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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2  통권 200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2366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발리냐노의 중국선교 지원

중국에 대한 적응성 선교의 구체화
발리냐노와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깊은 존중을 표하게 된 것은 16세기 유럽 여러 나라와의 비교를 거쳐 나온 것이었으며, 그가 인도와 일본 문명을 직접 겪어 본 뒤 갖게 된 것이기도 하다. 발리냐노는 동방을 향하면서 처음에는 인도 문명에 크게 동경하였다. 하지만 몇 년 동안의 체험과 관찰을 거치면서 악습, 타락, 나태, 멍하니 졸고 있는 듯한 인도인들에 대해 실망한 뒤 발리냐노는 일본 문명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경건한 민족이라고 여겼던 일본인들의 실상에 대한 실망감이 날로 커져가면서, 차츰 중국을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예수회 신임 총장 아쿠아비바(阿桂委瓦(Claudio Acquaviva)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중국 문명의 칭찬할 만한 점을 서술하면서 “소극적인 일본 관원에 비해 중국 정부 관리들은 청렴하고 공평하다”1)라고 했다.

예수회 총장은 중국선교가 가져다 줄 수 있는 장점에 대한 발리냐노의 진술에 감동되어 더 많은 예수회 선교사를 마카오에 파견하여 중국 내지선교에 대한 준비를 하도록 지원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발리냐노는 중국에서 서양 종교는 현지 문명을 대체하거나 말살할 수 없고 다만 중국 문명에 대한 보조자요 조력자일 뿐임을 선전함으로써 기독교가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고 인식했다. 때문에 발리냐노는 중국선교는 과거 방법에서 벗어나서 서양선교사의 ‘중국화’가 필수 불가결한 전제 조건이 됨을 명확하게 지적했다. 이러한 적응성 전략은 이미 사비에르가 꽤 깊이 있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사비에르는 교화의 주요 대상을 보통의 민중들 보다는 문인학자들에게로 옮겨야 하고, 강제적인 선전과 주입식 방법 대신에 지식을 수단으로 하는 선교 방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사비에르의 이러한 적응성 전략의 초보적 제안은 발리냐노의 구체적인 조직과 추진을 거쳐 실천력 있게 발전하였다. 발리냐노는 그 구체적 실천 방안을 다음과 같은 4가지 방안으로 구체화하였다. 

중국선교상의 기여

(1) 중국선교 인력의 조직적 선발, 배양
발리냐노는 중국에 들어가서 선교 사명을 감당할 인재를 모집하여 중국 각지 선교 중심지로 보냈다. 처음에는 마카오 고아원장에게 서신을 보내 중국으로 파견할 선교사를 요청하여 드 페이라리스(德 費拉里斯) 신부로 결정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후 인도 분원과의 협의를 거쳐 루지에리(羅明堅)로 교체 파견하기로 했다. 발리냐노는 루지에리의 요청에 따라 마테오 리치 신부가 중국선교에 합류하여 루지에리를 도울 수 있도록 하였다. 발리냐노는 마카오에서 성 바오로학원을 창설하여 현지 청년들을 수도사로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이 학원이 중국과 일본 교무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루지에리 등이 마카오의 다른 수도회의 방해와 중상을 받게 되자 발리냐노는 일본 교무를 주관하던 카브랄(Cabral)에게 마카오의 중국선교 교무를 관리하게 했다. 루지에리,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진입한 뒤 선교 사업을 도운 알메이다(麥安同, Antoine d' Almeyda), 상드(孟三德, Edouard de Sande), 페트리(石方西, Francois de Petris) 신부 그리고 2명의 중국 국적 수도사 종명인(鐘鳴仁)과 황명사(黃明沙)는 모두 발리냐노가 직접 선발해 중국 내지로 파견한 사람들이었다. 
 

(2) 선교사들에게 대한 중국 언어와 문자 학습과 번역 작업 독려
발리냐노가 중국선교를 위한 중국 언어 문자 학습을 중시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교훈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는 사비에르가 일본 선교 때 일본어와 한자어로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전도 효과가 극히 미진했다는 사실을 각별히 유념하였다. 그리고 1565년 11월 21일 예수회 선교사 페레즈(培萊思, Francois Perez)가 광동 포정사(布政司)에게 상륙 청원을 했을 때 포정사의 관리로부터 중국말을 할 수 없다면 먼저 학생이 되어 중국말부터 익힌 다음 교리를 들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보고도 깊이 주목하였다. 발리냐노는 일본 체류 중 편지로 루지에리에게 “중국어 읽기와 글쓰기 말하기에 전력을 다 하도록”2) 지시했으며, 마카오의 다른 신부들이 과중한 업무 부담을 주어 루지에리의 중국어 공부를 방해하는 것도 적극 변호하여 그가 중국어 학습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다. 발리냐노는 루지에리, 마테오 리치가 중국어 학습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게 되자 중문으로 기독교 교리를 저술하고 중문 경전을 서방문자로 번역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 결과 나온 교리 문답서 중국어 번역본 등은 이후 선교 과정에서 요긴하게 활용되었고, 마테오 리치 등에 의한 《사서(四書)》 등 중국 서적의 번역 작업은 선교사들이 중국 각 계층 사람들과 교제하며 중서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3) 중요 사안에 대한 정확한 대책 수립과 추진
발리냐노는 선교사들이 중국의 문화와 풍습을 익혀 중국에서 장기 거주를 할 수 있도록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서 불교 세력을 이용하기 위해서라면 승려 복장을 갖추는 것이 유리하나, 유림 계층과 교제하는 데는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1592년 곧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유림의 의관으로 바꿔야 한다며 허락을 청하였다. 발리냐노는 마테오 리치의 이 건의를 바로 지지하였다. 선교사의 복장과 습관이 유림화되면서 유가 학설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받아들일 것인지의 문제가 부각되었다. 마테오 리치에게 중국 제례 의식의 수용도 허락한 발리냐노의 훈령은, 이후 중국선교에서 예수회 선교사 모두가 준수해야 할 원칙으로 확정되었다.
 

