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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차
서론
Ⅰ. 종교 문제
1. 종교에 대한 물음: 중국에 종교가 필요한가?
1) 감정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2) 초월의식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3) 구원의 길로서의 과학
2. 기독교의 대안: 중국은 어떤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1) 신문화운동과 기독교
2) 중국 기독교인들은 신문화운동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가
3) 새로운 종교(新宗敎)의 건설
<‘종교 문제’에 대한 당시 몇몇 교회 지도자들의 논점>
<신종교 건립의 배경>
<신종교와 과학 사조의 관계>
<신종교와 민주 정신의 관계>
Ⅱ.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
1. 근대 기독교 복음 메시지에서의 변화
2. 그리스도 중심의 변증론(호교신학)의 등장
1) 예수의 인성(人性)과 그의 인격
2) 예수의 신성(神性)과 그 행한 초자연적인 기적들
3) 예수의 사역
4) 예수의 가르침의 현실적 합성
3. 신학적 평가
III. 기독교 신앙의 본색화 문제
1. 본색화를 위한 노력을 촉진했던 힘들
2. 오사운동 시기 지식인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태도들
3. 본색신학의 건설을 향해
중국적 기독교 곧 본색신학의 건설은 당시 중국 기독교인의 마음속에 있었던 두 가지 충성심과 관련된 임무였다. 즉 중국인으로서 자신의 문화적 전통을 잊어버릴 수 없었으며 동시에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배신할 수 없었으니 곧 기독교의 복음 메시지를 축소하지 않고 그대로 제시해야 했던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기독교 신앙의 본색화, 곧 본색신학은 그 두 가지 충성심 사이에서의 지적인 운동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어떤 이들은 중국의 전통적 가치들 중에는 기독교 윤리와 서로 충돌하는 지점들이 많이 있으며 따라서 본색화 작업에서 그것들 중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까 결정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이들은 양쪽 모두를 편안하게 느꼈다. 그들은 중국 문화에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으며 기독교와 유교는 동일한 진리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중국 기독교 지식인들은 민족 고유의 문화에 공감하지만 기독교를 그에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그러한 두 가지 입장들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즉 그들은 한편으로 모두 국수(國粹) 유산을 보존하기 원하였다. 즉 그들은 “안으로는 국적(國賊)을 제거하고, 밖으로는 강권(强權)적 세력에 저항한다.”라는 국가주의의 흐름 속에서 있었기 때문에 국고(國故)에 대한 열성은 애국(愛國)의 표현이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 전통 속에는 병폐도 매우 많으며 그것들을 가볍게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본색신학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복잡한 문제는 그것을 추진하는 동기(動機)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데 있다. 즉 궁극적으로 이러한 본색신학 건설의 노력은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에 의지하여 중국의 문화적 가치들을 보존하기 위한 것인가? 본색화의 양상들을 검토할 때 이러한 질문을 계속 반복하여 던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중국 문화는 무엇인가? 1920년대 중국 문화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조자신(趙紫宸)은 ‘문화(文化)’라는 용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명쾌한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이는 이후의 우리의 논의에 도움을 줄 것이다.
한 민족의 문화는 긴 세월의 경험과 사유와 훈련(節約)의 결과이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자연, 사회, 정신적 환경과 관계하면서 획득되고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생각들과 태도들과 습관들의 총합이다. 문화는 사회의 자아의식을 대표한다. 그것은 사회의 최상의 층면에서 표현될 때 가장 선명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아래 바닥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모호해진다. 그때 지식인들이 일반 다수의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마음의 소리를 표현하여 준다.1)
조자신은 문화와 문명(文明) 사이를 구별했다. 문화가 정신적인 것이라면 문명은 물질적인 것이다. 문화가 본체(體)라면 문명은 적용(用)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문명은 문화를 전제로 하며 문화를 표현한 것이다.2) 그와 비슷하게 위탁민(韋卓民)3)은 “문명은 자신들의 물리적 환경과 관계하면서 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한 민족의 성취들의 축적된 총합이다. 그리고 문화는 인간 각 개인들 속에 체현된 문명의 정신이다.”라고 말했다.4) 그러나 대다수의 기독교 지식인들은 그와 같은 구분을 하지 않았으며 두 용어를 구별 없이 호환하여 사용하였다. 당시 보통의 중국 지식인들은 모두 유가(儒家)의 전통사상을 중국 문화의 주류로 여겼다. 노자(老子)와 묵자(墨子) 학파는 결코 사람들의 중시를 받지 못하였으며, 불교와 도교는 비록 그것이 평민 대중들의 종교적 경험 속에서는 매우 인기가 있었을지라도 일반적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유교만큼 큰 지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다.5) 그러므로 이 시기 대부분의 본색화 문헌들은 모두 유가사상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였다.
