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지난호 
북쇼핑
2018.12.4  통권 196호  필자 : 유전명  |  조회 : 3718   프린트   이메일 
[특집] - 특집/ 한국 화교교회의 두 거목, 유전명 & 유소충 목사님의 목회 40년을 돌아보다
목회 40주년을 지나며


 중국 산동에서 조선(남한)으로 이주한 우리 가족 

먼저 우리 가족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하고 정착하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1920년대 중국 산동(山東)에서 조선으로 내려오셨다. 당시는 산동의 대이동시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 힘들었기에 그들 중 일부는 중국의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가고, 일부는 지인과 친척을 통해 무작정 배 타고 허가도, 신분증도 없이 조선의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그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던 때였다. 조선에 가면 목수, 석공, 장사꾼 등 무슨 일이든 하여 돈을 벌 수 있었기에 중국에 있는 것보다 나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몇 년이 지나 생활이 좀 안정되자 어머니와 큰 형을 데리고 다시 내려오셨다. 이후 둘째부터는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모두 6남매를 이루게 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는 인천 주안까지밖에 피난을 가지 못했지만 다행히 농촌지역이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전쟁이 끝난 뒤 정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5, 60년대에 현재는 한성교회의 마당이 된 지역과 그 근처에는 화교들이 밀집해 살았던 화교촌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화교들과 교류하며, 화교학교를 다니며 자랐다. 우리는 한국에서 살았으면서도 정작 한국 사회에 진입할 기회는 내가 신학교 입학할 때까지는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 태어났어도 한국어를 잘하지 못하는 이유 아닌 이유가 되었다.


거듭남과 헌신의 과정

한성교회와 인연은 우리 집이 바로 교회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의 주일학교에 다녔다. 1958년에 예배당을 건축할 때 교회 마당에는 여기저기 벌려 놓은 건축자재들이 많았는데 이것은 어린 우리에게 좋은 놀이터가 되었다.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면서 사춘기가 찾아오고 무엇인가에 대한 반항심이 생겨서 교회를 잘 다니지 않았다. 중3이 되었고, 고3인 셋째 형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셋째 형은 교회 수련회에 나를 데려갔는데 나는 거기서 선생님들께 난처한 질문을 하며 그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애기가 태어나 1년도 못 살고 죽으면, 예수님도 모르는데 이 아기는 어디로 갑니까?”
“공자는 예수보다 일찍 계셨던 분이라 예수님을 모르는데 그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우리 집과 가까웠기 때문에 오락가락 다니며 교회에서 탁구도 자주 치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내가 고1-2 때 교회에는 목사님도 안 계셨고, 전에 계시던 선교사님도 떠나고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현재 대만에 계신 화교 장후이량(張惠良) 목사님과 함께 교회 고등부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전쟁이 끝난 그 시절 교회에서 밀가루도 나눠주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당회장실 자리가 된 곳에 침상 2개를 놓고 교회의 사찰역할을 하며 수련회까지 준비를 했다. 당시 교인이 100여 명 정도였던 한성교회는 목회자가 부재중이었지만 장로님과 집사님이 교회를 관리하고 계셨고, 주일에는 강사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렸다.
 

나는 1964년 고2 때 참석한 수련회를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강사로 오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만열 목사님께서 ‘거듭남의 중요한 진리(重生要道)’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셨다. 수련회에 참석자한 사람은 7-9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때 그 말씀으로 성령의 감동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 그래서 고2 때부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된 것이었다. 
  

                     (중간 줄 우측에서 두 번째) 
 
 1966년 연합수련회가 대전 목자관에서 개최되었을 때, 강사는 지순치(吉順頎) 목사님이셨는데 고 이만열 목사님도 참석을 하셨다. 나는 여기에서 성령의 뜨거운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 헌신을 하게 되었고 이 목사님께 세례를 받았다. 당시에 우리는 강사사례도 제대로 해 드리지 못하고 칫솔, 치약, 수건, 비누 등을 예쁘게 포장해서 드렸다. 하지만 목사님은 그래도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수련회 기간 동안에 수요일 저녁에는 대전 화교교회의 수요예배에 참석했다. 리밍시(李銘熹) 전도사님께서 말씀도 전하시고 성가대도 인도하셨다. 교회는 일반 주택 2층에 장의자가 10개 정도 놓여 있었다. 나는 겉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지어진 지가 꽤 되었는지 교회 내부가 낡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사모님은 중국에 계시기 때문에 함께 살지도 함께 사역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전도사님은 한국에서 혼자 생활하며 이렇게 열심히 사역을 하시는데, ‘우리 화교들은 다 어디로 갔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예배를 드리는 내내 눈물이 흘렀다. 그때 나는 한국화교를 위해 헌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어느 날 정동길에서 덕수궁길을 따라 걷는데 ‘화교를 위해 헌신하라’는 음성이 들렸다. 순간 나는 누군가 나에게 말을 하는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한국의 화교교회에는 한국화교 목회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아랫줄 우측에서 두 번째) 
 
