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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2  통권 204호  필자 : 문석윤  |  조회 : 4176   프린트   이메일 
[오늘의 중국교회]
기독교의 대안: 중국은 어떤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중국 신학의 건설-1920년대 반(反)기독교운동에 대한 중국교회의 대응-

지난 목차


서론

 

Ⅰ. 종교 문제

  1. 종교에 대한 물음: 중국에 종교가 필요한가?
     1) 감정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2) 초월의식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3) 구원의 길로서의 과학


2. 기독교의 대안: 중국은 어떤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1) 신문화운동과 기독교

종교 문제에 대한 중국교회의 반응을 살펴보기에 앞서, 신문화운동이 당시 중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답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문화운동은 표현의 자유와 비판적 태도라는 새로운 기풍을 가져왔다. 모든 사유 방식과 관습들은 가차없이 비판되었다. 과거에는 유교 전통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식인들은 따라야 할 명확한 노선들과 본받아야 할 모델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신문화운동은 세습의 구태를 철저하게 변혁시켰다. 지식인들은 자유롭게 자신이 관심을 둔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말했다. 당시에 유행했던 것은 중국 지식인들의 정신적 해방이었으며, 그것은 새로운 문학의 쇄도를 가져왔다. 적지 않은 간행물과 잡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속속 발행되었다. 과거의 족쇄로부터의 이러한 해방감은 《신조(新潮)》 창간호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잡지를 통해 우리는 정신적 해방을 위한 싸움에서 온 나라의 모든 학교 학생들과 연합하기를 갈망한다. 우리의 희망은 나라의 모든 학생들이 과학적 사유에 관심을 가지기를, 그래서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되기 위해 주관적인 마음과 고정된 선입관들을 포기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우리 사회에 동화되기보다는 사회를 개조하기에 충분한 인격을 가지게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의 출판정신은 비판정신이다.1)
 

이 시기의 문학혁명은 중국교회에도 적지 않은 자극을 주어, 기독교 지식인들로 하여금 당대의 사회 문제들에 대해 연구하고 기독교적 관점을 대담하게 표현할 수 있게 하였다. 새로운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북경의 교회 지도자들은 ‘증도단(證道團)’을 조직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학술계 내에서 기독교를 변증하고, 기독교 신앙과 정치 사회의 관계를 표명하며, 특별히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을 행하는 데 있었다.2) 《생명월간(生命月刊)》 《진광잡지(眞光雜誌)》, 《청년진보(靑年進步)》, 《중화귀주(中華歸主)》, 《문사월간(文社月刊)》, 《진리주간(眞理週刊)》, 《진도(眞道)》, 그리고 《정도(正道)》 등을 포함해서 많은 수의 기독교 잡지들이 이 시기에 나왔다.
 

이전의 윤리 속에서 개인의 지위는 가족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따로 분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서구 사상이 중국에 진입해 온 이래 개인의 인격과 가치에 대한 서양식 강조는 중국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3) 호적(胡適)은 중국 가족제도에 네 가지 악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즉 이기심, 의존성, 위선, 나약함이 그것이다.4) 그는 자유(自由), 자기표현(自承) 그리고 자기결정(自決)이라고 하는 입센(Ibsen)의 개인주의 이론으로 중국 전래의 가족 중심의 좁은 관점을 대체할 것을 권장하였다. “신청년”은 전통의 폐허로부터 미래의 가족과 사회를 재건하여 새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도전받았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 속에서 개인, 가족, 그리고 민족(국가)의 개념 모두가 다시 정의될 필요가 있었다. 오사(五四)운동 기간 동안 유교(儒敎)는 비판과 공격을 크게 받았다. ‘공자 타도(打倒孔家店)’라고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구호가 되었다. 그러나 유가사상을 배척하고 난 뒤 국내의 지식인들은 사상(思想)상의 진공상태에 직면하였으며, 이는 서방의 학술 이론들이 적극 수용된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신문화운동의 발전 과정 속에서 일반 청년 지식인들의 지적 분위기는 기독교의 전파에 유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번역서를 통해서 서방의 철학과 문학 작품들을 읽었다. 당시 광범위하게 독서되고 토론된 서양의 사상가들 중에는 데카르트, 볼테르, 벤담, 라마르크, 콩트, 다윈, 마르크스 그리고 크로포트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사상가들 중 다수는 반(反)종교적 관점에 경도되어 있었다. 당시 많은 중국 학생들이 서양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이들 사상가들의 반종교적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많은 신문화운동의 지도자들은 일찍이 해외 유학을 경험하였으며, 자신들의 선생의 영향에 따라 당시 구미에서 유행하고 있던 인본주의(人本主義) 철학을 학습하였다. 서방의 과학과 기술에 수반하여 기독교에 적대적인 많은 이론들이 또한 중국에 수입되었으며, 교실에서 그리고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서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특별히 관립(官立) 학교 학생들에게 이러한 전파는 더욱 적극적이었다. 학생들은 이러한 다양한 관념들의 혼란 속에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면서 민족과 개인에게 구원의 방향을 제시하여줄 사상이 하루속히 출현하기를 갈망하였다.
 