동양과 서양 사이의 문화적 관계들에 대한 당대의 토론 기간 동안 대부분의 중국 기독교인들은 채원배 혹은 양계초와 같은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동쪽으로 가자’를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복한 기독교는 서양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서쪽으로 가자’고 외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반(反)기독교운동 시기의 국가주의의 높은 물결 속에서 기독교는 외국의 것이며 원수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마음은 일종의 모순 속에서 배회하였다. 한편으로 국가주의의 흥기는 오히려 전통 문화의 해체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며,6) 다른 한편으로 중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수호하기 위해, 기독교를 반대하는 각계의 인사들을 향해 기독교 신앙이 결코 조국을 배반하는 매국적 문화가 아니라는 변증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신학의 본색화 작업에 미친 이러한 모순된 심리의 유·무의식적 영향은 매우 분명하다. 실행가능한 해결책은 비판적 태도를 가지고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며 동시에 신중하게 기독교를 접합시키는 동감적 비판(a sympathetic criticism)을 하는 것이었다. 많은 기독교 지식인들은 비록 그 여행 중에 기착한 역은 서로 달랐지만 본색화를 향한 길에서 이 노선을 채택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본색화인가? 이 시기에 나온 방대한 기독교 저작들 속에서 우리는 중국교회의 본색화운동의 입장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보편적 정의를 발견할 수 있다. 본색화는 전통적인 관습과 실천들을 모방하는 고대 문화로의 후퇴 즉 복고(復古)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어떤 형태의 반외세주의를 추종하면서 서양과의 협력을 꺼려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본색화를 과거 서구 기독교의 풍부한 기독교적 경험과 전통을 포기하고 오직 중국 문화와 결합된 새로운 기독교를 건설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또한 잘못이다. 그것은 현대의 한 기독교 학자가 말한 것처럼 말도 아니고 당나귀도 아닌 어떤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7) 기독교는 문화적 상황 속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 어떤 특정 문화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8)
본색화의 문제에 대한 성정이(誠靜怡)의 견해에 따르면, “어떻게 기독교를 중국인들의 필요에 적합하게 만들 것인가? 어떻게 기독교 사업을 중국의 관습과 환경과 역사와 사유 그리고 그들 마음속에서 수천 년간 응결된 파괴할 수 없는 결정체로의 중국 문화와 융합(accommodate)시킬 것인가?”9) 하는 것이다. 본지(本地)의 신도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교회 생활에서 재정, 행정, 사상의 각종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서양 교회로부터의 배움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조자신에 의하면 본색교회는 중국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와 중국의 고대 문명 속에 담겨 있는 모든 진리들을 보존하고 통합하며, 그래서 자신들에 자연스럽고 고유한 본지의 방식으로 기독교의 생명과 경험을 선포하고 표현하기를 힘쓰는 교회이다.”10) 그와 유사하게 유정방(劉廷芳)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외부로부터 들어온 선물로 받았으므로, 반드시 그들 스스로 그 복합체로부터 기본적 요소들을 추출해내고 자신의 민족과 국가의 역사와 경험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힘입어 새롭게 배합하여 자신의 교의(敎義)라고 할 수 있는 중국 본색의 기독교 교의를 이루어야만 한다. 교회의 전장(典章, 문헌), 의절(儀節), 예식(禮式), 조직 등도 모두 그와 같이 해야 한다.11)
기독교는 서양으로부터 이식(移植)해 온 것이므로 그 후에는 반드시 본지에 뿌리를 내리고 중국 문화의 자양분을 흡수하고 중국 민족의 정신과 심리에 적합하게 지역적으로 성장해 가야 한다.12)
이상의 몇몇 정의(定義)로부터 우리는 이 시기 신앙의 본색화 작업이 당시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극히 주시(注視)를 받고 있었으며 실로 당시의 급선무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본색화운동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회의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실로 극히 드물었다. 문제는 ‘왜 본색화를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13) 이 시기의 본색신학 사상의 동태를 자세하게 분석해 볼 때 우리는 몇 종류의 본색신학의 모형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들 사이의 분별은 비록 절대적으로 선명한 것은 아니며 그것들 사이에 중첩된 부분도 있지만, 그 각각이 강조한 논점은 같지 않으며, 그것은 그것들이 신학 건설에서 그리고 기독교와 문화 사이의 관계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가지고 있던 차이를 반영한다.
1) 중국 문화 속에 기독교 신앙이 선재하여 있다는 입장: 진리의 동일성
본색신학의 노선을 걸어간 이들은 중국 전통 문화, 특히 유가사상에 대한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오사 시기의 신사조운동(新思潮運動)의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유가사상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분명히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기독교에 대한 충성을 공적으로 고백하였지만 그것이 그 고대 전통에 대한 그들의 정서적이고 지적인 결합을 약화시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는 그들에게 신사조운동의 격랑 속에서 전통 문화의 가치를 옹호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비록 때때로 어느 것이 더 상위인지 말하기 어려웠지만 둘 사이의 충돌을 빚지 않고 이중의 충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연히 그들이 보기에 기독교와 중국의 고유 문화 사이에는 조금의 충돌도 없었으며, 설혹 긴장의 영역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그것들의 존재를 무시해버리거나 혹은 그것을 해소할 길을 찾아내었다. 그들의 신념에 의하면 자국인 중국의 유산은 훌륭하며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계속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의 가치가 보존되어야 하는 것은 그것들이 중국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온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를 중국 문화의 우수한 유산을 대체할 수 있는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종교가 아니라 진리를 찾아가는 노정에서 서로 협조하고 계발에 도움을 주는 동반자로 보았다. 기독교와 중국 문화는 서로서로를 풍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만약 중국 문화의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을 해석한다면 기독교 교의와 전통 관념 사이에 일치하는 요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유형의 본색화 노선을 취한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이 연경대학(燕京大學) 교수 오뢰천(吳雷川)이었다. 그는 국학(國學)의 훈도를 깊이 받아 매우 강한 유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에 정통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수재(秀才), 거인(擧人), 진사(進士)의 자격을 얻었으며, 한림원(翰林院)에 임직하였다.14) 그는 1936년 자신의 매우 체계적인 저작인 《기독교와 중국 문화(基督敎與中國文化)》를 내놓기까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본색신학의 창조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기독교가 신중국(新中國)의 건설을 도울 수 있으며 본색교회운동은 시대의 요구에 정확히 부응하는 것으로서,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조국의 학술, 예의(禮儀)와 풍속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본색화운동을 추행(推行)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오뢰천에게 기독교의 본색화는 중국에서 기독교가 발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에 바쳐진 잡지인 《진리주간(眞理週刊)》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대중 종교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어 갈 때, 만약 지역 문화와의 상호 흡수와 적응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물론 대중 종교는 또한 어떠한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한계도 가지지 않는 세계 종교로 여겨질 수 있지만) 그것은 진보하고 발전할 수 없다. 그것은 식물을 옮겨 심는 것과 같다. 만약 새로운 환경의 토양과 기후가 적합하지 않다면 비록 인위적인 수단들을 통하여 일시적으로 영양을 공급받는 것은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의 씨앗의 성장은 장기간에 걸쳐 번성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원래의 성질을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15)
더 나아가 그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다.
