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에 올 때 전속 사제로 데리고 온 아나스타시우스가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지만, ‘신(神)의 어머니’는 아니라는 설교를 하여 논란이 일어났는데 네스토리우스는 아나스타시우스를 변호했다. 이로 인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로스(Kyrillos)로부터 제소를 당했으며, 결국 431년에 열린 에베소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정되어 추방당했음을 말했다.
오늘은 지난 호에서 예고한 것 같이 네스토리우스의 교설과 글로 인해 네스토리우스가 겪은 일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한때 중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한국에까지 전래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경교를 잘 알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안디옥학파와 알렉산드리아학파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 감독으로 있을 때 서방교회 안에는 안디옥파학와 알렉산드리아학파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 이들 두 학파는 특히 기독론을 둘러싸고 심한 마찰을 빚었다.
안디옥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인성을 강조했다. 안디옥파학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성경도 분석적이고 비평적인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하였다.
이에 반해 알렉산드리아학파는 신비적이고 은유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안디옥학파의 전통에 충실하였다.
네스토리우스가 데리고 온 아나스타시우스 사제는 설교하면서 마리아에게 ‘테오토코스 (Theotokos, 하나님을 수태한 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이 칭호의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 칭호를 즐겨 사용하고 있던 알렉산드리아학파를 자극하고 분노하게 하는 일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아나스타시우스의 편을 들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리아가 왜 테오토코스 가 아닌지를 설명하는 설교를 했다. 그는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하는 것은 4세기 초의 아리우스주의가 주장한 이단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또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은 단순한 인간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네스토리우스의 설교는 외국까지 퍼져 나갔는데 이집트에서는 그 설교 내용을 놓고 수도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로스는 429년 부활절 직후 네스토리우스의 교설(敎說)을 공격하는 회람문서를 작성했다. 그가 이렇게 네스토리우스를 적극 공격한 것은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의미의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일 뿐이라면서, 신의 어머니라는 의미의 테오토코스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통일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또 신학적 동기와 함께, 경쟁 교구인 콘스탄티노플의 입지를 약화시키려고 하는 정치적 동기도 얽혀 있었다. 429년의 여름이 끝날 무렵,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에게 자신의 오류를 시인하라는 편지를 썼고, 네스토리우스는 짤막하게 답변을 했다.
페르시아에 근거를 두다
동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는 이 논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431년 성령강림주일에 에베소공의회를 소집했다.
에베소공의회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처음에는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에베소의 주교들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키릴로스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에 의해 네스토리우스는 파문을 당했다.
뒤늦게 도착한 안디옥의 주교들은 따로 회의를 열어 키릴로스와 에베소의 주교를 파문했다. 황제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네스토리우스를 추방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추방당한 수도원에서 4년(431년-435년) 동안 머물면서 자기의 사정을 상세하게 적은 《비극(Tragedy)》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다시 리비아 사막에 있는 지금의 카리야 오아시스로 옮겨졌다. 유배지에 있는 그는 외롭지 않았다. 방문자들이 줄이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변호서이자 자서전을 가명으로 집필했다. 네스토리우스의 교설은 키릴로스의 주장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이를 배격했고 키릴로스의 주장은 오해에서 근거한 것이라고 말했다.
451년에 열린 칼케돈(Chalcedon)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확정되었다. 이로써 네스토리우스파와 서방교회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네스토리우스의 교설은 로마제국에서는 철저한 탄압을 받아서 사라졌지만 그 밖의 지역에서는 존속할 수 있었다. 특히 페르시아교회는 네스토리우스를 받아들였다.
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 군주들에게 자신들의 종교가 페르시아의 원수인 로마인들의 종교와 같지 않음을 보여 주어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이렇게 해서 페르시아에 근거를 두게 되었고 7세기 초부터는 외국 여러 곳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의 발걸음은 인도의 말라바르(Malabar), 아라비아 그리고 중앙아시아를 지나는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이르게 되었으며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세우기에 이른다.
다음 호에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려용덕 | 도봉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 <한국교회신문>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