1920년대는 기대감으로 가득 찬 흥분의 시기였다. 정치적 불확실성과 사상적 다양성은 행동에는 빠르고 성찰에서는 덜 다듬어진 학생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들은 가슴 가득 열정을 가지고 국가의 재건에 헌신하고자 하였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교육을 받은 특권적이고 자격 있는 엘리트이기 때문에 당연히 민족의 정치적 운명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민족주의적 열기는 오사운동을 통해 그리고 그 이후에 높이 일어났다. 중국 지식인들은 비록 자신들이 참여한 실제적 정파는 달랐지만 민족을 구하고 강하게 한다는 공통의 목적에 의해 정신적으로 연합하였다. “안으로 국가의 적을 제거하고, 밖으로 강권적 세력에 저항하기” 위하여, 그들은 어떤 형태의 애국적인 집단행동이든 기꺼이 취했으며, 그들의 좌절과 불만을 내보이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기꺼이 이용하였다.
 

중국의 운명에 대한 동일한 관심은 기독교 모임 안에서도 표출되었다. 예를 들어 ‘중화귀주운동(中華歸主運動)’은 “종교가 나라를 구한다(宗敎救國)”라는 구호를 내걸고 당면한 급무를 위해 사회 중건(重建)을 고취하였다. 다양한 기독교 간행물들은 또한 국가와 민생(民生)의 문제에 관해 적극 토론하였으며, 사회 재건이라는 주제가 당시의 기독교 문헌(문학)에서 많이 다루어졌다.
 
2) 중국 기독교인들은 신문화운동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가
신문화운동을 지배하는 것이 인본주의 정신이었음은 분명해 보였다. 당시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나운염(羅運炎)5)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신사조(문화)운동은 또한 인간 중심적 운동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대상과 주요한 이상(理想)은 모두 인간과 그의 안녕과 진보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양한 측면을 가진 운동으로서 생활의 각 방면에 관하여 동시에 하나의 새로운 가치 관념을 소개하였다.”6) 연경(燕京)대학 교수인 유정방(劉廷芳)7)도 이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관심사는 “오늘의 세계와 가까운 미래에 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8)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비록 신문화운동이 과학과 민주를 지주로 삼고 인본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 불리한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운동에 대한 태도에서는 대체적으로 낙관적이었다. 예를 들어 나운염에 의하면 신문화운동과 기독교 사이에는 어떠한 충돌도 없다. 그 둘은 모두 진리 추구라는 동일한 동기와 인류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제도와 생활을 개선하고자 하는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만약 비판과 탐색이 객관적이고 개방적으로 수행된다면 신문화운동은 종교(기독교)를 배격하기보다는 아마도 그로부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9)
 

또 한 사람의 연경대학 교수인 서보겸(徐寶謙)10)도 신문화운동은 중국 사회의 개조를 위해 필수적인 도구라고 지적하였다. 그에 따르면 “중국의 문예 부흥은 사상상의 운동이며, 한편으로는 비판과 불만에 의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건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 하나의 과정 혹은 현상이다.”11)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기독교와 신문화운동 사이의 상호보완적인 기능을 인정하였다. 문학혁명에 의해 소개된 표현과 비판에서의 새로운 자유는 복음전파에 도움을 줄 것이며, 동시에 학교와 병원, 그리고 사회복지 방면에서의 기독교 선교활동은 인민의 생활을 개선하고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는 데 지속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유정방이 말한 바와 같이 신문화운동은 “기독교에 적지 않은 동력을 제공하여 그것이 건설적인 사회적 메시지를 탐색하도록 할 것이다. 만약 이 운동에서 토론된 조치들이 철저하게 실행된다면 사회 재건을 위한 만족할 만한 프로그램은 이 운동을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갈망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12)
 

어떤 주의 깊은 관찰자들은 운동의 비조직적 성격에 대해 지적하였다. 분분하게 외치는 목소리 뒤에는 어떠한 신조(선언) 혹은 체계도 없었다. 그것의 자생성이 초래한 무질서와 혼란은 20년대 반(反)기독교 운동 기간의 유사한 혼란을 연상하게 한다. 대부분의 논점들은 모두 서양으로부터 수입되었으며 그런 후에 약간의 지역적 색채를 입힌 것일 뿐이라는 지적도 있었다.13) 그렇지만 이러한 언급이 그러한 활동에 깃들인 새로움의 요소들과 중국 사회에 대한 창조적 공헌을 감소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민족의 삶을 근대화하는 데 있어 서양의 사상과 실천을 토착화하고자 하는 노력은 칭찬할 만했으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토착화가 된 기독교 메시지에 대한 탐색은 이 시기의 산물이었다.
 

비록 신문화운동의 지도자들 중 대부분이 종교에 비판과 공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중국 기독교인들은 이 운동을 환영하였으며 동시에 이 시대적 사실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신문화운동은 구국(救國)과 구민(救民)의 사명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교회로 하여금 오늘날 중국에서의 기독교의 임무에 대해 연구하도록 직접적으로 자극하였다. 중국교회 신도들 중 시국에 대해 예민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점점 더 깊이 교회 내의 문제와 대외적 관계에 대해 검토하여야 하며 당시의 반종교 조류에 대해 합리적인 대응 방법을 제출하여야 함을 인식하였다. 그들의 노력은 중국에 적합한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건립하고자 시도하는 것이었다.
 