당시 마카오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말은 광동 방언이었고 관리와의 교제에서 통용되는 ‘관화(官話)’는 중국 내지에서만 배울 수 있었다. 발리냐노의 지시에 따라 루지에리는 자주 광주로 가서 중국어 실력을 늘리며 중국 관리들과 우의를 다졌고, 양광총독(兩廣總督) 등과의 지속적인 교제와 선물 공세를 통해 마침내 총독의 허락을 얻어 조경(肇慶)에 거주하게 되었다. 신임 양광총독이 선교사를 조경에서 철수시키도록 했을 때에는 마카오 복귀를 거부하고 타 도시로의 이동을 선택한 마테오 리치의 계획을 따름으로써 중국선교 사업이 중단되는 파국은 면하게 되었다. 조경에서 예수회 선교단이 어려움에 처하자 발리냐노는 중국선교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루지에리를 교황청으로 보내어 중국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는 문제를 건의하게 했다. 교황 사절단의 파견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를 계기로 발리냐노는 선교 중심을 북쪽 북경으로 옮겨 황제의 지지를 얻으려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세 번째 사례는 중국선교단의 지도권에 관한 것이다. 발리냐노는 선교단의 감독은 중국 내지에서 생활하고 직접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맡아야 한다고 보고 마침내 중국선교단 영도권을 마테오 리치에게 넘겨주었다. 1603년 북경에 선교구 건립이 이루어지자 마카오 수도원의 원장 디아즈(李瑪諾, Emmanuel Diaz Senior)를 남방 3개 수도원인 남경(南京), 남창(南昌)과 소주(韶州)의 원장으로 임명하고 마테오 리치와 책임을 분담하게 하는 조정력도 발휘하였다. 그의 정책적 결단력은 이후 중국선교전략의 수립과 수정을 시도할 때 중요 지침이 되었다.
 

(4) 중국선교단의 경비 조달체계 수립
중국선교단의 경비는 포르투갈과 여러 나라 상인들의 후원금으로 이뤄졌으며 고정된 자금원이 없었다. 발리냐노와 루지에리가 처음 마카오에 성바오로 학원을 건축할 때 그 비용도 이탈리아의 한 상인이 기부한 것이었고, 일상생활 비용도 모두 상인들의 후원금에 의존하였다. 루지에리가 마카오에서 광동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 경비는 모두 포르투갈의 부유한 상인과 다른 사람들이 사재를 털어 나온 도움의 손길에 의지했다. 루지에리와 마테오 리치가 조경에 정착한 뒤에는 오래 동안 도움을 받지 못해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발리냐노는 마카오와 일본 간 상업 무역에서 일부 새로운 상업 협의 세칙을 제정하여 극동 지역 예수회 선교 사업 지원 방안을 체계화하였다. 발리냐노는 원동 교무 시찰원이라는 특수한 신분을 활용하여 마카오 비단 무역의 배당금, 말래카(馬六甲) 통관세 배당금과 스페인, 포르투갈 왕실에서 직접 나온 보조금 등을 확보하였다. 발리냐노에 의해 마카오를 통해 확보된 자금이 있었기에 이후 중국선교가 지속적으로 확장될 수 있다.
 

발리냐노의 중국선교에서의 의의
발리냐노는 1606년 일본으로부터 자금과 예물을 싣고 오는 배가 도착하면 중국으로 갖고 들어가려고 기다리던 중 지병 요독증(尿毒症)이 다시 재발하여 1월 20일 새벽 마카오에서 67세로 생을 마감했다. 선배 사비에르와 마찬가지로 발리냐노도 비록 죽을 때까지 그토록 갈망했던 중국 내지로 들어가지 못했지만 중국선교 사업을 개척한 그의 공로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아낌없는 존경을 받았다. 루지에리는 “발리냐노 신부가 없었다면 중국 기독교 선교가 어떻게 되었을까?”3)라고 한 바 있고, 마테오 리치는 발리냐노를 “일본과 중국의 문호 즉 마카오 선교의 촉진자”, “중국선교 교구의 아버지”4)라고도 했다. 발리냐노는 이후 꽃 피운 중국선교단의 적응성 선교전략의 원대한 기획자요 조직자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주              

 [미] 喬納森·斯彭斯 著, 王改華 譯, 《利瑪竇傳》, pp.51~53.
 羅漁 譯, 《利瑪竇書信集》 下冊, p.431.
 羅漁 譯, 《利瑪竇書信集》 下冊(附錄), p.426.
 羅漁 譯, 《利瑪竇書信集》 上冊, p.133; 下冊, p.319.

 




사진 |
http://www.wikiwand.com (2019.4.2 열어봄).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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