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박 목사가 재령읍교회 위임목사였지만 한위렴 선교사와 동사(同事)목회를 해야 했다.

한위렴 선교사는 1915년 ‘더 코리아 미션 필드’란 잡지에 ‘한국장로교단의 미션워크’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중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려는 아이디어가 수년 동안 한국교회에 어필됐다”고 말했다. 다른 선교사들도 한국의 위치가 중국선교를 하는 데 유리하고 한국이 아시아 복음화에 공헌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의 중국선교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적잖다. 그가 세운 황해도 재령 명신학교의 1909년 추수감사절 행사에서 강대상 앞에 커다란 중국지도를 걸어놓고 학생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국이 창립 총회의 헌의위원이자 전도국 위원인 한위렴 선교사와 협의하고 그에게 적합한 선교지를 물색해줄 것을 요청하자 한위렴 선교사는 직접 산둥성으로 건너가 선교가 가능한 지역을 타진했다. 이를 위해 중국교회 지도자들뿐 아니라 중국 주재 미국선교사들과 심도 있게 논의했다.
 
1912년 12월 5일 소래(松川)교회에서 열린 제3회 황해노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노회 서기였던 박태로 목사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총회 해외선교의 중책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즉 중국에 선교사로 나갈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박 목사는 재령읍교회 위임목사가 된 지 6개월도 안 된 상태였다. 쉽지 않은 결정일 수 있지만 박 목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재령읍교회 성도들은 박 목사를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섭섭해 한동안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박 목사를 위한 작별 만찬회는 한위렴 선교사의 사회, 김창일 장로의 기도, 사도행전 20장 봉독, 정찬유 장로의 축사, 박태로 목사의 이별사 등으로 진행됐다.

대형교회 목사이자 영향력 있는 노회 임원인 박 목사는 총회 명령에 절대 순종했다. 과연 지금 한국교회는 ‘최고의 에이스’를 선교사로 보내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또 목회자들이 박 목사와 똑같은 제안을 받는다면 그처럼 행동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아무튼 박 목사는 1913년 5월 고향을 떠나 신의주로 이동한 뒤 윤선(輪船)을 타고 황해를 건너 옌타이에 도착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평남 안주교회 김찬성 목사와 함께 산둥장로회와 선교지를 정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지금 중화민국으로 보내신 선교사 박태로 목사를 보호하시고 옛날 바울의 앞에 열림같이 복음 전할 문을 널리 열어줍소서. 아멘.”
1913년 기일(奇一·James Scarth Gale) 선교사가 편집, 발행한 예수교회보는 이런 기도문과 함께 ‘중화민국으로 보내신 선교사 박태로 목사’라고 기록했다. 박태로, 김찬성 목사는 중화민국 산둥성 내 몇 고을을 순례했다. 이들은 옌타이 남서부에 위치한 라이양에 선교부를 설치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받았다.

“이리저리 생각하니 죄 없이 정배 온 모양이나 이것저것 덮어 놓고 신령계로 생각한즉 감사하고 기쁜 마음 태평양도 부족이라 시시마다 홀로 앉아 동천 향해 기도하며 삼위 주께 통정하나, 이곳 인생 형편 보면 가긍하고 가련하오, 많고 많은 숫한 인종 박의박식 가련하되, 동네마다 좋은 집은 우상 봉사하는 묘요, 부녀들의 정형 보면 가련한 중 극하도다.”
1913년 5월 강서당에서 머물던 박태로 목사의 첫 선교편지이다. 이 편지는 기일 선교사가 발행한 7월 ‘예수교회보’에 소상히 실렸다. 박 목사는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생각하기보다 중국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편지를 잠시 더 읽어보자. “여보 우리 부형 자매님네들 본방에 역사하는 형님들이여 일일시시 곤고할 때 이 형편을 생각하고 우리 조선 받은 복은 특별한 줄 깊이 알고 특별하신 성력으로 이곳 위해 기도하며 진심 감사드립시다. (…)”
박 목사는 자신의 뜻보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마음을 썼다. 당면한 모든 일에 대한 답을 하나님 말씀 안에서 찾아 위로와 힘을 얻었다. 40여 세에 선교사로 부름 받아 ‘중국 관화(중국 표준어)’를 배우려니 기억력이 따르지 못해 염려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는 말씀으로 자신감을 되찾고는 했다. 또 고향과 부모, 형제 생각이 나고 거처가 곤란해질 때, 음식이 달라 어려울 때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받고 소장했던 사진들을 보고 안식을 되찾았다. 생전 처음 중국을 방문했기에 중국어를 구사할 줄도, 가까운 벗도 없었다. 마음이 답답한 그에게 기도만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서구선교사들을 깜짝 놀라게 한 한인선교사들 
미국 북장로회는 1861년 덩저우(登州·현재 펑라이·逢萊)에서 산둥 선교를 시작했다. 이어 1862년 옌타이, 1872년 지난, 1882년 웨이현, 1890년 이저우부(沂州府), 1890년 지닝주(濟寧州), 1899년 칭다오, 1905년 이현(沂縣), 1913년 허텅현(和藤县) 등 선교지역을 9곳까지 확장해나갔다.