3) 새로운 종교(新宗敎)의 건설
일군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가 마땅히 당대의 정치·사회적인 상황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가운데 국가가 당면한 시급한 수요에 부응하여 하나의 토착화가 된 시대의 종교를 건설함으로써 신문화운동에 대해 일종의 지도력을 발휘하기를 희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유학생들에 의해 출판된 잡지 Christian China의 한 편집자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매우 잘 요약했다.
 

중국의 재건에 있어서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인민의 도덕을 보존할 수 있고, 생존의 기본 원칙들을 유지할 수 있으며, 수많은 사람의 깊은 영적인 열망들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종교이다. 그것은 분명 두려움과 미신의 지배를 극복하는 종교일 것이다. (……) 그것은 지적인 검증과 합리적인 의심들 그리고 이성적인 탐색들의 신랄한 테스트를 견딜 것이다. (……) 그것은 신조들과 교의(敎義)상의 사소한 점들에 대해서는 무시할 것이며 다만 생명의 기본 조건들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강조할 것이다.14)
 

20세기 초기의 서양 철학의 동향은 생명의 문제에 대한 특별한 강조와 관심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베르그송의 창조론(creationism), 다윈의 진화론(evolutionism), 그리고 듀이의 실용주의(pragmatism)는 모두 생명의 경험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논조는 당시 구미에서 유학하고 있던 일부분 기독교도 학생들에게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나중에 그들은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서 중국으로 돌아왔다. 20년대 일반 신도들은 종교가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했고, 또한 아울러 사회를 개혁하고 신중국을 건립하는 데에 종교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아래에서는 ‘종교 문제’에 대한 몇몇 교회 지도자들의 논점에 대해 소개해 보고자 한다.
 

<‘종교 문제’에 대한 당시 몇몇 교회 지도자들의 논점>
YMCA의 편집간사였던 간우문(簡又文)15)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일과 인간 마음의 가장 열렬한 욕망은 더 고귀하고 더 평화로우며 더 풍성하고 더 조화로우며 더 완벽하며 더 긴 생명에 대한 추구이다.”라고 지적했다. 삶의 과정 중에 인간은 당연히 생명과 환경을 서로 조화 적응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다양한 수단들을 강구한다. 종교는 가장 효과적인 적응방식으로서, “인간 삶의 필요에 의해, 사회의 제도를 모방하여, 민족의 문화 가운데 나아가, 시대에 적합하게 생성된 것이다.”16) 다시 말하면 종교의 기능은 생명을 기르고 촉진하는 데 있다. 생명은 멈춤이 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가기에 종교도 그에 따라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그것의 신조와 의식(儀式)은 모두 시대의 요구에 따라 혁신될 수 있는 것이다. 근대의 과학과 철학상의 발명은 종교에 대한 연구에 반드시 도움을 주는 바가 있다. 즉 종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우주 속의 신령한 존재를 인식하고, 그 존재와 개인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또한 아울러 생명의 힘과 방향을 취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삶이 변화함에 따라 종교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변화들에 종속되며 삶의 요구들에 따른다. 종교는 근대 과학과 철학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17)
 

종교의 성질에 대한 유사한 입장은 저명한 교육가인 위각(韋慤)18)에 의해 지지되었다. 위각은 생명을 “우주적이고 사회적인 힘들과의 끊임없는 적응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종교는 인간이 그것들과 적절한 관계를 수립하도록 도와주는 인간 삶의 한 방식이다.19) 그러므로 생명이 주인이며 종교는 노예이다. 종교의 기능은 주인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다. 종교는 “항상 생명-과정의 구체적인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인 각종 조건들의 영향을 받으며 그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켜 생명의 요구에 적응한다.” 종교를 삶의 기술(도구)로 정의하는 자신의 입장과 일관되게 위각은 기독교의 궁극성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기독교를 “매우 효과적이고 독자적인 종교”로만 보았다.20) 위각에 의하면 인간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과 조화의 경험 속에서 종교성의 네 가지 특징이 만들어진다. 즉 신(神)에 의존하는 태도, 사회 속의 결속(집단) 의식, 도덕적인 불완전으로부터 오는 죄책감, 그리고 개인의 인격적 가치에 대한 존경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종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불가결의 요소들인데, 기독교는 이들 모두를 갖추고 있다. 바로 그 점에서 그것은 다른 종교와 구별되며, 가장 이상적이며 도덕적인 조건들을 가장 실제적으로 갖춘 종교이다.
 

연경대학 교수 매이보(梅貽寶)21)에 의하면 “종교는 곧 인간 삶의 가치들에 대한 인간의 자각, 적응 그리고 개선이다.” 그는 또 “종교는 결코 인간 삶의 한 측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하나의 태도, 하나의 생활방법이다.”라고 말했다.22) 인간 삶의 경험 가운데에는 현실적인 것도 있고 이상적인 것도 있으며, 현재의 것도 있고 미래의 것도 있으며, 가능적인 것도 있고 실현되어 있는 것도 있다. 종교의 목적은 삶(생활) 그 자체이며 그것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신비적이거나 내세적인 것이나 혹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은 약하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종종 ‘인류의 총체적인 역량’이나 ‘우주의 대 기능(機能)’에서 도움을 찾으며, 그 결과 다양한 종교적 경험이 나타난다. 다른 말로 하면 종교에 대한 추구는 어떤 제도 종교들이 가르치는 바와 같은 사후의 영원하거나 혹은 초월적인 삶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이다.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풍성한 생명에 있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전(全) 인격적이고 전(全) 인류적이며 전(全) 우주적인 반응을 방법으로 삼는다.”23)

