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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6.2  통권 214호  필자 : 동칭펑(童清峰)  |  조회 : 2312   프린트   이메일 
[차이나 윈도]
위리화(于梨华)의 죽음과 불멸의 전기(传奇)

위리화(于梨华, 1931. 11. 28-2020. 5. 1)
1960년대 유학생 문학의 선구자이며, ‘뿌리 없는 1세대(无根一代)’를 다루었던 중국계 미국인 작가 위리화(于梨华)가 세상을 떠났다. 지난 5월 1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미국 메릴랜드주에서 향년 8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위리화는 평생 800만 자(字)가 넘는 글을 통해 자신이 유학생활에서 경험했던 소외된 삶을 다루었다. 

5, 60년대 국내외에서 유명했던 소설가 위리화는 대만 유학생 문학의 개척자로 인정받았고, 바이셴융(白先勇), 천뤄시(陈若曦) 등 후대에 유학생 문학을 쓰는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위리화는 ‘대학은 대만대학으로, 유학은 미국으로’라고 외치던 시절에 자신이 직접 경험한 유학생활의 고민과 정체성의 혼란에 관한 글을 썼다. 그녀는 “우리는 뿌리 없는 세대(我们是无根的一代)”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또한 그녀의 후기 작품은 유학생 문학의 소재에서 벗어나 주로 여성 문제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비판적 사고를 담아냈다.

위리화의 글쓰기 문체(风格)를 연구하는 장즈후이(张治慧)는 자신의 연구 논문에서, 위리화는 첫 번째 장편소설 《칭허로 돌아가길 꿈꾸다(梦回青河)》의 출판으로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연이어 발표한 《다시 종려나무를 보다(又见棕榈)》는 독자들에게 더 강한 울림을 주었다고 한다. 섬세하고 감정이 풍부한 문장에 독자들은 매료되는 것이다. 1967년에 출판한 《다시 종려나무를 보다》는 유학생 문학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았으며, 또한 60년대 대만의 유학 열풍과 이주를 통해 정체성의 혼란을 보여주었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지식에 대한 열정
위리화는 자기관리에 철저했기에 80여 세까지도 늘 글쓰기와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 위중화(于忠华)는 그녀를 만나러 가기 전에 항상 부탁받은 책 몇 권을 가져 간다고 하면서, “누나의 지식에 대한 갈망과 철저한 자기관리는 매우 뛰어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녀는 미국의 생소한 많은 프로 스포츠를 보면서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연구에 매우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한 번은 누나가 미식축구를 재미있게 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누나에게 언제부터 이 운동에 흥미를 가졌는가 하고 묻자 그녀는 아이들과 공통된 화제를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녀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외에 또한 영문으로 소설을 써 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미국 사회의 독자들의 취향을 극복하지 못했다.

위리화는 2006년 버몬트주 미들베리 칼리지(Middlebury College)에서 명예 문학박사를 받았다. 그해 다섯 명이 이 영예를 차지하였는데 여기에는 올해 대통령 출마에 실패한 버몬트주 연방 상원 의원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도 포함되었다. 

시상 전날 만찬에서 위리화는 주최측의 요청에 의해 담화를 발표했다. 이때 과거 대만대학교를 졸업한 뒤 로스앤젤레스의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유학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1956년, 당시 미국의 MGM 영화사에서 캠퍼스에 올린 작품 공모에 그녀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원고 마감 직전에 신청을 하였는데 의외로 그의 영문 단편소설 《Sorrow at the End of the Yangtze River(扬子江头几多愁)》가 MGM ‘Samuel Goldwyn Creative Writing Award’ 문예상 1등을 수상했다.

