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새해부터 ‘경교비 해설’을 연재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경교비의 정식 이름은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로서 7세기에 경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크게 퍼진 것을 기록한 비입니다. 경교는 통일신라 시기와 고려 왕조 때 한반도에도 유입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이 글의 필자인 려용덕(呂容悳) 목사님(아호 漢江)은 도봉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이며, 〈한국교회신문〉을 발행하고 있는 언론인이기도 합니다. 또한 한학과 법학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 가운데 한 분입니다. 경교비는 려수암(呂秀巖)이 썼는데 려용덕 목사님은 려수암의 후손임을 자랑으로 여기며 한국경교학술연구회를 만들어 경교를 연구하고 널리 알리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들어가는 말
필자는 1980년대 초에 극동방송(사장 김장환 목사)에서 중국 기독교사를 여러 해에 걸쳐 방송한 일이 있다. 당시 방송 실무책임자는 유관지(劉寬之) 목사였다. 지금과 달리 당시는 중국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은 방송이 유일한 형편이었는데 유관지 목사는 이 일을 진두지휘하면서 중국에 복음을 전하려면 중국교회의 역사를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필자에게 그 방송을 부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때의 방송원고 가운데 경교에 관한 부분을 정리해서 필자가 발행인으로 있는 <한국교회신문>의 ‘율공(律公) 옹달샘’에 2000년 2월 13일부터 11회에 걸쳐 ‘600년대 중국기독교비(대진경교유행중국비) 감상’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였다. ‘율공’은 당시 필자가 사용하던 아호였다.
한국교회 안에는 경교(景敎)에 대해 관심을 갖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아시아 고대기독교사를 연구하는 이경운(李敬云) 목사(국제경교학술연구회 회장)을 비롯해서, 박영규(朴永圭) 목사, 침례교의 정학봉 목사, 이윤희 목사, 박정규 목사, 독일에서 목회하는 김신웅 목사 등이 필자를 찾아와서 경교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분들은 필자가 경교비를 세울 때 비문을 쓴 려수암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경의를 표하기도 하였다. 2012년 5월 서울에서 경교를 연구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학자들이 모인 가운데 ‘제3회 국제경교연구 한국학술대회’가 열렸는데 필자는 주최측의 요청에 따라 대회의 현판을 써서 전달하였다.

필자는 앞에서 말한 옹달샘의 글들을 정리하고 보충하여 2012년 4월 29일 자 〈한국교회신문〉(제848호) 4면과 5면 전체에 게재했는데, 웹진 〈중국을주께로〉의 요청에 따라 이를 다시 손질하여 여기에 연재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
필자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600년대 중국기독교비’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교(基利斯督敎’‘의 한자표기인데 그리스도교비라고 하지 않고 기독교비(碑)라고 한 것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기독교라고 표기하는 것을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리스도교라고 적는 일이 많을 것을 미리 말해둔다. 아시아 대륙 한복판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파되어 당(唐)나라 땅 한복판인 장안(長安)의 서남쪽 주지현(周至縣) 오군성(五群城)에 소재한 대진사(大秦寺) 경내에 덕종(德宗) 건중(建中) 2년(781년)에 흑(黑)대리석으로 그리스도교(敎) 비가 세워졌다. 경교비가 세워진 때는 경교가 중국에서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다. 이 비는 경교승(景敎僧) 막 예스부짓(Mag-Yesbuzid, 伊斯)의 제안에 의하여 유명한 학승(學僧)인 경정(景淨) 아담(Adam)이 기초하였으며, 종육품(從六品) 전행(前行) 대주사사참군(大州司士參軍) 려수암이 비문을 썼다. 비석의 머리 부분은 쌍용(雙龍)으로 장식되었고, 그 바로 아래 가운데는 십자가 표()가 있으며, 대진경교유행중국비라는 전서자(篆書字)로 된 큰 글자의 표제가 있다. 그리고 매행 62자, 총 1,870여 자의 한자(漢字)와 40여 자의 시리아 문자가 나열되어 있으며, 좌우 양측에는 경교 선교사 60여 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역사의 굴곡이 심해 외래 종교의 말살운동이 일어나자 이 비를 살리기 위하여 땅속에 묻었는데, 1621년 초 발견되어서 세계의 사학자들 간에 큰 관심사가 되었다. 이 경교비는 635년에 그리스도교가 동양에 전래된 사실을 입증하고 있으며, 경교의 중국 도래와 그 후 약 200여 년간의 중국 전토에 널리 유행 전파된 사실을 알려주는 세계사와 교회사에 귀한 자료가 되었다. 흥미 있는 일은 1917년 영국의 교회사학자 고든(E.A. Gordon) 박사에 의하여 원래의 비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 모조비가 우리나라의 금강산 장안사 경내에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이 경교비는 흑대리석이 아닌 백(白)대리석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수년 전에 서울시교시(敎市)협의회 사무총장 배성산(裵聖山) 목사가 한국신학대학동창생인 이인식(李仁植) 목사와 함께 한국교회신문사로 필자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이인식 목사는미국 시카고신학대학 상임이사이며, 코네티컷주에서 목회를 하면서 〈동양선교문화연구원〉를 세워 운영하는 학자인데 고향인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가유리에 있는 고삼교회 맞은편 달사원(達娑院)에 경교비와 똑같은 흑대리석 비를 세웠다.

▲ 이인식 목사와 안성에 세워진 경교비)
고고학자이며 교회사학자인 김양선(金良善) 목사가 경교비의 탁본(拓本)을 떠서 그가 설립한 한국기독교박물관(숭실대)에 보존하도록 했으며, 필자도 십수 년 전에 경교비문 탁본을 구해서 100만 원이 넘는 비용을 들여 족자를 하여 오동나무 궤에 담아 보관하고 있다. 이 경교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황청과 페르시아 교회의 네스토리우스파 간의 갈등과 중국에서 네스토리우스교를 경교라고 부르게 된 이야기, 경교가 당나라에 끼친 정치적·종교적 영향과 세계사에 미친 영향을 알아야 한다. 경교비문에 담긴 내용이 그것을 증언해 주고 있기에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이를 살피는 것은 의미가 큰일이 아니 할 수 없다. 다음 호에서는 ‘당나라 시절에 들어온 경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사진 | 바이두
려용덕 | 도봉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 문학박사, 법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