한 걸음 더 나아가 매이보는 종교의 이중적 기능에 대해 분석하였다. 즉 통합적 기능과 동기유발적 기능이 그것이다.24) 한편으로 종교는 인생 중의 고립되고 혼란스러운 경험을 하나의 합리적이고 전일적(全一的) 그림으로 결합시키려고 시도하고, 그를 통해 삶에 비교적 온전한 의미(가치관)를 나누어 준다. 그것은 지적인 탐구를 만족시켜줄 뿐 아니라 또한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의 관계, 즉 개인과 인류와 우주 사이의 관계를 확립시켜 준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는 인간의 삶에 역동성, 용기와 창조력을 주어, 생활상의 곤란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해결의 방법을 찾을 수 있게 하며 그를 통해 인생의 행복 그 삶의 질적 수준을 고양할 수 있게 한다. 도덕적인 면에서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고귀하고 더 선량한 사상과 실천에 이를 수 있도록 고취시킬 수 있으며, 사회의 질서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연경대학 교수 조자신(趙紫宸)25)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교(의 본질)는 위로는 하늘의 마음에 도달하고, 아래로는 사람의 학문에 통하는 데 있으니, 곧 사람이 물질계와 정신계의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것이다. 그 적응이 완전하고 원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최고로 풍성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다.”26) 생활환경 중 일체의 제도와 이상(理想)은 모두 끊임없이 변화하며, 종교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신문화의 사조가 국내에 밀려들어 왔을 때, 전통의 종교 관념은 새로운 시대의 시련을 견디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종교의 혁신은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환경을 지배하고 개조하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 속에서 더욱 원만한 생활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자신은 계속해서 종교는 또한 인간과 자연계(우주) 사이의 교제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인간은 응당 자연계(우주) 속의 자신의 신분에 대해 성찰하여야 하며, 자기의 책임을 다하여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되 동시에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모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의식이야말로 종교정신(宗敎精神)이 존재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위로는 하늘의 마음에 도달하고, 아래로는 사람의 학문에 통한다.’라고 하는 것은 종교의 본질, 곧 어떻게 일정한 물질 혹은 심령의 상황 속에서 세상 사람들을 인도하여 생명의 창조적 작업과 사회제도의 혁신을 진행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을 표명하는 말이다. 인간은 우주(하늘의 마음)의 실재를 믿으며 그것의 원리에 따르며 그것과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한다. 그러한 우주적 인식이야말로 종교적 삶의 핵심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종교 자체 또한 그 우주적이고 세속적인 과정에서 인간의 삶과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신종교 건립의 배경>
새로운 종교, 곧 신종교의 건립에는 몇 가지 방면에서 우리들의 주의를 끌만한 사항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교회 내에서 일종의 상당히 강렬한 사회의식(社會意識)이 점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19세기 이래 줄곧 서방선교사들이 중국에 가져온 복음은 비교적 개인 구원의 신학 관념을 중시하였지만 이제는 오히려 복음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다. 개인 구원에 관한 이전의 개인주의적 사상은 다만 내세를 중시하고 정치·사회적 관심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기는 일종의 편협한 태도를 초래하기 쉬웠다. 이는 당시의 시대의 요구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관심에서 편협하고 전망에서 저 세상적인 종교적 개인주의는 그 시대의 사조와는 반대 방향인 사회탈출론에로 쉽게 이끌 수 있었다. 그에 대해 그들은 개인의 행복과 세계의 이익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인식하였으며 나아가 심지어는 대국적으로 생각하여 잠시 개인의 희생을 허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음으로, 중국 사회가 당시 사회의 다양한 파괴적인 힘들에 직면하고 있을 때 중국교회는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는 없었으며, 응당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과학기술의 진보와 상공업의 발달에 힘입은 생산의 증대는 삶을 더욱 물질적으로 만들었다. 세상 사람들은 부유함과 강함을 추구하면서 수단을 가리지 않았으며 자신의 강함으로 약자들을 착취함으로써 경쟁과 기만, 억압과 착취로 가득 찬 사회가 형성되었다. 신중국은 바로 오랜 세월 견고하게 변화하지 않는 전통의 악습을 폐기하고자 하였으며 동시에 참된 길에서 벗어난 일부 서방 사상의 나쁜 영향으로부터도 벗어나기를 원하였다. 종교는 응당 사회를 혁신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여 중국이 걸어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실행 가능한 합리적인 원칙을 제시하고, 국가 사회를 건설하는 사업에 협력하여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사회 사명은 말세신학(末世神學, Eschatology, 종말론)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중국 기독교인들 중 보수적인 신학관(神學觀)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일반적으로 사회 개혁에 대해서는 비교적 냉담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인류는 모두 죄악으로 말미암아 부패하였으며 다시 하나의 완전히 선한 사회제도를 건설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인간 천국의 이상은 단지 환상이며 실현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임무는 개인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죄인을 인도하여 회개하고 바른 길로 가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북경의 저명한 전도자인 왕명도(王明道)27) 목사는 바로 이러한 신학 논점을 대표하는 중국교회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하나의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절대로 가능성이 없는 일이며, 세상 사람들은 그 사악함과 부채에서 이미 그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없을 정도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다만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임하기를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28)오직 철저한 영적인 거듭남을 통해서만 비로소 죄인이 변화되어 사회에 유익한 삶을 살 수가 있다. 이러한 신학적 질서-우선 개인을 구원하고, 그 다음에 사회를 개혁한다-는 왕명도가 선교 사업에 종사함에서의 원칙이 되었으며, 왕명도가 사회적 개혁보다 전도활동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졌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29)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의 임재는 전적(全的)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며, 미래에 별도의 참신한 생존상태를 인간 세계에 건립하는 것으로서, 이렇게 도래한 새 하늘과 새 땅 속의 모든 것은 본질상 현재의 세계와 같지 않으니, 목전의 세계는 사라져 갈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聖經)이 예언한 메시아는 반드시 약속에 따라 자신의 때에 나타날 것이며, 아울러 또한 교회를 들어 올릴 것이며,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한편 신종교, 곧 새로운 종교를 제창한 사람들은 그러한 종류의 “미래”적 말세론(futuristic eschatology)에 찬동하지 않았으며, 또한 저 “이미 실현”된 말세관(realized eschatology)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말세론은 마땅히 인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이 현존하는 세계 체제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올 유일한 실행자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상적인 사회는 현재의 인간의 집단적인 노력을 통해 얻어질 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할 때는 지금이라고 주장하였다. 위각이 말했던 대로 새로운 종교는 “결코 현재 세계의 필연적 파멸과 또 다른 세계의 초자연적인 창조를 믿는 전통적인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노력을 통하여 지금의 사회를 개조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점차적으로 세워가기를 추구한다.”30) 그런 사회적 이상의 형성은 모든 사람을 위한 공동의 복지가 될 것이다.
 