장 목사님은 목회자로 헌신을 한 뒤 한국을 떠나 대만의 신학교에 진학을 하셨다. 나도 집에서 독립할 생각으로 홍콩이나 대만으로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우리 가족들이 먼저 대만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남동생은 한국에 남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와 남동생, 우리 두 형제만 한국에 남게 되었다. 한국에 남기로 결정했으니 한국의 신학교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신앙과 헌신의 길로 인도해주신 고 이만열 목사님과 상담을 한 뒤 1970년에 서울신학대학교에 지원을 했다. 한국의 교육기관에서 공부하는 것은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언어 문제로 힘들었지만 미국에서 유학을 하셨던 이상훈 교수님의 격려와 위로에 큰 힘을 얻었다. 
 

나의 과 친구인 한명철은 필기를 할 때마다 내 것까지 해주었다. 이렇게 나는 여러 친구들의 도움으로 4년을 무사히 감사하게 마칠 수 있었다. 학비 또한 당시 학장님께서 미국에서 외국인학생을 위한 장학금을 모금해 오신 것을 유일한 외국인이었던 내가 혜택을 받았다. 이 일로 학장님과 사진도 같이 찍고 학교신문에도 기사가 실리고 그야말로 학교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언어 문제와 학업 외에 당시에 힘들었던 것은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아내와 연애를 시작했는데, 1972년에 아내가 대만의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어 잠시 헤어져야 했다. 우리는 방학이 되어야만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애틋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결국 한성교회에서 만난 우리는 8년 동안을 연애하고서야 1976년에 결혼을 했다. 이때 유학을 가거나 선교 사역을 할 때 언어가 부족하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게 되고 소통에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크게 깨달았다.
 

어릴 적 다니던 교회에서 평생 목회지가 된 “한성교회”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沒有違背那從天上來的異象)”라고 고백한 바울과 같이 평생을 한 교회에서만 자라고 공부하고 목회까지 했다. 사실은 한성교회를 떠날 기회와 시험은 여러 번 있었다. 한 번은 미국에 살고 있는 셋째 형이 둘째 형의 미국비자를 신청할 때 내 이름도 하나 더 추가해서 나도 미국비자를 받고 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한국화교들을 위해 헌신을 했고 그들을 위한 교회 사역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신청도 하지 말아야겠다면서 단호히 거절했다.
 

또 한 번은 서울신학대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오신 한인침례교회의 한 목사님과 대만에 가서 대만의 여러 교회를 돌면서 집회를 할 때 통역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당뇨가 심했던 목사님은 당신이 만일 길에서 쓰러지면 호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서 얼른 입에 넣어 달라고 내게 부탁을 하기도 하셨다. 대만에서 모든 일이 끝나갈 무렵, 나를 좋게 보신 목사님은 나한테 “미국에 가고 싶지 않느냐, 미국 가서 공부하고, 침례교 교단에 가입하면 싱가포르로 파송해서 싱가포르 지부 책임자로 보낼 수 있다”라고 하시며 좋은 조건을 제안하셨다. 그러나 역시 한국화교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기에 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거절했다. 협력은 할 수 있겠으나 주객이 전도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한성교회의 전도사 시절에는 담임목사이신 딩신(丁信) 목사님께서 “부산 화교교회에 목회자가 없으니 부산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개인적으로 갈등도 되었지만 부산의 화교교회이니 가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이 들 무렵 딩 목사님의 미국비자가 나왔기 때문에 그냥 한성교회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냥 한성교회에 남게 되었는데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던 부산 화교교회에서는 난색을 표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한성교회를 이웃해서 살아온, 그저 교회 마당을 밟으며 교회를 오가던 나는 고1 때부터 한성교회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신학교 4년 내내 한성교회에서 사역을 했다. 이 시기에는 딩신 목사님이 계셨고, 나는 성가대 지휘와 중고등부 지도를 맡았다. 1978년 7월 7일 여한중화기독교연합회(旅韓中華基督敎聯合會)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 화교교회로 갈 뻔 했다. 하지만 또 다시 10월에 한성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게 되었다. 