우리는 기독교가 중국을 재건할 것을 안다.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중국의 학술적 전통에 대한 철저한 인식 및 그것과의 동화(assimilation)가 필요하다. 다음, 본색교회의 건립은 각 시대의 필요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眞理週刊》은 장래에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는 것과는 별도로, 본색교회를 위한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가 기독교적 관점으로부터 중국의 문헌과 의례주의와 관심들을 비판적으로 연구하게 되기를 희망한다.16)
오뢰천의 본색화의 신학적 전제는 진리의 근원들의 동일성에 놓여 있다. 진리는 하나이며 그것의 표현들이 다수라는 것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기독교와 유교는 각자의 배경과 문화에 따른 동일한 진리 곧 도(道)의 서로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기독교의 진리들이 과학과 철학의 진리들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 나는 특별히 기독교의 근원과 다른 종교들의 근원 그리고 심지어 모든 사유 체계의 근원이 하나이며 모든 종교들과 사유 체계들은 그 큰 기초에서는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적절한 미래의 어느 시점에 모든 지류들과 큰 강들이 바다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17)
기독교가 유가사상을 흡수하든지 혹은 유가사상이 기독교를 용납하든지 간에 이 참된 도(眞道)가 언젠가는 중국에서 열매를 맺어 광대하게 빛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점에 따른다면 기독교의 유일성과 최종적 권위는 오뢰천의 사상 속에서는 차지할 자리가 없었다. 그의 본색신학 방법은 순수하게 기독교와 중국 문화 사이를 연결하는 한 가닥 길을 구하여 보려는 시도였다. 많은 기독교의 관념과 중국 고대 성현의 유훈은 이름은 다르지만 실상은 동일한 것이며, 중국 문화는 마땅히 기독교를 자신이 전통의 가치를 건립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로 보아야 하며 그 사상에서 길가의 낯선 사람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뢰천에게 중국 문화의 주류는 유가였다. 그것은 주로 맹자(孟子)와 순자(荀子)의 전통을 통해 전수된 것으로서의 공자(孔子)의 교의들을 구현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교에서도 그리고 기독교회에서도 도는 모호하게 되었으며 왜곡되었다. 그것의 참된 표현을 회복하는 길은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다. 오뢰천의 접근은 초기의 인물들에게 돌아가서 그들의 원래의 가르침들을 검토하는 것이다. 그는 많은 기초적인 기독교의 개념들이 중국 성인들의 가르침 속에 이미 그것들의 고전적인 대응물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았다.18) 그리고 중국인들은 기독교를 이데올로기적 외국인으로서 보기보다는 자신의 문화의 가치를 변호해 줄 한 마음의 친구로서 환영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오뢰천의 마음속에서 기독교와 유교의 신(神) 개념 사이에는 어떠한 충돌도 없었다. 기독교의 신관(神觀)은 우주 만물을 초월하고 주관하는 하늘의 최고의 주(主)로서 상제(上帝)이며, 그는 또한 모든 인류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天父)이며, 그래서 모든 인류는 일종의 가족애를 나누는 한 형제지간으로 연합되어 있다.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는 ‘천(天)’이라는 말 외에 또한 ‘상제(上帝)’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 순자의 말과 글 속에서는 천이 대부분 사용되었다. 오뢰천에 따르면 춘추(春秋)시대(B.C.722∼B.C.481)에 중국의 지식인들은 당시의 사상적 조류에 영합하여 신성(神性)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었으며, 천을 사용하여 자연계를 관리하는 지혜와 힘, 의지와 이성을 가진 신이라는 관념을 표현하였고, 인격적 의미를 지닌 상제라는 용어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19)
창조의 역사에 대해 토론하면서 오뢰천은 《성경》의 창세기 1-2장과 《중용(中庸)》의 이론을 비교하였다. 《성경》은 상징적인 언어를 채용하여 신이 어떻게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했는가 하는 것을 인간의 콧구멍 속으로 생명을 불어 넣은 것으로 묘사하였으며(창세기 2:7), 《중용》 제1장에도 자연계의 형성은 천명(天命, 하늘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 하였다. 오뢰천은 그것을 12세기의 유명한 신유학자(新儒學者)인 주희(朱熹)의 해석에 따라 만상(萬象)의 창조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운동, 즉 두 가지 양태의 우주적 힘인 음(陰)과 양(陽)에 우주적 역동성을 이루는 ‘다섯 가지의 능동적인 수행자들’을 더한 것에로 소급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의지와 이성(지혜) 또한 천명에 의해 부여된 것이다. 인간의 영역에서 천명에 의해 부여된 ‘본성’은 합리성과 도덕성이라는 선물이며 그에 따라 사회적 질서가 생겨난다. 이런 방식으로 오뢰천은 창세기의 창조론을 실로 중국의 고대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20)
