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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3  통권 215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2674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마테오 리치의 북경행

제녕에서 이지와의 만남
1600년 5월 18일 마테오 리치 일행은 운하를 따라 북경을 향해 출발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운하를 따라 북상하던 도중에도 각지의 지방관과 명사들을 만나 교제하며 우의를 쌓았다. 그중 산동(山東) 제녕(濟寧)에서의 이지(李贄, 卓吾)와 두 번의 만남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이지는 복건(福建) 진강(晉江) 사람으로 운남(雲南) 요안(姚安)지부에 재임하던 중 불교를 숭상하여 삭발하는 등의 기행으로 해임되었고, 이후 주자학을 비판하는 길로 가고 있었다. 그는 남경의 대학자 초횡(焦竑)과 친분이 있었는데 마테오 리치가 남경에서 초횡을 만날 때 이지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마테오 리치는 제녕에 도착했을 때 이지가 바로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을 보내어 이 선교사들의 북쪽 여행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들어보려 했다.

제녕에서 마테오 리치와 이지는 서로 깊은 인상을 주고 받았다. 이지는 자신의 저술에서 마테오 리치와 ‘세 차례의 만남’에서 얻은 인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소개하였다. (1) 그는 풍모가 당당하면서도 중국 문화와 예의가 몸에 배인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중국 서적을 폭넓게 섭렵하였고, 유가 경전의 대의를 깨우치고 중국 의례를 따를 수 있는 모범적 사람이었다. (2) 그는 사리에 밝고 사람과 사물들을 대함에 빈틈이 없는 총명한 사람이었며, 또 안으로 총명하고 밖으로는 무척 수수하여 어지러이 떠들어도 모두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3) 그는 기독교를 통해 중국 전통사상을 대신하려고 하는데 이는 매우 어리석고 옳지 않은 듯하다.1)

마테오 리치는 중국 사대부와 교제 중 중국선교의 목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예리한 이지는 그가 중국 문화를 공부하는 것이 선교를 위한 목적에 있었음을 간파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테오 리치에 대해 여전히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는 마테오 리치가 먼 나라에서 불원천리하고 달려와서 중국의 정신을 본받으려 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고, 마테오 리치가 소개한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동의와 관심을 드러내었다. 또 이지는 마테오 리치가 남창(南昌)에서 쓴 《교우론(交友論)》을 여러 권으로 필사하여 호광(湖廣)지역의 여러 학자들에게 보내기까지 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남경과 제녕에서 이지와의 만남에 관련하여 깊은 감사와 감동의 마음을 간직하게 되었고 받은 은덕에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지금은 북경으로 향하는 분주한 상황이지만 곧 여유를 내어 이지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꿈을 마음속 깊이 갖게 되었다. 이러한 애정 때문에 마테오 리치는 뒷날 이지가 투옥되고 마침내 자살이라는 파국을 맞게 된 것에 대해 동정을 표하였고, 그가 비판하던 사람들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이지의 정신을 중국인들 가운데에서 찾아보기 드문 사례라고 칭찬하기까지 하였다. 