<신종교와 과학 사조의 관계>
신문화운동 시기에 과학과 민주의 사상은 가장 환영을 받았으며, 사회의 의식 형태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과학과 민주는 신문화운동 시기를 형성한 가장 중요한 지적이고 사회적인 힘들이었다. 중국의 근대화에서 과학의 가치와 필연성은 거의 ‘천명(天命)’처럼 받아들여졌다. 어떤 중국 기독교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옹호하기 위해 과학의 방법과 정신을 채용하려고 노력했다. 북경증도단(北京證道團)이 흥기한 목적은 곧, “새로운 시대의 과학과 철학 상의 개념들을 운용하여, 현 세대의 종교적인 오해와 의혹들을 말끔히 해소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진리의 참됨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31) 이 성명을 통해 우리들은 교회의 지도자들도 과학의 태도를 가지고 종교상의 문제들을 연구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어떤 이들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평론하는 신학적 관점을 취하였다. 서구 신학계에서 성행하고 있던 고등(高等)과 저등(低等) 성경비평학(聖經批評學)은 중국에서도 채택되어 사용되었다. 많은 전통적인 신학 이론은 다시 새롭게 평가되었으며, 그중 일부분은 원래의 해석이 뒤집혔다.32)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평생의 행적을 연구하면서 모두 근대에 유행한 역사적인 방법을 채용하였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교리적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로 역사상의 나사렛 사람 예수요, 중국인들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그의 행위와 교훈이었다.
 

이전에 기독교의 정통에 의해 중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많은 전통적 교리들이 반박되었으며, 기독교의 초자연적 측면은 제거되거나 평가 절하되었다. 기적들과 동정녀 탄생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등에 관한 교리들은 더 이상 중요한 것으로 신봉되지 못하였다. 신종교의 복음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론(創造論)과 인류의 타락과 범죄에 관한 관념은 모두 근대의 생물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증거가 부족하다. 신종교가 시대적 도전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리고 현재의 국가적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기독교의 신앙을 다시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늦출 수 없는 시급한 일로 여겨졌다. 한편 전통 기독교 신앙에 충실하였던 사람들은 과학과 종교의 문제에 대해 그와는 다른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근본주의(基要派)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과학의 발전에 대해 매우 냉담한 태도를 취하였다. 많은 중국 기독교도들은 성경과 과학 사이의 모순을 발견했을 때 성경을 위해 과학을 버렸다.
 

또한 어떤 이들은 과학과 종교는 자연의 서로 다른 두 영역에서 각각 작동하는 것이므로 둘 사이의 대립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즉 과학은 자연계 중 객관적이고 물질적이며 볼 수 있고 유한한 것에 관계하는 것이라면, 종교는 주관적이고 정신적이며 볼 수 없고 무한한 문제를 처리한다는 것이다. 바로 나운염이 지적한 바와 같이 엄격하게 말해서 종교와 과학은 각각의 노선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나란히 함께 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33) 반면 어떤 이들은 둘 사이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느꼈다. 조자신은 《기독교철학(基督敎哲學)》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충돌은 피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종교는 가치를 보존하는 반면 과학은 가치를 비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과학이 보수적이지 않기를 바라지 않으며 또한 과학이 비판적이지 않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나 균형을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34)
 

