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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2  통권 210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3525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마테오 리치의 소주(韶州)에서의 사역과 떠남

소주(韶州)에서의 마테오 리치
1589년 8월 15일 조경(肇慶)을 떠난 마테오 리치는 안토니오 알메이다 신부를 수행하여 8월 24일 소주에 도착하였다. 소주에 도착한 그는 현지 관료들이 추천하는 회당 건립 후보지인 남화사(南華寺)를 방문하였다. 원래 소주 조계(曹溪)에 위치한 남화사는 남선종(南禪宗)의 개조인 혜능(慧能)이 수행하다 입적한 중국 불교의 성지였다. 마테오 리치 일행을 승려의 한 유파로 인식한 총독과 현지 관원들은 이곳의 산수경관이 수려하고 법당도 화려하였기에 이곳에 마테오 리치 일행의 회당을 세우도록 추천하였다.

그러나 마테오 리치는 그가 불교와 다른 교파에 속해 있고 교리도 다르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회당을 건립할 다른 부지를 요청하였다. 일부 이를 이해하는 관료들도 있었지만 경계하는 관료들도 있었다. 이에 마테오 리치는 자신들이 성상가(星象家)이자 천문학자로서 세계지도를 제작하여 이미 조경에서 인쇄한 바 있다고 설명함으로써 관원들의 관심과 후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마침내 마테오 리치는 소주성 교외의 광효사(光孝寺) 부근에 이상적인 회당 건립지를 저렴한 가격으로 확보하였다. 소주 관원들을 조경에서처럼 웅장한 건축을 희망했지만, 마테오 리치는 회당이 부유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귀중품과 은제 성배를 노출시키지 않고, 최대한 자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건물도 단층으로 소박하게 건축하였다. 소주에서의 마테오 리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선교전략을 지향하기 시작하였다.

구태소(瞿太素)와 교제
마테오 리치가 소주에서 비로소 전개하기 시작한 새로운 선교전략, 즉 적응성 선교사역은 중국 유학자 구태소(瞿太素)와의 친밀한 교제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구태소의 이름은 여기(汝夔)이고 소주부 상숙(常熟) 사람이며, 그의 부친은 예부시랑 겸 한림원학사라는 고위 관직을 지냈다. 태소는 총명하였고 교육도 많이 받았지만 벼슬길로 나가지는 않고 각 지역 유력 인사들과 교유하며 떠돌았다. 구태소와 마테오 리치의 첫 대면은 명(明) 만력 17년(1589년) 7월과 8월 사이 즉 마테오 리치가 조경에서 떠나기 바로 전이었다. 당시 조경에 와서 총독과 영서도윤을 예방하게 된 구태소는 관청 접견실에서 마테오 리치를 만난 바 있다. 이후 유년 시절 가정교사였던 남웅지부 황문(黃門)에게 의탁하고 있던 구태소는 마테오 리치 일행이 소주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그를 찾아 왔고, 대화를 나누던 중 마침내 마테오 리치를 스승으로 받들게 되었다. 이후 2년 동안 두 사람은 매일 만나며 마치 가족처럼 친밀하게 교제하였다.

구태소와의 친밀한 교제는 마테오 리치의 적응성 선교전략의 실천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쳤다.

첫째, 선교사들이 불교 승려 복식을 버리고 유림 복식으로 전환하는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구태소는 기독교가 중국에서 발전하려면 유가 전통과 사대부의 용인이 필수적이라 인식하여 이런 제안을 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이러한 결단에 동의하였고, 마카오로 소환되어 순찰원 발리냐노를 만난 기회에 승려 복식 대신 유림 복식으로의 전환이 중국에서의 선교 기반을 확장하는 데 보다 유리할 것임을 건의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마카오 수도원에서 복식 전환에 대한 결정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발리냐노의 뜻을 따라 두 가지 방면의 준비를 하였다. 한편으로는 유가 “사서(四書)” 대부분을 라틴문으로 번역하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루지에리의 《천주성교실록》을 대신할 중문으로 《요리문답》을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환복 건의는 2년여 숙고 기간을 거쳐 1594년 말 공식 승인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지금까지 가톨릭 선교사들은 중국 불교 승복을 입고 불교 승려처럼 삭발하고 승려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으나 이러한 변복을 통해 유림 사회와의 친밀도를 높이게 되는 중국 기독교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이후 마테오 리치는 발리냐노의 지시를 기반으로 선교단에 남아 있던 불교 관련 흔적을 제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내용상 불교 용어가 만연하였던 루지에리가 편찬했던 《요리문답》(즉 《천주성교실록》) 배포를 중지시켰다. 이후 중국 선교단은 마테오 리치가 새로 확정한 방향과 전략을 따라 순조롭게 전진해 나갔다.