선지자의 예언에 관한 연구에서도 오뢰천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사야의 메시아 강림 예언(이사야 11:1-10)은 마치 《중용》 제31장에서 자사(子思)가, 장차 성인(聖人)이 일어나 화평과 공의(公義)로 만민을 통치할 것이라 말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두 기록 모두 정치적 불안정이 사람들로 하여금 상황을 바로잡아 줄 구원자를 기대하도록 자극했던 위기의 때에 쓰였다. 그래서 《중용》의 그 장을 집필한 자사와 이사야는 동일한 생각을 나누었으며 심지어 그 표현 양식마저 비슷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사야는 예언자였지만 중국인들에게 자사는 낙관적인 이론가였다. 그들 사이의 전망의 차이는 그들 각자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에 기인한 것이다. 오뢰천에 따르면 예수의 메시아적 자기인식은 과거 중국의 위대한 성인들 사이에서도 없었던 것이 아니다. 많은 중요한 개인들이 그러한 인식을 소유하였고 또 표현하였다. 그것은 중국 역사상 흔한 모습이었다. 예수는 그 자신이 신의 뜻을 행하며 진리를 증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요한복음 18:37;5:17). 오뢰천의 해석에 따르면 맹자도 또한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백 년 안에는 왕다운 인물이 일어나야 하며 그와 같은 기간에는 어떤 유명한 인물들도 나타날 것이다. (……) 만약 하늘이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리기를 원하지 않지 않는다면 말이다. 만약 하늘이 이 시대에 그러한 통치를 원한다면 나를 제외하고 다른 누가 그것을 만들어낼 것인가?21)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뢰천은 유가사상의 핵심적 가르침인 인(仁)을 기독교 삼위일체 신론 중의 성령(聖靈)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유학자들이 인의 도리에 대해 강론할 때 그들은 정신 생명의 중요한 부분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어떤 영적(靈的)인 측면이 내재해있다. 그는 우리가 그 아름다운 덕성이 온 세상에 충만하도록 인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2) 마치 그 옛날 공자가 그의 제자 안연(顔淵)에게 “예(禮)에 맞게 자기를 극복하고 절제하는 것이 인이다. 이 가르침을 날마다 실행할 수 있다면 하늘과 땅이 인에 의해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과 같다.23) 이것은 곧 사람들을 감화하고 계도하여 하나님의 나라(天國)로 인도하는 성령의 사역과 동일한 것이다(마태복음 12:28).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에 복종할 때 하나님의 나라의 평화로운 통치는 멀지 않다. 오뢰천은 “인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만약 인이 인간 사회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존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의 마음속에 있다“라고 말씀한 것이다.”24)
오뢰천의 본색신학상의 노력은 단지 유교사상과 기독교 신앙을 혼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사상적 혼합물을 탄생시키고자 한 것은 결코 아니며, 또한 오래된 과거의 가르침들을 위한 현대의 시장(연관성)을 찾으려는 시도인 것도 아니었다. 오뢰천은 유교사상 자체의 가치를 받아 들였으며 그것이 중국 사회에 대해 가지는 심장(深長)한 의의를 확신하였다. 그러나 오뢰천의 기본적이고 최종적인 관심은 과거를 추수(追隨)하는 데 있지 않았고 중국의 앞날을 위해 출로를 모색하는 데 있었으며, 당시의 혼란하고 불안한 사회 국면을 변화시키는 데 있었다. 사회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이 긴급하고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 옛날 예수는 아름다운 모범을 보임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건립하는 순서를 제시하였다. 사회적인 개혁은 인간 삶의 보편적인 원리이며 예수가 그의 사역에서 밀접하게 좇았던 목표였다. 아낌없는 헌신과 봉사야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방법이다. 유가가 강조하는 위대한 조화(大同)가 천하(天下)에 실현되기까지 자아 수양에서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교육 과정 중에서 마찬가지의 일관된 도리와 동일한 이상(理想)이 발견된다.25) 오뢰천이 기독교를 중국 문화와 연결하면서 보여 준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정신은 확고한 것이었다. 국가는 재건되어야 하며 사회는 마찬가지로 개혁되어야 한다. 오뢰천의 본색화는 자신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폐허 위에 새로운 중국을 창조하기 위해 유교의 과거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앞을 바라보고 나가는 것이었다. 예수는 인간 역사에서 그러한 개혁의 최상의 모범과 원리를 제공해 주었으며, 유교의 성인(聖人)들은 그러한 사업에 대한 고전적인 승인을 해주었다. 기독교와 유가사상은 공동으로 이러한 신성한 사명의 지지자(支持者)요 찬조자(贊助者)가 되는 것이었다.