원래 산둥성을 밟은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는 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구츨라프(郭實獵·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이다. 그는 1831∼1834년 몇 차례 중국 동해안을 여행하면서 산둥 사람들에게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나눠주었다. 구츨라프의 선교가 개인적, 단회성이었다면 미 북장로회 선교는 보다 집단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미 북장로회 대표 선교사로 존 리빙스톤 네비우스(倪維思·John Livingstone Nevius), 칼빈 윌슨 마티어(狄考文·Calvin Wilson Mateer), 왓슨 맥밀런 해이스(赫士·Watson McMillen Hayes), 코벳 등을 꼽을 수 있다. ‘네비우스 삼자(자립·자전·자치)정책’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네비우스는 원래 1854년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에서 활동하다가 1861년 덩저우로 이동, 산둥 선교의 기수가 됐다. 그는 1890년 6월 7일 주한 서양선교사들의 초청을 받아 내한, ‘네비우스의 선교사역의 방법’이란 책을 나눠주며 삼자원리를 설파했다. 그 결과 주한 장로교 선교공의회는 네비우스 이론을 선교정책으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네비우스에 이어 상하이(上海)에서 약 5년간 활동하던 찰스 로저스 밀스(梅理士·Charles Rogers Mills)가 1862년 덩저우에 합류한 뒤 38년간 활동했다. 1864년에는 마티어 선교사가 덩저우에서 중국 내 최초의 현대 고등교육기관을 세웠고 1908년 칭다오에서 죽기까지 45년간 산둥 복음화에 힘썼다. 1882년 중국으로 파송된 해이스는 마티어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를 지난대학교로 발전시켰다.

옌타이 선교는 1862년 닝보에서 온 의사 디비 베툰 매카티(麥嘉締·Divie Bethune McCartee)에 의해 시작됐지만 꽃을 피운 사람은 코벳 선교사이다. 1864년에 옌타이에 도착한 그는 2년 뒤 첫 장로교회를 설립했다. 그의 전도를 통해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은 중국인은 왕즈(王治)이다. 왕 씨는 200여 리의 먼 길을 찾아와 코벳 선교사에게 ‘도(道)’를 물었다. 그의 밑에서 2개월간 공부한 왕 씨는 집으로 돌아가 친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왕 씨의 부인은 조급하고 화를 잘 내던 남편이 복음을 통해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자 놀라 이렇게 고백했다. “기독교가 만약 이 같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사악(邪惡)하다고 할 수 없다. 나 역시 기독교인이 되겠다.”

코벳 선교사는 옌타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선교 초기에는 중국인들에게 배척을 당하기 일쑤였다. 한지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지만 복음을 전하는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1917년에 산둥선교사로 파송되었던 홍승한(洪承漢) 목사는 1920년 ‘신학지남’ 제3권 제2호에 실린 ‘중국 산동성 래양 선교소식’에서 코벳 선교사가 사역 초창기 경험했던 어려움에 대해 이 같은 기록을 남겼다.