제녕에서 유동성과 만남
마테오 리치 일행은 제녕에 도착했을 때 황하(黃河)의 수로와 조운(漕運)을 관리 감독하고 있던 총독 유동성(劉東星)과도 만나 그로부터 크게 도움을 얻었다. 유동성은 이지와 친분이 있어서 당시 이지는 제녕에서 그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유동성은 내세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이지의 소개를 받고 마테오 리치를 만나 깍듯한 존경과 예의를 갖추었다. 그는 마테오 리치가 황제를 알현할 때 올릴 문서를 다듬어 주었고, 북경의 여러 고관들에게 마테오 리치 일행을 잘 돌봐 달라는 서신을 써 주었으며, 인편을 보내 마테오 리치의 선박을 인도하여 좁은 수로를 통과하게 도와주었다. 무엇보다도 유동성과 그 가족들이 보여 준 영원한 구원에 대한 관심 그리고 성모와 성자에 대한 경건과 예의는 마테오 리치에게는 큰 힘을 얻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드디어 북경으로
제녕에서 이지와 의미 있는 교제를 나누고, 또 총독 유동성의 도움을 받은 마테오 리치는 이번 북경행이 순탄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마쾌선(馬快船)은 1600년 7월 3일 산동 임청(臨淸)으로 끌려 갔고, 마테오 리치 일행은 태감(太監) 마당(馬堂)에게 잡혀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이졌다. 정무에 소홀했다고 알려진 만력 황제는 국내외 전쟁과 궁궐 건축, 사치 생활로 재정을 탕진하게 되자 전국 요지로 태감들을 파견하여 세금 징수를 감독 독려하게 했다. 각지에 파견된 태감들은 혹독하게 세금을 매겨서 거두고 있었고, 임청에서 세금을 거두고 있던 천진세감(天津稅監) 마당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마당은 마쾌선을 압송하는 환관들로부터 배 안에 외국인이 황제에게 바치려고 준비한 매우 신기하고 귀중한 예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인사를 핑계로 배에 올라 확인하였다. 그는 자신의 책임 아래 황제에게 보고하고 이들 외국 공물들을 바친다면 황제의 총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아울러 그는 기회를 봐서 선교사들의 귀중한 보물 중 일부를 자신이 차지하려는 생각을 숨기고 있었다. 

7월 31일 마당은 임청에서 마테오 리치가 황제를 알현하려 한다는 상주문을 조정에 올렸다. 이후 마테오 리치 일행과 진공품은 천진(天津)으로 옮겨져 엄격히 감시되었다. 마당의 상주문은 8월 10일 만력 황제에게 전달되었고 그것을 읽은 황제의 지시에 따라 진공품 목록이 보내어졌다. 마테오 리치 등에게 유지를 읽어 준 뒤 마당은 진공품을 관아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휴대하고 있던 조각상(彫像), 시계(鍾表), 프리즘(三稜鏡) 등은 자기 것으로 챙겼다. 대략 9월 중·하순경, 마당은 두 번째로 상주하였다. 그러나 이 상주문에 대한 회답이 한동안 내려오지 않자 마당은 마테오 리치가 가지고 온 예물을 다시 빼앗고 천진의 한 묘우(廟宇)에 마테오 일행을 연금한 채 병사들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북경에 서둘러 가려던 계획과 전체 선교 사업이 무너질 위험에 부딪히게 되자 마음이 매우 초조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임청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고, 관아에서 욕설과 구타를 당하고 돌아온 그로부터 마당이 이미 신부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강제 귀국시키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여 받았다. 특별히 북경으로 가서 편지를 전하고 조정 대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던 중국선교사 종명인(鍾鳴仁)도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위험한 환경과 혹한 속에 겨울을 보내고 있던 마테오 리치 일행은 중국 당국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참으로 답답한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몇 개월 뒤 상황이 반전되었다. 어느 날 문득 황제가 전에 그에게 보내온 상주문이 생각나서 거기에 거론된 시계 즉 자명종이 생각나서 찾게 되었고, 만력 황제가 급히 마당의 상소문을 찾아오라고 하였다. 만력제는 만력 28년 12월 5일(1601년 1월 8일)에 “예물을 올리게 하고 마테오 리치 일행을 북경에 들어오게 하고 해당 부서에서 경과를 조사하여 보고하라”2)고 비답을 내렸고, 당시 임청에 있던 마당에게 이 명령이 급히 보내졌다. 그리하여 마테오 리치 일행은 만력 28년 12월 21일(1601년 1월 24일)에 천진을 떠나 북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미주  
1) 이상 李贄, 《續焚書》 권1 참조.
2) 《明神宗實錄》 권354.






사진 출처 | 네이버 블로그(https://blog.naver.com/sbjoo912/221224312865) 캡처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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