균형에 대한 추구는 일부의 기독교도 그룹으로 하여금 과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도록 이끌었다. 그들은 과학과 과학주의는 같은 것으로 볼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과학주의는 신문화운동 시기에 크게 환영을 받았던 것으로, 과학이 어떤 문제든지 모두 해결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의 합리적이고 아름다운 인생관을 가져 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들 기독교인들은 비록 과학이 여러 유용성을 가진다는 것에는 동의하였지만 과학적 방법의 유용성과 마찬가지로 그 한계도 인정하였다. 만약 과학으로 자연과 인생의 진상(眞相)을 해석한다면, 그 해석은 다만 사상 상의 일종의 설명이며, 결코 실체 그 자체는 아니다. 과학 만능에 대한 주장은 오히려 비과학적인 독단론이요, 결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기독교도들은 과학과 종교 사이의 충돌을 화해시키려는 희망을 가졌다. 그들은 기독교의 신은 또한 자연계의 주재자이므로 과학과 신학은 마땅히 서로 힘을 합하여 우주의 신비를 연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과학이 발견해 낸 지식에 힘입어, 일부 이전 신학이 자연계에 대해 오해했던 것을 바로 잡을 수 있으며, 반대로 과학적 연구도 기독교의 신학을 통과하여 더욱 깊은 차원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계 내에는 일정한 질서와 목적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곧 한 분의 전지전능한 신이 관장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과학과 신학은 우주의 지적 설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을 통해 기독교의 자연에 대한 해석이 적합하게 조절될 것이며, 기독교 신학을 통해 과학 작업은 침묵하는 자연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할 형이상학적 구조를 얻게 될 것이다.35) 과학과 기독교는 인류가 하나의 합리적이고 완전한 인생관을 건립하는 데 서로 합력하여 도움을 줄 수 있다.
 

덧붙이자면 과학적 방법과 태도는 어떤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종교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종교 신앙의 원칙을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개념들을 검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신종교를 주창한 이들은 종교는 마땅히 신축성과 적응성이 풍부한 개방적인 체계(Open System)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 자체 내에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고 조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기독교는 일체의 미신적이고 환상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마땅히 과학화가 되어야만 하며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신문화운동에 받아들여 질 수 있으며, 신중국(新中國)에 받아들여 질 수 있다. 비록 모든 기독교의 진리가 실험에 의해 검증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실행할 과학적 정신을 가져야만 한다. 교회와 기독교 학교들은 이러한 원리들을 실험하는 실험실이다. 기독교는 만약 그것이 지적인 청중들에게 호소력이 있고 근대 중국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면 과학적으로 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새로운 종교는 진보적인 신앙을 넘어뜨리는 장벽인 자신의 미신적이고 환상적인 내용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과학주의는 극단적인 주장이며 과학은 신성화 될 수 없지만, 근대화 된 종교라면 과학의 기본원칙에 위배되어서는 생존할 방법이 없으며 어떠한 존재 가치도 가지지 못한다.
 

<신종교와 민주 정신의 관계>
과학의 영향을 제외하고 20년대의 중국 사회에서 가장 강조된 것은 민주적 정신이었다. 비록 당시 중국인들이 말하는 민주와 서구 전통의 민주 관념 사이에는 아직 크나큰 거리가 있었지만, 그 정신은 매우 빨리 지식인들의 사상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일체의 전제적이고 권위주의적 주장들은 모두 비판받았다. 어떤 개인, 단체, 혹은 종파를 중심으로 한 어떠한 형식의 종교적 지배도 모두 민주 시대의 정신적 기풍을 위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종교는 인간의 삶에 봉사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것의 최종적인 권위는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결코 어떤 전통적인 세력이나 신앙적인 교리에 있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신문화운동이 제창하였던 개인주의(個人主義)는 새로운 종교의 하나의 중요한 원칙을 정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기독교 신앙을 선전하는 데 어떠한 독단적이고 교조주의적 접근도 회피되었다. 믿는 자들이 눈먼 신앙이나 권위에 대한 단순한 묵수에 의지하지 않고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객관적이고 지적으로 건전한 메시지가 주어져야 한다. 당시 중국교회에서 가장 취약한 영역은 곧 교회 밖의 지식인들이 존중하고 동시에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진지하게 고려하기를 원할 정도의, 하나의 토착화가 되고 충분한 이론적 근거를 가진 복음, 합리적인 기독교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36)
 

개인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존중은 민주적인 정신으로 충만한 신종교의 핵심적 요소였다. 사실 기독교에서는 원래부터 줄곧 인격의 지위를 높이 제창하여 왔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 모두 한 하나님 아버지를 가지고 있으며, 사해 내의 모든 사람들은 서로 형제이기 때문이다. 전통의 중국 사회 속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 별로 각인의 신분이 같지 않으며, 존비(尊卑)의 차별이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히려 그와는 다른 일종의 인도(人道) 관념을 제출하여, 교회가 사회 개혁을 진행하는 데 있어 주요한 기초가 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지위는 여성과 소인을 낮게 평가하는 유교 사회에서 그들의 가치를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유교 사회에서 기독교회에 의한 다양한 형태의 인도주의적 참여의 기초가 되었다. 중국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구시대의 관료주의적 악습과 지역주의를 제거하고 편애와 편협이 없는 이타적인 사랑과 이웃에 위한 희생정신을 제창함으로써 인민들이 구국에 열성을 바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신종교의 구호는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었다.37) 이러한 태도는 분명히 19세기에 유행하였던 인도주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신학계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전에는 신의 예정과 권위가 많이 언급되었다면, 20년대의 신학사상은 신의 도덕과 품성을 강조하였다. 이전에는 예수의 기적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제는 그의 인격과 말씀이 중시되었다.38) 신종교는 그 강조점에서 현저하게 도덕적이었다.
 