2) 문화들의 조화와 융합을 모색하는 입장
본색신학을 모색하는 두 번째 접근 방법은 기독교 신앙과 중국 문화 사이의 조화 가능성을 강조하고 둘 사이의 융합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융합이란 결코 전통 중국 속의 약점에 대해 소극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다른 이데올로기와 타협하기 위해 자신의 문화적 특성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왕치심(王治心)26)의 이해에 따르면 문화는 비록 어떤 한 국가 혹은 민족을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전리품이 아니며 그것에 의해 독점될 수 없는 세계 전체의 자산이다. 그리고 그것 자체는 영원토록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문화와 상호 교류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역사상에는 문화 교류를 통한 상호 흡수와 동화의 예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서양 문명은 그리스 로마와 히브리 문명 사이의 접촉으로 말미암은 산물이다. 송·명(宋明)시대의 신유학(新儒學)은 유가사상이 불교와 도가사상의 철리(哲理)를 흡수하여 나타났다. 왕치심은 기독교는 하나의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문화체계로서 서양이든 동양이든 어떤 문화 전통이나 용납하고 융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왕치심은 또한 그와 같은 융합의 가능성은 예수의 말씀 속에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예수께서는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한복음 10:16)라고 말씀하셨다. 왕치심은 중국을 장래에 선한 목자의 양 무리에로 인도될 한 마리 우리 바깥의 양이라 생각했다.27) 그의 신학 본색화 노력은 그가 주장한 세계적이고 보편적 성격을 가진 기독교 문화관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는 바로 세계 각처의 다양한 문명들 사이에 문화적 통합을 가져 올 수 있는 하나의 문화적 접촉점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그러한 그의 비전은 민족주의적 취향에 의해 조절되었다. 왕치심의 논점에 의하면 본색교회는 “중국 민족의 특성들과 유산” 위에 건립되어야 한다. 또한 본색화 저작들은 반드시 민족적인 특징과 의식을 반영하여서 민중의 에토스와 심리에 적합하여야 하고 동시에 전통적 사상과 도덕관념에 대해 정리하여야 한다. 그것은 중국 사상을 소화 흡수함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윤리적 전통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28)
왕치심은 공자를 중국 사상의 대표로 여기고 기독교와 유가사상의 가르침 사이의 문화적 친연성(親緣性)을 발견하려고 시도했다. 기독교 신앙을 본색화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기독교 신앙과 유가사상을 조화시켜야만 한다. 화합이라는 목적에 봉사할 수 있는 두 체계 내의 공통점은 ‘중도(中道)’ 혹은 조화로운 융합을 의미하는 ‘조화(調和)’에 대한 강조이다. 왕치심은 양수명(梁漱溟)의 주장에 찬동하여 중국 민족의 정신이 조화의 정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양 문명은 물질적이고 동양 문명은 정신적이라는 견해는 거부하였다. 유교의 교의들은 두 가지 측면의 부드러운 결합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유가에서 ‘군자(君子)’ 곧 탁월한 인간이 되는 데에는 외적이고 물질적인 배움과 내적이고 정신적인 사유가 똑같이 강조되는 것이다.29) 유교 전통에서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유는 학문적인 훈련을 받아야 하며 행동은 예에 따라 절제되어야 한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論語》〈雍也〉). 왕치심은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신체와 정신의 연합에 주의를 기울인다고 주장하였다. 예수는 산 위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으나 산 아래 마을에서는 병든 자들을 돌보셨다. 그는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에게 최고의 영적인 교훈을 가르치셨으나 또한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셨던 것이다.
왕치심은 계속해서 유교사상은 공자 자신의 삶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보수적이고 진보적인 요소들을 둘 다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공자는 빈궁하다고 해서 결코 불만을 가지지 않았으며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포부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당시의 지배자들에 의해 등용되기를 구하면서 나라에서 나라로 여행하였다. 이는 일종의 중도의 원칙을 표명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중도를 놓치면 우리는 너무 공격적이거나 전적인 무위(無爲)라고 하는 극단에로 갈 수 있다.”30) 마찬가지로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의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죄악의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서는 안 되며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들은 스스로 세상에 속하되 그것에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이것도 또한 중용(中庸)의 도이다. 이렇게 중도의 정신은 두 체계 모두의 가르침을 관통하고 있으며 기독교 신앙과 중국 문화 사이의 조화를 위한 관건을 제공한다.
왕치심의 관찰에 따르면 중국 전통 문화는 그 주된 관심이 윤리(倫理)에 있으며 효도(孝道)를 기초로 삼고 있다. 《효경(孝經)》에서 말하는 것처럼 “효(孝)는 부모에 대한 봉양(奉養)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아의 수양(修養)으로 마친다.”31) 효는 삶의 모든 측면을 채운다. “거처함에 장중하지 않으면 효가 아니며, 임금을 섬김에 충성스럽지 않은 것도 효가 아니다. 관직에 임하여 경건한 태도를 취하지 않아도 효가 아니며, 친구들에게 신실하지 않은 것도 효가 아니다. 전쟁에 임하여 용맹하지 않은 것도 효가 아니다.”32) 왕치심은 종교의 각도에서 본다면 효는 중국인의 종교이며 부모는 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왕치심의 논증에 의하면 또한 기독교는 만약 적절하게 이해된다면 효의 가르침에 대립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는 문화적 배경상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유대 문화에서는 종교가 그 중심이다. 그래서 신은 첫 번째 전제이다. 중국 문화에서는 윤리가 그 중심이다. 그래서 부모가 첫 번째이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신을 아버지로 보는 반면 중국인들은 부모를 신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서로 같다.”33) 부모에 대한 사랑(孝順)을 통해 신에 대한 우리의 사랑(尊敬)을 보여줌으로써 조화는 실현된다. 마치 예수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것을 핑계로 그들의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마가복음 7:11)과 같다. 이것은 예수의 윤리와 공자의 효도 사이에는 어떠한 충돌도 없는 것이다.
