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에서의 사역 개요 1년여 마카오에서 중국 내지 진입을 준비하던 마테오 리치는 1583년 9월 10일 루지에리의 인솔 아래 조경(肇慶)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1588년 초여름, 루지에리가 조경을 떠날 때까지 5년 가까운 기간 동안 마테오 리치는 조수역으로 루지에리의 일을 도왔다. 그는 조경에서 사역하는 동안 루지에리가 인정한 학술 전파로 교리를 전하려는 선교전략을 실천으로 옮기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자신이 수학, 시계와 해시계 제작, 물리학, 회화학(繪畵學), 조각과 지도 제작 등에 뛰어나다는 점은 중국인들에게 즉각 드러내었지만 자신의 신앙과 사제로서의 신분은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중국 지식계층과 소통하고, 학자적 재능을 활용하여 종교를 전파하는 데 유리한 여건을 창조하는 과학활동에 전념했다.
첫째, 조경 동쪽 교외에 유럽풍의 선교사 사택 건축을 위해 그는 설계, 시공과 준공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크게 기여했다. 과거 유럽 건축학을 공부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건축 과정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둘째, 영서도(嶺西道) 왕반(王泮)을 위해 만들었다가 후에 교회 옆 종루에 설치된 종시계는 원래 갈리아 출신 장인이 제작을 시작했으나, 그가 마카오로 귀환한 뒤에는 마테오 리치에게 임무가 인계되어 그의 책임 아래 완성된 것이었다.
셋째, 루지에리가 준비하여 4년 동안에 걸쳐 쓴 교리저작물 《천주성교실록(天主聖敎實錄)》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 유학자들과 함께 4-5개월 동안 수정작업을 거쳐 원고를 완성하여 광주(廣州)에서 인쇄 발행되었다.
넷째, 왕반의 요청으로 마테오 리치는 중문 주석이 달린 세계지도를 제작하였는데, 조경에서 판각 인쇄된 뒤 널리 보급되어 큰 명성과 칭송을 얻게 되었다.
다섯째, 마테오 리치는 구리와 철을 재료로 천구의(天球儀), 지구의(地球儀), 해시계 등 천문 관측 기구를 제작 보급하여 중국인들로부터 큰 관심을 끌게 되었다.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 제작 조경에서 그는 중국인들의 호감을 사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마테오 리치가 중문으로 제작한 세계지도는 대단히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과거 중국인들은 실제로 외국과 거의 접촉한 적이 별로 없었기에 지구가 둥글다는 것, 지구가 오대주와 여러 해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개념도 잘 모르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소위 전 세계라는 것이 바로 중국 15개 행정 성(省)과 그 주변 바다에 있는 작은 섬들 정도로 알고 있었다. 당시 꽤 인기를 끌었던 주사본(朱思本)의 《광여도(廣輿圖)》도 이러한 지식 체계를 전하고 있었다.

원래 조경 회소(會所)의 접견실 벽에는 선교사가 유럽에서 가져온 1570년 출판된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의 세계지도가 걸려 있었다. 중국인들은 유럽에서 출판된 세계지도에 보이는 회귀선, 자오선, 남북극, 적도, 오대주 분포와 각 민족 등이 기록된 것을 처음에는 절대 믿지 못했다. 일부 중국인들은 중국이 한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는 서양 지도를 더욱 믿지 못했다.
그러나 왕반은 세계지도의 내용을 보고 마테오 리치에게 로마와 예루살렘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물어보고는 했다. 마테오 리치는 자신의 항해 경험에 근거하여 보고 들은 사실들을 지도와 연관하여 들려주기도 했다. 왕반은 마테오 리치가 설명하는 많은 지명들이 자신이 접한 문헌 기록상의 이름들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고 이 지도가 세계의 규모와 모습을 충실하게 표시한 것임을 인정했다. 학식있는 중국인들은 이 세계전도에 중문으로 주석을 단 동일한 지도를 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왕반은 마테오 리치와 협의한 뒤 통역의 도움 아래 중문으로 지도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으며 아울러 마테오 리치에게 이 일의 책임을 맡겼다.
마테오 리치가 왕반의 요청을 들은 뒤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천주교를 중국에 전파하는 데 유리한지의 여부였다. 우선 그는 중문으로 세계지도를 제작하는 이 일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자신의 방법과 완전 일치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그는 지도상에서 유럽과 중국이 바다와 넓은 육지로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서구인에 대한 공포심이 줄어들어 서양에서 오는 복음전파를 가로막는 장애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런 생각으로 마테오 리치는 곧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를 제작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지도 제작과 중문 주석을 다는 과정에서 마테오 리치는 두 가지를 각별히 유념하였다.

하나는 각국의 종교 의식을 묘사할 때 그는 중국인들이 지금까지 몰랐던 기독교의 이적과 관련된 설명을 슬쩍 끼워 넣었다. 유럽에 대해서는 풍속이 아름답고 오륜(五倫)을 중시하며 물산이 풍성하고 군신은 평화롭고 풍요롭다고 하는 등 이상적인 세계로 수식했다.
또 다른 하나는 중국이 전통적으로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관념이 있음을 감안하여 본래 오르텔리우스의 세계지도에는 극동에 위치하였던 중국을 새 지도에서는 지도의 중앙에 두었다. 이 결과 새 지도에 대하여 중국인들도 이에 매우 기뻐하고 만족하였다. 조경지부 왕반은 새 지도를 곧바로 인쇄하게 했다.
마테오 리치가 최초로 제작 완성한 세계지도는 조경에 머무는 동안 중시 여겨 널리 확산되었을 뿐 아니라 교정과 개정, 중판을 거쳐 장관과 총독 아문으로 유입되어 높이 평가되었고 마침내 황제의 요청에 따라 황궁에까지 전해졌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중국인의 염원에 따라 조경에서 최초로 제작된 세계지도는 마테오 리치의 학술선교전략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었으며 적응성 선교전략 과정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사진 | Abraham Ortelius의 세계지도(Wikipedia)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