  

  

 

목회 초기의 한성교회
담임목사이셨던 딩 목사님은 7월에 미국으로, 교회의 어르신인 텐난탕(田南棠) 장로님은 10월에 대만으로 떠나시게 되었다. 교회의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분들이 거의 동시에 떠나시게 되어, 교회에서는 젊은 목회자에 대한 근심이 많았다. 그때까지 한성교회는 청년목회자의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동안 한성교회 재정의 거의 반을 충당하실 정도로 텐 장로님 가족은 경제적으로도 한성교회에 대한 기여가 컸다. 11월 추수감사주일은 다가오는데 교인들은 교회의 큰 기둥이 둘이나 빠지셨으니 교회의 헌금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시험대이자 하나님의 일하심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라고 나는 생각했다. 예배당의 강단 옆에 있는 예배준비실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했다.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성도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헌금하며 함께 교회를 섬기게 해달라고, 그리고 나도 나의 한 달 사례비를 하나님께 드렸다. 드디어 추수감사주일 예배를 드리고 성찬테이블에서 주일헌금을 계수하던 집사님들이 연신 "주님, 감사합니다!(感謝主!)"를 외쳤다. 그해 추수감사주일 헌금은 예년보다 많았을 뿐 아니라 한 사람에 의한 헌금이 아닌 모든 성도들이 예년보다 많이 드렸기에 모두가 놀랐다. 이로써 성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하는 하나님을 깊이 만났으며, 사람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실하게 경험한 뒤부터 한국교회를 참고해서 교회조직을 구성하고, 교회행정체계를 구축하고, 교회예산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연로하신 집사님들의 이러한 변화를 쉽게 이해를 시키는데도 노력을 하였다. 지금까지 전무하다시피 한 교회행정에 대해 혼자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며, 잘 모르는 것은 배워가며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도 겪어야 했다. 한국의 여러 교회들을 참고했는데 그중에 특히 10여 년 동안 중국어 성경공부를 가르치며 만난 권사님과 장로님들을 통해 영락교회의 성장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점차 조직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되었다. 십일조와 기타 헌금봉투함도 그때 처음 제작한 것으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목회 초기, 교인들은 순수했고 따르는 청년들이 많아서 사역을 재미있게 했지만 교회를 건축할 무렵 의견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 1978년 담임목회를 시작하던 그 즈음은 한국에서 살기가 힘들고 불안감에 시달리던 한국화교들이 대거 이민을 가기 시작할 때였다. 교인들 중에도 가족 단위로 떠나는 일이 생기다 보니 교인 수가 갑자기 줄어들게 되어 목회에 대한 근심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침 이때에 한국을 방문하신 토마스 왕(王永信) 목사님과 이 문제에 대해 의논을 했는데, 목사님은 “크게 생각하세요. 한성교회 교인이 이민을 가도 하나님 나라 성도가 감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른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것뿐입니다” 라고 말씀을 해주셨다. 이것은 나의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나의 생각의 전환을 도와주신 이 말씀을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다.
 

한국교회를 참고하며 한성교회의 조직과 행정 등에 대해 연구하던 차에 교회건축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었다. 신학교 동창이 있던 충남 학봉교회, 장충단의 경동교회 등 아름다운 교회들을 탐방하러 다니기도 했다. 교회를 섬기면서 새롭게 생겨난 관심영역이다. 지금도 산책할 때 새로 건축하거나 리모델링하는 건물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외부에 기록된 건축자의 설명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가능하면 들어가서 볼 정도로 습관이 되었다.
 