인과 의(義)의 가르침에 대해 논하면서 왕치심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기독교 교의 속에서 유사한 부분들을 찾았다. 그는 인과 의를 각각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타인에 대한 사랑 및 자기에 대한 사랑과 동일시하였다.34) 맹자는 일찍이 묵자가 주장하는 모두를 포괄하는 사랑(兼愛)을 인의 극단이라 하여 거부하였고, 양주(楊朱)의 자기중심적 관심(爲我)을 의의 극단이라 하여 거부하였다.35) 점진적이고 차별적인 사랑을 가르친 맹자의 가르침에 인과 의 사이의 조화가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에서 사랑과 진리의 균형이 예수의 다음과 같은 말에 체현되어 있다. “너에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 그리고 동시에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36)
문화적 조화와 융합을 주장한 또 한 사람의 지도자는 《청년잡지(靑年進步)》의 편집자 범자미(范子美)37)였다. 본색화에 대한 범자미의 확신은 기독교는 원래 동양 종교였기 때문에 그것의 동양적 요소는 중국 문화로부터 우호적인 반응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는 그의 믿음에서 유래하였다. 물론 범자미는 왕치심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와 중국 민족의 종교적 경험 사이의 차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중국 전통에서의 신 관념을 분석하면서 중국인의 종교적 관점이 기독교의 신 개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신에 대한 중국인의 자연주의적 견해는 신성한 인격에 대한 기독교의 강조를 거부할 것이다. 중국 민족의 인본주의는 기독교 예배의 신비한 측면과 동화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다신론(多神論)적 배경은 기독교의 유일신론(唯一神論)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38) 범자미의 본색화 프로그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원래의 형태와 유교 정통의 왜곡되지 않은 가르침 사이의 조화와 융합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것이었다.39) 이러한 방식으로 양자의 최상의 것 사이의 비교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범자미의 견해에 따르면 기독 종교와 중국 전통은 ‘약자(弱者)’의 문화이다.40) 둘 다 힘보다는 덕(德)을 높이며 폭력보다는 평화를 높인다. 중국 민족의 역사는 야만적인 침입자들이 중국의 도시 문화의 ‘영향력’에 의해 중국 사회에 동화되어 간 실례들로 가득 차 있다. 인, 의, 충(忠), 서(恕)에 대한 유교적 가르침은 평화를 사랑한다고 하는 중국인의 정치적 견해에 기초를 놓아 주었다. 예수의 삶은 끝내 ‘강자’를 이기고 마는 그러한 ‘약자’의 성질의 유사한 표출이었다. 당시의 민족적 위기 속에서 범자미는 세계를 상호 적대와 착취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평화를 지향하는 두 문화 사이의 협력을 주장하였다.41)
범자미는 유교를 그 기초에서 윤리적인 중국 문화의 정통 대표로 여겼다. 그는 비록 그 문화적 유산의 종교적인 부면이 기독교의 유일신론과는 충돌하는 것이었지만 윤리적 영역에서의 사랑과 봉사의 가르침에는 표현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치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유교는 충, 서, 효, 제(悌)를 가르친다면 기독교는 사람들 사이의 형제애와 하나님의 나라를 장려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교의들은 유교의 도덕성을 더욱 ‘단순하고 친밀하게’ 만들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42) 중국 윤리는 그 틀에서 인본주의(人本主義)적이며 그리고 연역적인43) 방식으로 가족애를 친구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나아가 사물들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시켜 간다. 기독교 윤리는 그 틀에서 신본(神本)적이며 그리고 포괄하여 가는 방식으로 인간과 자연을 포용한다.44) 사람들 사이의 형제애에 대한 가르침은 신의 아버지성에서 도출된다. (하지만) 사랑과 봉사의 실천에서는 두 체계 사이의 차이는 거의 관찰되지 않는다. 한편 기독교에서의 형이상학적 강조는 인간관계에서의 윤리적 의무를 명료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보았다. 범자미는 유교가 비록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종교라기보다는 도덕 철학이라고 생각했다.45)
범자미는 유교적 전통 속에 있는 문화적 낙후성과 그에 대한 즉각적인 갱신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 역사는 순환적인 과정을 거친다고 믿었으므로 -그것은 일종의 결정론의 색채를 지닌 생각이었는데- 중국 문화의 미래에 대해서는 낙관적이었다. 현재의 문화적 몰락은 장래에 혁신을 가져오게 될 것이며 거기에 기독교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범자미는 기독교가 “이천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시들고 식어가는 윤리적 교의들에 새로운 생명을 회복시켜줄 열정적인 정신”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했다.46)
왕치심과 범자미와 같이 문화적 조화와 융합을 옹호하는 자들은 중국 문화에 대한 자신들의 편애를 감추지 않았다. 그들이 기독교의 관념들과 유가의 이론을 결합하려고 노력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유구한 문화유산 속에서 가치가 풍부한 내용들을 찾아냄으로써 서구 사조들의 충격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우뚝 서서 문화의 정화를 보존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그들은 전통의 생존을 위한 보장책으로서 정통 유교 중 최상의 것들에 매달렸다. 문화적 조화에 대한 그들의 노력은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중국 전통의 이론을 지지할 수 있는 근거들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중국 문화는 프로그램 내에서 동등한 파트너였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최종적인 목적은 기독교의 도움을 얻어 전통의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들의 본색신학 작업은 또한 기독교와 중국에 대한 그들의 이중의 충성을 동시에 유지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신들이 ‘중국 기독교인(Chinese Christians)’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미주
1) T. C. Chao(趙紫宸), "Our Cultural Heritage", in China Her Own Interpreter, ed. M.T. Stauffer (New York: Missionary Education Movement of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1972), p.1.