개인의 가치 관념을 사회에로 전개시켜 간다면, 국가의 지위와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로 파급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국가주의의 문제가 발생한다. 국가주의가 과도하게 보호되고 수용된다면 그때 형성되는 국면은 곧 국제간의 분쟁과 침략이다. 가공할 만한 종족 혐오와 무력주의(武力主義)가 연이어 일어날 것이며, 천하일가(天下一家)의 사상이 파괴될 것이다. 애국주의와 인종적 우월감은 보편적인 형제애의 적이다. 기독교 역사상의 종교전쟁들의 비극은 “살인하지 말라” 그리고 “너의 이웃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는 도덕적 준칙들을 어긴 것이었다. 현대의 종교는 마땅히 과거의 사례를 본보기로 삼아, 국가 간의 상호 이해와 수용을 위해 노력하여야 하며, 국제주의의 원칙을 제창함으로써 극단적인 국가주의가 발전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 시대에 신종교를 창도한 이들은 자신들의 노력을 통해 자신들의 종교가 당시 중국의 수요에 능히 적응할 수 있기를, 그리고 일반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를 간절하게 소망하였다. 그들은 신종교는 생명의 가치와 생활의 개선을 중시하므로 반드시 국가를 중건하는 임무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가 이러한 임무를 추동할 수 있는 역량과 합리적인 도덕원칙을 제공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들은 종교적 확신으로부터 그리고 호교(護敎)적인 관심으로부터 그러한 종교가 젊은 중국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며, 국가를 재건하는 임무를 장려하는 생명으로 고동치는 메시지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음 호에서 우리는 중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반기독교 사조의 공격에 대항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복음 메시지’를 건립하였는가 하는 것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미주  
1) 《新潮》 (1919년 1월), pp.1-3. Chow Tse-tsung, The May Forth Movement, p.60.에 번역되어 있다.
2) "Christian Renaissance: The Aims of the Peking Apologetic Group", The Chinese Recorder 51 (1920년 9월), p.636.
3) 다음 글에 실려 있는, 중국 사회에서의 개인의 위치에 관한 토론을 보라. Y. P. Mei, "The Status of the Individual in Chinese Thought and Practice", Charles A. Moore ed., The Chinese Mind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67), pp.323-339.에 수록됨.
4) 胡適, 〈易卜生主義(Ibsenism)〉, 《新靑年》 4.6 (1918년 6월).
5) 羅運炎(R. Y. Lo)는 1890년 江西省에서 태어났다. Syracuse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했고 미시간대학에서 1914년에 "The Social Teachings of Confucius"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그는 국민당 정부의 입법원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The Social Teachings of Confucius (1914), 《基督敎與新中國(Christianity and New China)》(1922) 등의 저작을 남겼다.
6) R. Y. Lo, China's Revolution From the Inside (New York: The Abingdon Press, 1930), p.62.
7) 劉廷芳(Timothy T. Lew)는 1891년 浙江省 溫州에서 태어났다. 조지아주립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였고 콜롬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또한 뉴욕 協和神學院(Union Theological Seminary)과 Yale大學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1921년에서 1926년까지 연경대학 신학교의 교장이었다. 그는 《生命月刊》, 《眞理週刊》, 《眞理與生命》의 편집인을 지냈다. 
8) Timothy T. Lew (劉廷芳), "China's Renaissance--the Christian Opportunity", The Chinese Recorder  52 (1921년5월), p.303.
9) 羅運炎, 〈新思潮和基督敎〉, 《生命月刊》 2.1 (1921년 6월), pp.2-5.
10) 徐寶謙(1892-1944)은 浙江省 출신으로 1921년 미국에 유학하여, 뉴욕의 협화신학원과 콜롬비아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24년 중국에 귀국한 후 그는 연경대학에서 종교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1930년 世界基督敎學生同盟의 幹事로 일했다. 1933년 콜롬비아대학에서 “Ethical Realism in Neo-Confucian Thought”라는 논문으로 Ph.D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20년대에 교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글들은 《生命月刊》, 《眞理與生命》에 자주 실렸다.
11) P. C. Hsu(徐寶謙), "The Christian Renaissance", The Chinese Recorder  51 (1920년 6월), p.459.
12) Timothy T. Lew (劉廷芳), "China's Renaissance--the Christian Opportunity", p.314.
13)  예를 들어, Frank W. Price, 〈中國新思潮和基督敎的關係〉, 劉廷芳․胡學誠 譯, 《生命月刊》 2.1 (1921년6월), pp.1-11.을 보라. Cf. John Childs의 토론, 〈基督敎與中國的新思潮〉, 《生命月刊》 2.1 (1921년 6월), pp.1-6.에 번역되어 있는 것.
14)  "A Liberal Religion for New China", Christian China 7.7 (1921년 5월).