건축 관련 에피소드
1992년 교회 창립 80주년을 앞두고 하나님의 은혜로 본당 앞 조그만 건물을 한성교회 80주년 기념관으로 재건축하게 되었다. 이곳은 1978년 딩신 담임목사님 계실 때 3층 건물을 짓고 일부는 외부에 세를 주고, 사택과 교회도서관, 여러 교실로 사용하려고 했는데 첫 집세를 받을 즈음 딩 목사님께서 미국으로 떠나시게 된 관계로 처음부터 내가 관리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뒤 원래는 본당 옆으로 확장하려던 것을 설계사무소의 제안과 이후 교회 당회를 통해 이 3층 건물을 재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지금은 그런 용기가 없지만 그때는 젊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교회재건축을 결정하고 나서 건축비 때문에 시련이 많았다. 게다가 집사님들은 1991년 1월에 일어난 걸프전쟁으로 인해 세계경제가 침체되면 곧바로 한국에도 불경기가 닥칠 텐데 교회재건축은 누가 책임지겠냐며 걱정이 대단했다. 결국 담임목사도 없는 자리에서 회의를 열고 재건축 결정을 뒤집었다. 이에 ‘한성교회 출신 해외 이주 형제자매들에게 광고를 해서, 이미 건축헌금도 받았는데 번복하기는 어려우니, 다만 걸프전이 6개월 이상 장기화하면 재건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알고 포기하기로 하자’고 했는데, 걸프전은 한 달 만에 끝났다. 감사하게도 집사님들도 더 이상 반대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화교들은 전쟁소식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 1970년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때도 이민 간 화교들이 많았다. 재건축을 시작한 뒤에 지하를 공사하던 사람들이 도망가는 일이 생기는 바람에 공사는 오랫동안 진행이 되지 못하였다. 이런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 빚 없이 교회 별관을 재건축하였다.
 

2002년 한성교회 90주년에는 2층 본당을 리모델링했으며, 2012년 100주년을 앞두고 예배당 1층과 90주년 때 리모델링하지 못한 기타 부분을 리모델링했다. 그리고 2018년 헌당 60주년(지금의 한성교회 예배당은 1958년 건립됨)을 앞두고 1992년 재건축한 별관의 3-4층을 리모델링했다. 교회건축은 교회를 돌보는 목회자의 책임이고, 교회도 시대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필요와 하나님이 주신 성전을 잘 가꾸고 보전해서 후손에게 전해줄 책임까지 생각해야 할 일이다.
 

한국 화교교회 목회와 중국선교
한성교회 창립 80주년을 맞이하여 별관 재건축을 완공했던 1992년, 그해 8월에 한국은 대만과 단교를 하고 중국과 수교를 맺는 역사의 전환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한성교회는 이 재건축을 통해 중국선교를 더욱 구체적으로 하기 위해 많은 섬김을 시작했다. 이로써 처음부터 지금까지 동역하고 있는 중국복음선교회는 사역을 확대해 나가며 실제로 중국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1984년 한성교회 화교청년들과 중국어를 배우러 온 한국청년들은 교회 내 한 그룹 ‘地極團契(띠지 코이노니아)’1) 만들어 중국선교를 준비했다.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점차 해외 화교들이 고향 방문을 할 수 있었던 시기에 해외 화교교회에서는 한국보다 일찍이 중국선교를 시작하고 있었기에 그 문서들을 한성교회에서 접할 수 있었다. 중국선교에 대한 해외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접하고 전하고 중국 대륙의 복음화를 위한 중보기도와 중국어 성경공부 그리고 중국연구로 모임을 시작했다.
 

당시 중국은 ‘죽의 장막’이었던 시절이었음에도 하나님은 한국의 청년들을 한성교회에 보내주셔서 중국선교의 비전과 사명을 주시고 장차 다가올 중국선교를 본격 준비하게 하셨다고 생각한다. 이에 교회 내 기도그룹이었던 ‘띠지 코이노니아’는 1985년 여름에 단기선교팀을 대만에 보냈다. 그리고 중국선교를 홍보하기 위해 《띠지(地極)》 잡지를 창간하여 문서 사역을 시작하였고, 1988년부터 중국선교 전문잡지인 《중국과교회》와 소식지인 《중국과복음》을 출판하여 널리 보급했다. 또한 중국선교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여 중국교회의 상황과 선교적 현실을 전하는데 적극 힘써 왔다. 이와 같이 중국선교 헌신자와 관심자들을 위해 활동공간을 형성하게 되면서 이 모임은 국내 중국선교의 하나의 모태가 되었다.  

