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이번호 
북쇼핑
2020.6.2  통권 214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2607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남창(南昌)과 남경에서의 마테오 리치 (4)
유교 문화 적응
마테오 리치는 유럽의 과학 지식 전파를 통해 중국선교의 기초를 삼는 전략을 전개함과 동시에 중국의 전통 유가사상과 제반 풍속 습관에 적응하는 것 또한 주요 전략으로 채택하여 실천하였다. 

그는 광서(廣西)성 조경(肇慶)을 떠나 강서성으로 들어갈 때 이미 승복과 승려 칭호를 버리고 유학자의 복장으로 갈아입었는데 이것이 그의 중국 문화에 대한 적응 노력의 대표적인 사례이고 그 첫 걸음이었다. 유학자 복장으로 갈아입음으로써 중국 지식 계층과의 친밀한 교제가 수월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중국 전통 유가사상에 대한 학습과 연구도 한층 더 심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유가사상과 서양 기독교 교리가 여러 면에서 일치점이 있음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바뀐 전략은 장차 적응성 선교의 실제적 전개로 발전하는 데 필수적인 토대가 되었다. 

1595년 11월 4일 마테오 리치는 남창에서 예수회 총회장 아쿠아비바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은 일찍이 그들의 경전 속에서 우리의 교의와 부합되는 부분들을 많이 찾아낸 바 있습니다. 과거 6년 동안 훌륭한 선생이 제게 육경(六經), 사서(四書) 등을 강해해 주었는데, 유일신, 영혼의 불사불멸, 천당의 영원성 등에 관한 사상이 모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유학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 그들에게 그들의 신앙에 관한 문제를 질문했고 동시에 그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의 신앙을 그들에게 소개하여 듣게 했습니다. 이런 원칙을 이용함으로써 우리들의 선교의 첫 출발을 좋게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1) 라고 분명하게 지적했다.

마테오 리치는 유교 경전과 유학자와의 교류를 중시하게 되었고, 이 원칙들은 남창의 선교활동 중에 구체화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지만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등의 교리는 잠시 보류하고,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 영혼의 불사불멸, 상주고 벌주시는 하느님 등 그가 유가사상과 연계하여 설명 가능한 교리를 우선 전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이것이 마테오 리치가 확립한 기독교 교리와 유가사상 사이에서 찾아낸 일치성과 상호보완성이었다. 이 원칙은 뒤에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에서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중국 우상 극복
그러나 학술성 선교든 적응성 전략이든 그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는 중국에서 우상을 대신하도록 기독교 복음을 전파한다는 기본 목적으로 귀결되었다. 남창에 있을 때 그는 중국의 3대 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악한 용에 비유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이를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거듭 다짐하였다. 

마테오 리치의 이러한 소신은 남경에 있던 기간에도 유지되었다. 덕망 높은 이여정(李汝禎)이 주최한 연회에서 마테오 리치는 그 지역에서 이름이 알려진 승려 삼회(三淮)와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천지의 주재자가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으며 신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존엄성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고 하는 삼회의 주장에 대하여 마테오 리치는 천지의 창조자가 창조한 사물과 창조주의 전지전능함을 거론하며 대응했다. 또 마테오 리치가 천지의 신은 무한히 선한 분이고 인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으므로 인성은 선할 수밖에 없다는 관점을 제시하자 답이 궁해진 삼회는 몇 구절의 불교 염불을 하고 물러났다. 이러한 논쟁을 통해 중국인들이 서양선교사들이 그렇게 야만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하였다. 


북경행을 위한 노력
마테오 리치는 불교 신앙의 비판이란 측면에서는 초보적 진전을 이루었지만 천주교가 중국에서 빠른 속도로 전파되기 어렵다는 형세만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596년 10월 15일 남창에서 로마의 코스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테오 리치는 선교사가 중국에 온 지 15년 동안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세례를 받은 사람은 여전히 100여 명에 불과한 것과 관련하여 마테오 리치는 그 요인은 여섯 가지를 분석하여 제시했다. 첫째, 중국은 사람이 많고 땅이 크며 물산 또한 풍부하여 부족한 것이 전혀 없어서 외국 사절이나 외국에서 보내 온 예물에 열광하지 않는다는 점, 둘째, 중국의 정치제도가 매우 질서정연하여 사후의 문제나 영혼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는 점, 셋째, 중국의 주요 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는 ‘영혼구원’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고 현세의 일만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 넷째, 중국에는 군사나 무기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매우 드물고, 백인종과 서양에 관하여 의심을 갖고 있다는 점, 다섯째, 모든 외국인을 문명 밖의 야만인으로 간주하고 중국인만이 세계의 으뜸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외국인이 중국에 정착하는 것을 환영하지 않으며 서양 종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기는 점, 여섯째, 정치는 특이하여 중국의 황제 외에는 자유가 없고 황제를 쉽게 만날 수 없다는 점 등을 들었다.2)

그래서 그는 학술성 선교와 유교에 적응하는 전략을 확립하여 특색 있는 새로운 선교 방식을 제안하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는 각기 다른 나라와 민족을 대상으로 각기 다른 선교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고 중시하게 되었다. 그는 거듭 중국은 다른 민족과는 크게 달라서, 다른 선교구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가르침을 전하고 또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으며 또 그런 방법을 통해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도 있지만, 중국에는 그런 방법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중국의 이러한 경직된 선교 환경을 효율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핵심 전략이 황제를 만나 선교의 허락을 받는 것임은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구여기 등 남경 사대부들에게 북경으로 올라가는 가장 좋은 방안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고, 가능한 빨리 예물을 황제에게 바치기 위해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아울러 막 중국에 들어온 스페인 출신 디에고 판토하(Diego de Pantoja, 龐迪我) 신부, 두 사람의 중국인 수사(修士) 종명인(鐘鳴仁), 유문휘(游文煇) 등이 마테오 리치를 북경까지 수행할 준비를 하고 대기하게 했다. 마침내 1600년 5월 18일 마테오 리치 일행은 운하를 따라 북경을 향해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3)


미주    
1) 羅漁 譯, 《利瑪竇書信集》 上冊, p. 209.
2) 羅漁 譯, 《利瑪竇書信集》 上冊, pp. 237〜238 참조.
3) 何高濟 等譯, 《利瑪竇中國札記》 下冊, p. 376.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인쇄하기   메일로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