위리화는 자신이 공모전에 참여한 것은 순전히 한을 풀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녀가 대만대학교 외국어과에 입학한 지 1년밖에 안 되었을 때 외국어과 학과장 대리였던 위다차이(俞大彩, 대만대학교 총장 푸쓰녠[傅斯年]의 부인, 전 국방부 장관의 여동생)가 그녀에게 “너의 영어실력으로는 외국어과에서 계속 공부할 수 없다”고 직언하며 역사학과로 옮길 것을 강요했다. 역사학과 졸업을 하면서 이 일을 평생 유감스럽게 여겼는데 그녀가 이번에 MGM에서 문예상 1등을 수상하면서 자신이 위다차이가 말한 것처럼 영어실력이 그렇게 형편없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위중화는 누나의 ‘끈질긴 인내(锲而不捨)’가 글쓰기 성공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소설을 쓰고 문학 작품 활동을 꿈꿨다. 몇 년 전 워싱턴대학교에서 공부하던 그녀의 손녀가 명사를 방문하라는 숙제를 하게 되면서 자신의 작가인 할머니를 방문하여 작가가 된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초등학교 6학년 때 글쓰기를 했는데 선생님이 그녀의 글을 벽에 붙여놓았을 뿐 아니라 전교 1등을 차지했다고 했다. 선생님은 그녀를 글쓰기 천재라면서 이후에 꼭 유명한 문학가가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고 대답했다.

1945년 위리화의 아버지가 대만 중부지역의 한 사탕공장을 인수하게 되어 1947년 온 가족이 타이중(台中)으로 이사를 했다. 위리화는 타이중여자중학교에 편입하였고, 거기서 많은 문예계의 유명 인사들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추이샤오핑(崔小萍), 궁자눙(龚家农)이 있다.

위리화는 두 번 결혼을 했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내 결혼은 실패였어요”라고 고백했다. 그녀는 “대륙에서 대만으로 돌아온 뒤 다시 미국에 가서 그곳에서 중국 사람과 결혼을 했고, 후에 미국 사람과 결혼을 했어요. 이 자체가 하나의 소설이에요.”라고 했다. 그녀의 첫 남편은 쑨즈루이(孙至锐, 항일(抗日) 명장 쑨리런[孙立人]의 조카)였다. 두 사람은 UCLA에서 알게 되었고 결혼 후 세 자녀를 두었다. 큰딸 레나 쑨(Lena Sun)은 <워싱턴포스트>의 의학 전문 기자이며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80년대 초에 이혼한 위리화는 뉴욕주립대학교 올버니(Albany) 분교 총장인 두 번째 남편 빈센트 오 리어리(Vincent O'Leary)을 만났고 당시 그녀는 이 학교에서 강의를 겸하고 있었다. 한 번은 오 리어리가 중국 대륙의 한 대학교를 방문하였는데 초청한 학교측에서 통역할 사람을 찾지 못하자 누군가 마침 근처에 있던 위리화를 임시 통역으로 추천하였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샤즈칭(夏志清)과의 ‘사랑’
그녀의 동생 위중화는 문학평론의 대가인 샤즈칭(夏志清)이 누나를 쫓아다니던 로맨스를 기억하고 있다. 샤즈칭은 ‘감정이 충동적인 사람(感情冲动的人)’이기에 ‘누나는 그의 미움을 살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의 펜 끝이 누나의 노력을 완전히 헛되게 할 수도 있고, 더 높이 올라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위리화는 샤즈칭의 재능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녀가 완전히 피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매우 친밀했다. 하지만 자녀들이 아직 어린 점을 고려하여 결국 저들 각자의 결혼을 지키기로 하였다. 쑨즈루이도 이로 인해 많은 고민을 하면서 항상 위중화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어보았다고 한다. ‘매번 우리가 차 안에서 얘기를 나눌 때면 재떨이가 늘 가득 찼어요.’ 결국 샤즈칭과 위리화는 각자의 가정에 돌아갔고 원래 직업상의 친구 사이를 회복했다.






출처 | <亚洲周刊> 2020年 19期(2020.5.11-5.17)
번역 | 노은혜•본지 중국어자료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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