 

처음에는 정식 선교회도 아니고 작은 모임으로 시작하였지만 주님께서 주신 비전으로 1989년에는 정식 선교기구로 체제를 정비하여 ‘중국복음선교회’로 확장하였다. 기존의 정기 목요모임과 출판 사역, 단기선교 사역, 선교세미나 사역은 이후 보완된 인력을 갖추면서 더욱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대구, 부산, 대전, 충주에 지부 설립을 하고 지방에서도 사역을 전개하였다. 무엇보다 중국 대륙 가정교회에 대한 지원 사역과 지도자훈련, 신학교육 사역도 확대 실시하였으며 선교회 소속 첫 중국선교사를 중국 현지에 파송하게 되었다. 중국복음선교회는 사역을 진행하면서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사역에 있어 맹점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선교를 위한 연구와 선교사훈련’에 대한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고 이를 위한 인재와 제반 여건들을 준비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한성교회 별관 재건축의 완공은 중국연구소와 훈련원이 정식으로 문을 열고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였다. 또한 한중수교 이후 한국에 체류하는 중국인산업연수생이 늘어남에 따라 선교회는 이들에 대한 전도 사역을 독자적으로 혹은 타선교회와 함께 펼쳤다.
 

1994년 중국복음선교회 창립 10주년을 맞이하여 조나단 차오(趙天恩) 박사가 총재로 있는 CMI (中國福音會)2)의 한국지부로 전환하여 국제 중국선교단체와 사역을 보다 전문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일에 합의하였다. 이후 단일 부서로 사역해 온 중국복음선교회는 부서도 중국선교사역부/중국농아사역팀, 중국선교사훈련원, 중국교회와선교연구소, 애화도서관으로 세분하고 확장하였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중국복음선교회 본부 스태프들은 현장으로 많이 나가는 변화가 생겼다. 위와 같이 조직적인 사역을 본부에서 하기는 점차 어려워졌지만 현장에 있는 선교사들을 지원하며 여전히 한성교회는 중국복음선교회와 함께 해외 화교권 기독교 기구와 중국선교단체들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동역하고 있다. 지금까지 해왔듯이 ‘중국선교와 선교중국을 위한 한•중 교량역할’을 충실히 해나가며 앞으로도 이 길에서 섬기는 자의 자리에 설 것이다.
 

시대의 변화·교회의 변화·사역의 확장
1992년 한·중수교로 우리 교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점차 화교들은 줄어드는 반면 중국 대륙의 문이 열리니 중국인노동자들이 우리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같은 중국인이라도 서로 문화권이 다른 곳에서 생활했기에 처음에는 서로 융화되기 쉽지 않았다. 이것 또한 한성교회와 한국 내 화교교회가 본격적으로 변화해야 함을 알리는 신호탄인 것을 직감했다. 세대교체가 이뤄져야 할 시기에 화교교회는 청년들과 더불어 교인이 줄고 있는데 대륙과 대만, 홍콩, 동남아 등 여러 나라에서 들어오는 중국인들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한국 내 화교교회들이 변화해야 할 전환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에 강단에서 설교할 때 시대적 변화와 필요를 전하며, 우리 성도들이 좀 더 넓은 마음과 중국인 특유의 마음으로 서로 간의 차이를 잘 극복해 나가며, 이제는 점차 ‘전통적인 화교(華僑)’3)교회에서 각지에서 들어오는 중국인들을 품는 화인(華人)4)교회로 전환해가야 할 때임을 강조하고 있다.
 

- 한성교회 목회와 한국 내 일곱 화교교회5) 연합사역
- 중국복음선교회와 국제 CMI와 함께해 온 중국선교
- 중국선교협의회를 통한 한국 중국선교단체들과의 연합사역
- 본부가 홍콩에 있고 세계 각지에 지역위원회가 있는 ‘세계화인복음사역연락중심(世界華人福音事工聯絡中心, Chinese Coordination Centre of World Evangelism)’의 한국지역 주석으로서 섬김과 사역
- 기타 국내외의 복음사역
 