2) 趙紫宸, 〈基督敎與中國文化〉, 《眞理與生命》 제2권 제9-10기 (1927), pp.247-260. 그리고 그의 후기의 좀 더 포괄적인 저작인 《基督敎進解》 (上海: Association Press of China, 1947), pp.36-40을 참조.
3) 韋卓民(Wei Cho-min, Francis Wei)은 1888년에 태어났으며 전통적인 중국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1911년 武昌의 博文書院(Boone University)를 우등으로 졸업하였으며, 1915년 맹자의 정치 원리에 관한 논문으로 M.A.를 받았다. 그는 1918년 Harvard University에서 공부하였으며 1919년 철학 방면에서 M.A.를 받았다. 박사과정을 마치지 않고 중국으로 돌아갔으며 博文書院에서 가르쳤다. 1924년 武昌에 華中大學이 설립된 후 과학과 예술 대학의 학장이 되었으며 행정부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잠시 영국으로 떠나 1929년 London University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후 그는 새롭게 문을 연 華中大學의 총장으로 일했다. 華中大學은 중국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헌신된 학교였다. 그의 저작들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1947년 출간된 Hewett lectures 시리즈의 하나인 The Spirit of Chinese Culture 이다. Boorman, Biographical Dictionary 3, pp.403-405 참조.
4) Francis C. M. Wei(韋卓民), The Spirit of Chinese Culture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47), p.3.
5) 예를 들어 范子美, 〈中國倫理文化與基督敎〉, 《東西文化之一貫》 (上海: 中國聯合出版, 1925), p.5. 趙紫宸은 중국의 삶의 철학은 주로 유교적이며,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으로부터 발원하여 뒤에는 도교나 불교와 같은 다른 철학 학파들의 요소들을 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趙紫宸, 《基督敎進解》, p.41.을 보라. 韋卓民도 또한 “유교는 전형적으로 중국적이기 때문에 중국은 철저하게 유교적이다. (……) 그것은 중국 민족의 문화이다.”라고 말했다. Francis C. M. Wei, The Spirit of Chinese Culture, p.94.
6) Joseph R. Levenson, Confucian China and Its Modern Fate: A Trilogy (Berkeley and Los Angels: University of California, 1968), p.105.
7) 誠靜怡, 〈本色敎會之商榷〉, 《文社月刊》 제1궈 제6책 (1926년 5월), pp.1-17.
8) 劉廷芳, 〈爲本色敎會硏究中華民族宗敎經驗的一個草案〉, 《眞理與生命》 제1권 제7기 (1926년 8월), p.187.
9) 靜怡, 〈本色敎會之商榷〉, 《文社月刊》 제1권 제1책 (1925년 12월) pp.9-10.
10) T. C. Chao(趙紫宸), "Indigenous Church", The Chinese Recorder 56 (1925년 8월), p.497.
11) 劉廷芳, 〈爲本色敎會硏究中華民族宗敎經驗的一個草案〉, p.186.
12) Cf. 王治心, 〈本色敎會與本色著作〉, 《文社月刊》 제1권 제6책 (1926년 5월), pp.1-17.
13) 다음에 분석하여 제시하는 본색화의 유형들이 모두 독자적이고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두어야 한다. 이 분석은 당대 중국 기독교인들이 본색화 문제와 씨름하면서 행한 다양한 강조점들에 기초한다. 어떤 것들은 서로 겹쳐지는데 특히 동일한 聖經 구절이 인용되며 유사한 儒敎의 가르침들이 논의된다.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를 중국 문화에 연결시키는 신학적 전제들과 접근들은 서로 다른 강조점들에서 긴밀하게 반영되어 있다.
14) 趙紫宸, 〈吳雷川先生小傳〉, 《眞理與生命》 제10권 제8기 (1937년 1월) p.418.
15) 吳雷川, 〈基督敎與儒敎〉, 《眞理週刊》 제1권 제43기 (1923년 1월 12일).
16) 吳雷川, 〈本週刊週年紀念敬告讀者諸君〉, 《眞理週刊》 제2권 제1기 (1924년 3월 30일).
17) 吳雷川, 〈我對於基督敎會的感想〉, 《生命月刊》 제1권 제4기 (1920년 11월), pp. 3-4. 이 글은 T. C. Chao에 의해 "Problems of the Christian Church in China: A Statement of Religious Experience", The Chinese Recorder 52 (1921년 2월), pp.101-102.로 번역되었다.