둘째, 마테오 리치는 구태소와의 교제를 바탕으로 현지 관원들과 폭넓은 연계를 갖게 되고 일반인들의 교당 방해 행위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병비도(兵備道)인 등미정(鄧美政) 등 군관, 구(瞿)의 동향이자 신임 소주장관 사태경(謝台卿), 지현 유문방(劉文芳)과 휘하 각급 관원들,  그리고 멀리로는 남웅지부 황문 등과 좋은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이러한 교제를 하게 된 고관들은 선교활동의 보호자가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선교 사업은 어려움이 줄어들고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만력 19년(1591년) 봄 신부들은 소중히 간직해 왔던 성모 마리아와 예수, 요한의 성화상을 교당 제단 위에 전시하였는데 이것이 현지 주민들의 불만을 야기하여 잇따라 교당이 격렬한 투석 습격을 받게 되었다. 구태소의 중재로 관아에서 향후 다시 범행을 저지르는 자가 있으면 중벌로 다스린다는 고시문을 반포함으로써 사태를 잘 수습할 수 있었다. 또한 구태소의 주선으로 마테오 리치는 남웅부 상인 갈성화(葛盛華) 일가족을 입교시키는 등 선교 성과도 거두었다.

소주(韶州)를 떠남
구태소의 중재와 지방관들의 엄호로 마테오 리치의 선교단은 소주(韶州)에서 일년 반 이상 별 탈 없이 조용히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구여기가 만력 20년(1592년) 다른 곳으로 떠난 뒤에 사정은 급변하게 되었다.

1592년 7월 어느 날 밤, 2백여 명의 괴한들이 소주 선교단 사택을 포위 습격하여 외국인들이 나라 밖으로 추방되어야 한다고 난동을 부리는 통에 마테오 리치는 발에 부상을 입는 등 주민들의 저항과 반발이 재개되었다. 여기에다 이곳 풍토에 적응하지 못했던 탓으로 알메이다와 페트리 등 젊은 선교사 2명이 잇따라 소주에서 세상을 떠났고 남은 선교사들도 말라리아에 시달리면서 힘을 잃어 갔다. 마테오 리치는 마카오로 가서 소주에서의 어려움을 알리고 새로운 선교구 개척이 필요함을 건의하였다.

만력 22년(1594년) 고향으로 돌아온 구태소는 인편으로 서신을 보내어 마테오 리치 일행 신부들이 소주(蘇州)로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4월(일설에는 5월) 때 마침, 북경으로 부임하던 조경 출신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 병부시랑 석모[石某]라는 기록도 있다.) 일행이 소주(韶州)를 지나갈 때 마테오 리치 일행도 배를 타고 동행 북상하였다. 석성은 일찍이 마테오 리치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었고, 그는 마테오 리치에게 원시(院試)에 낙방하여 상심한 22세인 그의 아들의 치유를 요청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아들을 데리고 강서성(江西省) 여행을 하면 그곳에서 정상적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하였고, 석성이 흔쾌히 이 건의를 받아들이고 여행증명서를 준비해 주어 동행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마테오 리치는 마카오에서 온 중국인선교사 약망(若望)과 석굉기(石宏基) 등과 함께 11년 동안의 광동(廣東) 생활에 이별을 고하면서 새로운 여정에 오르게 되었다.

 






사진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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