등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바쁘고 분주하게 40년을 지내왔다. 그러다 보니 가정적으로 아내에게 늘 부담을 주게 되었고, 세 자녀를 양육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자녀들은 하나님 은혜로 건강하게 성장해서 각각 가정을 이루고 계속해서 교회봉사를 하게 하심에 감사를 드린다. 교회 사역에서도 가정에서도 아내의 공은 매우 크다. 목회 40년의 공로상은 아내에게 주어야 마땅하다. 아내로 인해 지금까지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세 자녀와 두 며느리와 사위 그리고 손자들까지 더해져 자손들을 통해 얻는 힘이 크기에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
 

2018년 10월 은퇴예배를 드린 뒤
부임 초기에 이민으로 교인들은 한성교회를 많이 떠나갔다. 그때는 정말 낙담이 되고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나의 우려와는 달리 하나님은 교회도 지켜주시고, 떠나간 교인들이 해외 각지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삶을 간증하는 것을 보니 감사와 보람을 느낀다. 이렇게 해외로 나간 교인들은 목회 40주년 감사 및 은퇴예배와 헌당 60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약 70여 명이 모(母)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갔다. 올 한해 이 날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바쁘게 달려왔는데 모두가 다 무사히 안전하게 끝마치고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예배와 만남의 시간을 가지게 되어 한없이 감사하다.

 

 

앞으로는 한성교회에서 매달 첫 주일에 드리는 예배와 성찬식 그리고 매년 부활절에 하는 세례식과 절기예배만 담당하고, 다른 주는 후계자로 세운 전도사님에게 모든 것을 맡길 예정이다. 아직 우리 전도사님이 목사안수를 받지 못했기에 그때까지는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 하고 있고 또한 해야 할 일을 계속하면서 외부 신학교 강의와 대륙의 지도자훈련도 할 수 있을 때까지 할 예정이다. 쉬어 가면서 개인적인 취미생활의 시간도 갖고 자기 계발도 게을리 하고 싶지 않다. 그간 1970년대부터 수집해 온 우표도 정리하고 서예와 분재도 배우려고 한다.


목회와 신앙

40년이 빠르게 지나갔다. 목회는 애들 키우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다독거려주고, 먹여 주고, 책망해야 할 때도 있는데 무엇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힘들고 끝까지 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목회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것이고, 또한 기본적으로 부부와 가족이 함께 한 마음으로 한 뜻으로 섬기는 데서 더욱 힘을 얻을 수 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주일에 한 번 예배당만 와서는 참 신앙이라 할 수 없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하나님을 따르고 동행하고,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잘 인도해야 한다. 신앙생활을 오래오래 해도 타인의 한마디 혹은 무슨 일 때문에 교회에 안 가겠다고 하는 교인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왜 상처가 없었겠는가. 상처를 자꾸 되새기지 말고 상처를 잊어버리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목회학 강의를 하면서 얘기하고는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망각’이라는 좋은 선물도 주셨다. 사실 지금도 생각하면 울컥하는 상처들도 있지만 티를 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이겨내려고 많은 애를 써왔다. 목회를 할 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한 사람이 가면, 또 다른 사람이 와서 힘들게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목회는 견디기 힘든 것이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목회자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받은 상처를 잘 이겨내며 인내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인생 70에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있는데 하나님이 건강을 허락해주시고 좋은 영성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도와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고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란다.



미주          
1) 地極 = 행 1:8 땅끝
2) CMI는 세 가지 비전 ‘三化비전-중국의 복음화, 중국교회의 하나님나라화, 중국문화의 그리스도화’이 있다. 이 삼화비전은 이후 중국복음선교회의 사역을 파송•연구•훈련 사역으로 분화하여 더욱 전문적으로 중국선교 사역을 추진하도록 했다. 현재 홍콩, 대만, 필리핀, 미국, 캐나다, 한국에 지부가 있다.
3) 1949년 이후 중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정착한 중국인들과 그 후손들을 말한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국에 들어온 중국인을 한성교회에서는 ‘신이민(新移民)’이라고 한다.
4) 현재 거주하는 나라의 국적을 취득한 중국인과 그 후손들.
5) 한성, 영등포, 인천, 수원, 군산, 대구, 부산에 여한중화기독교연합회 소속의 화교교회가 있다.





 

 

유전명 | 旅韓中華基督敎 漢城敎會 목사, 중국복음선교회 대표

    인쇄하기   메일로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