‘산둥성인(山東省人)은 본시(本是) 본국인(本國人)이라도 타성인(他省人)이면 일층하대(一層下待)하는 습속(習俗)이 유(有)한 중(中)에 모양(貌樣)과 언어(言語)와 의복(衣服)이 부동(不同)한 외국인(外國人)은 불언가상(不言可想)이라 고(故)로 오십여년(五十餘年) 전(前)에 미국(美國) 목사(牧師) 곽현덕(郭顯德) 씨(氏)가 초래(初來) 전도(傳道) 시(時)에 무한(無限)한 멸시(滅視)와 능욕(凌辱)과 핍박(逼迫)을 당(當)하였도다 혹(或) 한지(寒地)에서 경야(經夜)하기도 하고(객점(客店)에서 응접(應接)지 아니함으로) (…)’

코벳 선교사는 최초의 한국 선교사들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916년 당시 82세였던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으로 선교지 시찰을 온 심익현(沈益賢), 이일영(李一永) 목사를 만나 49년 전 경험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자기(自己)는 지금(至今) 팔십이세(八十二歲)요 오십삼년전(五十三年前)에 옌타이(烟台)에 래(來)하였으며 사십구년전(四十九年前)에 평양성(平壤城)에 래(來)하여 선교사(宣敎師) 살해(殺害)한 사건(事件)을 문사(問査)하여 보았는데 기시(其時)에는 조선국(朝鮮國)에 신자(信者) 일인(一人)이 무(無)하더니 지금(至今)은 교회(敎會)가 왕성(旺盛)하여 중국(中國)에 선교사(宣敎師)까지 파견(派遣)을 하였으니 실(實)로 감사(感謝)하다.”(기독신보 1916년 8월 23일자).

이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로 이어진 1866년 제너럴 셔만(General Sherman)호 사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코벳 선교사가 1867년 1월 23일에 조선에 온 적이 있다는 고백이다. 제너럴 셔만호 사건이 발발하자 중국 베이징(北京)  주재 미국 공사 윌리엄스는 미 함대사령관 로완(Rowan)에게 사건 규명을 명령했다. 이에 로완 사령관을 와추셋(Wachusett)호를 급파했고 코벳 선교사는 와추셋호 슈벨트 함장의 통역관으로 조선에 왔다. 토마스 선교사를 살해했던 조선이, 그것도 일제 강점기에 중국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했다는 사실에 코벳 선교사는 매우 놀랐고 하나님께 감사해했다.

초기 선교사 3인방-박태로·김영훈·사병순 목사
박태로 목사가 소속돼 있던 조선예수교장로회 황해노회가 1913년 6월 27일부터 제4회 노회를 개최했다. 노회는 김익두 목사가 찰스 에드원 샤프(史佑業·Charles Edwin Sharp) 선교사와 동사목사로 시무하던 신천읍교회에서 열렸다. 앞서 총회 전도국에 의해 중화민국 선교사로 청빙됐기 때문에 박 목사는 이 회의에서 재령읍교회 위임목사직을 공식적으로 내려놓았다. 또 맡고 있던 황해노회 서기직 역시 신학교 졸업 동기이자 함께 목사안수를 받은 최병은 목사에게 이양됐다. 당시 전도국위원은 단지 조선인목사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조선 주재 선교사들도 포함돼 있었다.

길선주 목사를 중심으로 초기 조선인목회자들은 중국선교 비전과 뜻을 세워 조선 주재 선교사들에게 협조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박태로 목사는 “아직도 어리고 자신들의 지도를 받아야 할 조선장로교회가 동족을 대상으로 한 사역이 아닌 중국인에게 선교사를 파송하겠다고 협조하는 게 의미가 남다르다”고 평가했다. “그저 받았으니 그저 주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실천이다. 우리는 이를 이행하기 위해 최대의 힘을 다할 뿐이다.” 즉, 주님의 절대적 분부이자 명령에 대한 순종, 이것이 바로 중국선교를 시작한 동력이었다. 한편 2개월여 뒤인 9월 7일, 경성(京城·서울)에서 제2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소안동 예배당에서 개최됐을 때 박 목사는 산동성지역을 시찰했던 내용을 총회대의원(총대)들에게 설명했다. 총대들은 그의 보고를 받고 매우 기뻐했다. 이어 그해 평양신학교 6회 졸업생인 김영훈(金永勳), 사병순(史秉淳) 목사를 선교사로 선택했다.

