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론》 편찬과 성과 마테오 리치의 사역에서 남창과 남경에서의 중국 신사층과의 교제 과정은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특히 이 시기 한문으로 간행한 문서들은 그로 하여금 중국 사역에서 어떻게 중국인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인지를 가늠하게 해 주었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한문으로 찬술한 《교우론(交友論)》이었다.
이 책은 본래 남창 건안왕(建安王) 주다절(朱多㸅)의 질문에 대하여 유럽인의 우정에 관한 생각을 소개한 내용이었다. 이 책은 편찬된 뒤에 중국 지식인의 폭넓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마테오 리치에게 더욱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이 소책자는 1595년 11월 4일에서 12월 15일 사이(만력 23년 10월 초 3일에서 11월 보름)에 완성되었다.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은 수도원 서적에서 뽑아낸 서양 격언과 철학자들의 유명한 문구에 수식을 가하여 중국인의 심성에 맞게 편찬한 것이었다. 《교우론》 100개조의 격언 가운데서 76개의 조는 각각 유럽 고대 28명의 작가가 남긴 명언들을 인용하거나 23종의 고대 저술에서 뽑아 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을 보면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us) 10개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6개조, 키케로(Cicero) 14개조 등이다. 비록 책 속에 인용된 것은 서양 철학자의 유명한 문구들이었지만 중국인들의 취향에 맞추어 선택 서술되었다.
《교우론》에서는 인간관계 중의 친구관계를 하나님이 내려준 능력이라고 설명하였다. 각 사람은 각 일을 홀로 다 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귀며 서로 도우라고 명령하셨고, 만약 세상에서 이 도가 없어진다면 인류는 반드시 절멸하게 될 것이라는 논지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또한 우정의 도리를 인류 사회를 유지하게 하는 기본관계로 강조하면서 우정이 부자간, 형제간의 혈연관계에 의한 정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했다. 친구 보기를 자신처럼 하고, 몸은 둘이지만 영혼은 하나로 하며, 뜻과 길을 같이하여 상호 의지하고 도우며, 빈부 간에 재물을 같이 하며 함께 누리는 서양 우정의 도리를 묘사하였다.
마테오 리치가 《교우론》에서 표현한 우정의 도는 중국 유가의 도덕관념이라는 전통 영역 속으로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을 끌어 들였다. 고대 중국에서는 군신, 부자, 부부, 형제관계가 훨씬 중요시되어 왔다. 이제 《교우론》이 표방한 우정이 혈연 사이의 정보다 더 귀중하고 친구 사이는 평등관계라고 한 관점은 명·청 시대 학술계의 반(反)전통적 사조에 신선한 소식으로 간주되어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교우론》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의 언어·문자에 아직 정통하지 못할 때 중국 문인의 교정을 받으며 저술된 것이었지만, 그 내용이 신선했고 시대의 풍조와 잘 어울렸기 때문에 편찬되자마자 필사 전파되기 시작했고 나아가 출판되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교우론》은 마테오 리치의 첫 번째 중문 저술이었으며 또 도덕적 영역에서 서양사상과 유가 학설의 공통점과 상호 보완성을 추구한 첫 번째 시도였다. 아울러 그에게 수많은 친구를 만들어 주었고 그의 명성을 널리 떨치게 해 주었다. 이 책이 거둔 큰 성공은 마테오 리치로 하여금 이미 시작한 적응성 선교 노선을 계속해서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자연과학을 통한 교류 마테오 리치는 일찍이 자연과학자로서 유명했다. 그는 중국 전통 수학과 천문학의 결점과 오류들을 지적하거나 서양의 자연과학 지식과 기기들을 전달해 줌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그는 과학을 전파하는 중에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와 교회의 규범을 침투시키는 노력도 병행하였다.
구여기(瞿汝夔)는 이전에 소주(韶州)에서 머물던 동안 마테오 리치로부터 유럽의 수학(算學)을 배우면서, 마테오 리치의 스승 클라비우스(Clavius)의 교정본을 근거로 유클리드 《기하원본(幾何原本)》 제1권의 번역을 완료했다. 이후 이 책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 지식인들에게 서양 수학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교과서가 되었다. 남경에 있을 때에는 다소 오만한 성격의 장양묵(張養黙)이 마테오 리치의 처소에서 유클리드 《기하원본》 제1권을 배운 후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마테오 리치에게 “우상 숭배자와 변론하는 것은 완전히 시간 낭비이고 자신은 수학을 가르쳐 주며 중국인을 인도하면 충분히 (마테오 리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1)고 권했다.
천문학 방면에서 지구는 구(球)이고 지구의 인력이 지구 반대편의 사람을 떨어지지 않게 한다든지, 일식과 월식을 일으키는 원칙이 있으며, 태양이 지구에 비해 훨씬 크고 별들은 타원형의 궤도로 운행하고 있으며, 경도와 위도에 따라 지구 표면을 구획하고 해시계 위에 황도대(黃道帶) 24도를 새겨 시간을 표시한다든지 하는 등등은 모두 중국인들이 그때까지 들어보지 못하던 과학 지식이었다. 그는 1596년 9월의 일식을 정확히 예측함으로써 실제로 중국 지식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외에도 마테오 리치는 해시계, 천구의(天球儀), 지구의, 기타 과학기기들을 제작하여 중국 백성과 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들 서양 과학기기가 고관대작들에게는 감상과 놀잇거리가 되고, 일반 유생들에게는 탐색과 논의의 대상이 되면서 서양 기독교 또한 은연중 감화를 주고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세계지도를 통한 교류 남창과 남경에 거류하던 5년의 기간 동안 마테오 리치가 수정을 가한 세계지도는 적어도 여섯 편에 이른다. (1) 처음 남창 건안왕 주다절을 만났을 때 전달한 중문 설명이 덧붙여져 있는 세계지도집. (2) 만력 24년(1596) 마테오 리치가 손으로 직접 그리고 주석과 설명을 더하여 남창지부 왕좌(王佐)에게 전달한 세계지도. (3) 마테오 리치가 남창에서 교제한 석학 장황(章潢)에 전달하여 그의 저명한 저술 《도서편(圖書編)》 127권 중 제29권에 수록된 여섯 폭의 〈여지산해전도(輿地山海全圖)〉 (4) 1598년 6월 마테오 리치가 남경예부상서 왕충명(王忠銘)을 따라 남창을 출발하여 남경을 거쳐 북경으로 올라갈 때 황제에게 바칠 예물이었던 목판 세계지도 (5) 왕충명과 마테오 리치 일행이 남경에 도착한 뒤 응천순무(應天巡撫) 조가회(趙可懷)가 왕충명에게 보낸 한 폭의 세계지도(《산해여지전도》 추정) 모사본. (6) 1599년 말부터 다음 해 봄까지 마테오 리치가 남경에 머물러 있던 기간 남경이부주사(南京吏部主事) 오중명(吳中明)의 요청에 따라 수정해 준 세계지도(마테오 리치가 광동성에서 그렸던 세계지도). 특히 오중명의 이 지도는 남경에서 중국 각지로 전해졌고 마카오 심지어 일본에까지 전해졌다. 이러한 마테오 리치가 제작하여 전달한 세계지도는 필사 혹은 목판 인쇄로 혹은 돌에 새겨진 모습으로 널리 전파되었고, 황족, 각급 관료들, 신사층에 이르기까지 마테오 리치의 명성이 높이 알려지는 주요 매체가 되었다.
미주 1) 何高濟 等譯, 《利瑪竇中國札記》 下冊, pp. 351-352.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