15) 簡又文(Timothy Jen)은 1896년 廣州에서 태어났다. 廣州嶺南大學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 가서 Oberlin College에서 학사, 시카고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20년에서 1921년까지 뉴욕의 협화신학원에서 공부하였다. 1921년 중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YMCA의 편집간사로 일했다. 연경대학에서 철학과 종교학을 가르쳤으며, 다양한 공직에 종사하였고 立法院 위원을 지냈다.
16) 簡又文, 〈什麽是基督敎?〉, 《生命月刊》 2.1 (1921년6월), p.1. 또한 그의 "The Meaning of Christianity", Christian China 7.2-3 (1920년12월, 1921년 1월), pp.90-96.을 참조.
17) 簡又文, 〈麽是基督敎?〉, 《生命月刊》 2.2 (1921년 9월), p.6.
18) 韋慤(Sidney K. Wei)은 유명한 교육자로서 Oberlin College와 시카고대학을 졸업했다. 종교에 대한 그의 견해 중 많은 것들이 미국의 중국 기독교인들의 대표적인 기관지인 Christian China를 통해 발표되었다. 중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많은 중요한 직책들을 역임하였다. 그 중에는 廣東의 敎育部長, 外交事務部秘書, 廣東基督敎大學의 교수, 南京의 國立中央大學 敎育大學長 등이 있다. 그는 또한 학교들의 등록에 관한 규칙을 준비하였던 國民政府의 교육위원회 위원이었다.
19) Sidney K. Wei(韋慤), "Some Characteristics of Religious Experience", The Chinese Students' Christian Journal 6.3 (1920년 1월): 134-137.
20)  Ibid., p.137.
21) 梅貽寶는 1900년생이다. 南開中學校와 淸華大學에서 공부하였으며, 1922년 졸업한 후에는 YMCA의 순회간사로 일했다. 그 후 미국으로 가서 Oberlin College에서 공부했으며, 1927년 시카고대학에서 Ph. D.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귀국하여 연경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1928년에서 1949년까지 연경대학의 실무총장으로 일했다. 주요 저서로 The Ethical and Political Philosophy of Motse (1929)와 Motse, The Neglected Rival of Confucius (1934) 등이 있다. 이들은 墨家의 윤리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이다.
22) 梅貽寶, 〈宗敎的實質〉, 《眞理與生命》 6.7 (1932년 5월), pp.4-5.
23) Ibid., p.5.
24) Ibid., pp.6-9.
25) 趙紫宸은 1888년 浙江에서 태어났다. 1910년 蘇州大學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서 1916년 Vanderbilt대학에서 M.A.를, 1917년 B.D.를 받았다. 그는 蘇州大學에서 사회학과 종교학을 가르치기 위해 돌아왔으며, 1922년에는 燕京大學 교수가 되었다. 《基督敎哲學》(1925), 《耶穌傳》(1935), 《基督敎進解》(1947), 《聖保羅傳》(1948), 《神學四講》(1948) 등의 저서가 있다. 그는 1948년 WCC의 여섯 명의 부회장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대 그는 사회 재건과 토착화 교회 운동에 힘썼다. 본서의 중국어판 제명은 그의 글 〈風潮中奮起的中國敎會〉, 《眞理與生命》 2.2 (1927년), pp.25-30.에서 가져온 것이다.
26) 趙紫宸, 〈宗敎與境變〉, 《靑年進步》 제30책(1920년 2월) p.39. 또한 〈宗敎與倫理〉, 《眞理與生命》 4.7. (1929년 11월):1-2.참조. 그의 "The Appeal of Christianity to the Chinese Mind", CR 49 (1918), pp.287-296.도 참조.
27) 王明道는 1900년에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교회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914년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북경에서 교회 사역을 시작하였으며 많은 민중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1927년 계간지 《靈食》을 출판하였으며, 1937년 基督敎會堂을 창립하였다. 그는 華人敎會에서 보수적 신학사상을 가진 이들을 대표하였다. 1920, 30년대에 그는 강연과 집필을 통해 방황하던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도왔다. 중국이 공산화가 된 후의 그의 행적과 간증은 매우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28) 王明道, 〈耶穌是誰?〉 (1927; reprinted ed., 香港: 弘道, 1962), pp.3-4.
29) 王明道, 〈人能建設天國麽?〉 (1933; reprinted ed., 香港: 宣道, 1962), pp.9-12.
30) Sidney K. Wei, "How the Religious Needs of China May Be Met", Christian China 7.5 (1921년 3월): 211.
31) 證道團의 선언은 The Chinese Recorder  51 (1920년 9월), p.636.에 실려 있다.
32) 劉廷芳, "Chinese Renaissance--Christian Opportunity", pp.319-320.
33)  羅運炎, 《基督敎與新中國》 (上海: Methodist Press, 1923), p.3.
34) 紫宸, 《基督敎哲學》 (上海: 中華基督敎文社, 1926), p.65.
35) 謝洪賚, 〈基督敎與格學〉 (上海: 靑年協會書局, 1921), pp.9-12. 朱經農, 〈格學與宗敎〉, 《文社月刊》 1.11-12 (1926년 10월), pp.16-17.
36) 黃理中, 〈基督敎與思想界〉, 《眞理與生命》 2.1 (1927년 1월), pp.14-16.
37) 劉鍾孚, 〈我的二十世紀宗敎觀〉, 《生命月刊》 3.10 (1923년 6월), pp.12-13.
38) 劉廷芳, 〈十九世紀各種思潮的運動對於基督敎信仰上所發生的影響〉, 《眞理與生命》 3.17 (1929년 1월). 劉廷芳은 이전 세기의 이념들이 중국에서의 신문화운동이전 시기를 포함한 기독교사상의 발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분석적으로 추적하였다.

 





사진 | 바이두
문석윤 |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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