1913년 총회는 한국선교사에 의해 교회가 설립되면 소속을 중국노회에 두도록 한다는 결의도 했다. 선교사의 이명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다만 선교사의 귀국 시에는 총회에 언권위원으로 참석하게 하기로 했다. 1914년 발행된 중화기독교회연감은 한국교회의 선교사 파송 사실을 이렇게 기술했다. “高麗長老會於一千九百十三年派人至山東佈道” 우리의 국호를 ‘고려(高麗)’로 한 것은 색다르다.

사병순 목사는 1913년 6월 12일 평남노회에서, 김영훈 목사는 같은 해 8월 26일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앞서 1912년 6월 30일 목사안수를 받은 박태로와 함께 초기 중국선교사 3명 모두 오늘의 북한지역교회 출신이었다.

육군 참령과 의주 군수를 지낸 부친을 둔 김영훈 목사는 유복하게 자랐다. 그의 부친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모든 관직을 내던지고 귀향해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이 때문에 김영훈은 자연스럽게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그는 1910년 평북 의주군 월화면의 교회를 돌보는 조사(助師) 역할을 했다. 1913년 2월 19일 선천읍교회에서 열린 제3회 평북노회에서는 장로안수를 받았다.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월화면 호암교회 장로가 된 뒤 신학교 졸업과 함께 제4회 평북노회에서는 목사안수를 받았다. 김영훈 목사는 한학과 한시에 능했다. 이는 라이양에서 처음 선교를 시작할 때는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없었지만 중국인들과 필담을 나눌 수 있는 기초가 됐다.

선교사로 떠나기 앞서 사병순 목사에 대한 개인사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1909년 제3회 예수교장로회 독노회(조선노회)가 개최됐을 때 남평안대리회 소속 장로 총대로 참석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적잖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할 수는 있다. 당시 30대 초반인지라 결혼했을 터이지만 아내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1909년에 이어 1911년 대구 남문안교회에서 열린 제5회 독노회에 총대로 참석했다. 1912년 1월 평남노회 조직 노회록에 따르면 그는 평남 평양 서면에 위치한 증산 방에다리교회에서 장로로 활동했다. 평양노회 서기가 될 정도로 능력 또한 인정받았다. 사병순 목사가 1913년 평양신학교 6회 졸업생이라는 것은 당시 학제가 5년인 점을 고려하면 1909년 경 신학교에 입학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목사장립과 함께 동사목사가 됐다. 동사목사란 당시 외국선교사와 같이 동역하는 목사로 위임동사목사와 임시동사목사로 나뉜다. 위임동사목사가 위임을 받고 선교사와 함께 지교회를 맡는 목사라면 임시동사목사는 위임을 받지 못했지만 선교사와 함께 지교회 일을 담당하는 목사를 지칭한다. 윌리엄 L. 스왈랜(蘇安論·Swallen) 선교사와 동사목사로 일한 지 3개월 만에 그는 선교사로 임명받게 됐다. 그럼 누가 그에게 선교사로 가도록 제안했을까. 길선주 목사일 가능성이 크다. 평남노회 제5회 노회록에 보면 “전도회 회장 길선주씨가 총회 전국에서 사병순씨를 중화민국에 선교사로 보낼 것을 본회에 보고하매 (…)”라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서는 이들의 녹록지 않은 선교지 상황과 아울러 선교사 이탈 문제 발생과 고군분투한 박태로 선교사의 소천, 김영훈·사병순 목사의 미국 생활과 좌절 등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사진 | 《중국 선교를 회고하며》_방지일 목사 산동 선교 사진첩, 방지일 지음, (사) 방지일목사기념사업회 엮음, 홍성사(2011년).
주안 | 중국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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