18) 吳雷川, 〈從儒家思想論基督敎〉, 《眞理與生命》 제4권 제13기(1930년), pp. 3-6.
19) Ibid., pp.5-6.
20) 吳雷川, 〈基督敎經與儒敎經〉, 《生命月刊》 제3권 제6기 (1923년 3월), pp.1-6.
21) 吳雷川은 이것을 《孟子》〈公孫丑下〉에서 인용하였다.
22) 吳雷川, 〈基督敎與中國文化〉, pp.57-58.
23) 吳雷川은 이것을 《論語》12〈顔淵〉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에서 인용하였다. 吳雷川, 〈基督敎經與儒敎經〉, pp.3-5.를 보라. (역주: 《논어》 본문 번역은 이 책 영문판의 번역에 따른 것이다.)
24) 吳雷川, 〈基督敎與中國文化〉, p.57.
25) 吳雷川, 〈從儒家思想論基督敎〉, p.8.
26) 王治心은 1881년 浙江에서 태어났다. 전통 교육의 훈도를 깊이 받았고, 淸朝의 附生을 지냈다. 그는 1913년에서 1918년까지 Christian Advocate의 중국어판인 上海 《興華報》를 편집했으며, 1921년 南京 金陵神學院의 중국철학 교수가 되었다. 1926년에서 1928년까지 그는 Christian Literature Association의 《神學誌》 편집주간이었다. 그는 1928년에서 1934년까지 복건 크리스천대학의 예술대학 학장을 지냈다. 그 후에 그는 上海大學 중문과의 주임교수로 일했다. 그는 많은 중요한 책들을 집필했는데 그중에는 《中國學術源流》, 《三民主義在中國文化之根據》, 《孔子的哲學》, 《中國歷史的上帝觀》, 《本色敎會組織法草案》 등이 포함되어 있다.
27) 王治心, 〈中國文化與基督敎融化可能中之一點〉, 《中國文化與基督敎》 (上海靑年協會, 1927), pp.1-9.
28) 王治心, 〈本色敎會與本色著作〉, 《文社月刊》 제1권 제6책 (1926년 5월), pp.1-5.
29) 王治心은 《論語》〈爲政〉에서 “생각함이 없이 배우기만 하면 혼미하게 되고, 배움 없이 생각하기만 하면 무익하게 된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그의 〈中國文化與基督敎〉, p.4.를 보라. (역주: 번역은 이 책의
30) Ibid., p.9.
31) 王治心, 〈基督敎與中國文化〉, 《眞光雜誌》 제26권 제6기 (1927년) pp.1-3.
32) Ibid., pp.1-3. 王治心은 이것을 《大戴禮記》〈曾子大孝〉에서 인용하였다.
33) Ibid., p.3.
34) 王治心에 따르면 ‘타인에 대한 사랑’은 고린도전서 13:1-2에, ‘자기에 대한 사랑’은 고린도전서 13:4-7에 서술되어 있다.
35) 王治心, 〈中國文化與基督敎融化可能中之一點〉, p.6.
36) Ibid., p.7.
37) 范子美(T. M. Van)는 1866년 蘇州生으로, 1893년 擧人이 되었고 變法運動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0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林樂知(Young J. Allen)을 만나 서양의 과학기술(西藝), 정치제도(西政), 기독교(西敎)를 소개받았고 1902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20년대에 기독교 문학계에서 이미 유명하여 ‘儒者基督徒’라고 불렸다. 그는 《萬國公報》의 공동 편집자였으며, 또한 《進步雜誌》의, 후에는 《靑年進步》의 편집자였다. 그의 저작으로는 《東西文化之一貫》, 《非基督敎》, 《非宗敎論》 등이 있다.
38) 范子美, 〈中國古代上帝觀〉, 《東西文化之一貫》, p.56.
39) 范子美, 〈中國倫理的文化與基督敎〉, 《東西文化之一貫》, p.1-2
40) 니체의 윤리학적 견해에 의하면 약자는 강자에 비해 열등하며, 기독교는 전자(약자)에 속한다. 범자미는 니체적인 의미에서 ‘약자’와 ‘강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당대 독일과 역사적인 중국 사이를 비교함으로써 그러한 윤리학은 거부하였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월한 것은 오히려 ‘약자’라는 것이다. 范子美, 〈和平性質的中國文化與基督敎在現世界之合作〉, 《東西文化之一貫》, pp.20-38.
41) Ibid., p.38.
42) 范子美, 〈中國倫理的文化與基督敎〉, p.13.
43) (역주) 여기 해당 본문은 중국어본에는 없다. 일단 영어본 원문에서 ‘deductive’라고 한 것을 따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아마도 보편적 명제에서 구체적 명제에로 이르는 이론적인 추론이라기보다는 목적과 그 실현을 위한 구체적 실천을 도출하는 실천적 추론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즉 보편적 인류애라는 목적에 이르기 위해 가족애의 실천을 그 수단으로 둔다는 것이다.
44) Ibid.
45) 應元道, 〈二十年來之中國基督敎著作界及其代表人物〉, 《文社月刊》 제1권 제5책(1926년 4월), pp.13-14.
46) 范子美, 〈中國倫理的文化與基督敎〉, p.16. (역주: 중국어판에는 이상의 범자미에 대한 서술이 없다.)
사진 | 바이두
문석윤 |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