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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4  통권 196호  필자 : 김주한  |  조회 : 2521   프린트   이메일 
[쉬어 가는 페이지]
퇴계 신학 시론 (성학십도로 보는 성리학 세계 12)-아시아 신학의 길-

 

종교가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문주의 영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연주의적 인문주의 정신을 기초로 하고 있는 퇴계 사상에 대한 고찰은 한국의 기독교가 기복 신앙을 넘어 자기 수양의 영성을 마련하는 데, 또한 서구 주도의 문명관을 수정하고 자연친화적인 영성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의미 있는 연구가 될 것이다. -양명수-

 

세계관: 신앙 vs 수양
오늘날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관심과 교육은 활발하다. 그러나 문화와 시대, 개인에 따라 세계관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상이해서 과연 하나의 단일한 세계관을 그릴 수 있는지조차 의문일 때가 많다. 우리는 성경(text)뿐만 아니라 상황(context)에도 영향을 받는 것이므로 우리의 동일한 신앙이 결코 우리의 상황을 동일하게 재단하지는 못한다. 

아시아는 오랜 세월 기독교 문명권과는 다른 종교와 문화, 정치와 경제 시스템을 발전시켜왔다. 기독교가 아시아에 전래될 때의 선교란 상황을 이해하려는 선교였다기보다는 상황을 이기려는 선교였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중심의 문화가 절대적으로 우월하지 않다는 인식과 문화상대주의적 관점, 혹은 상황화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들이 포스트모더니즘 사조 안에 활발히 작용하면서 비서구문화권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다양한 움직임들이 생겨났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타종교를 바라보는 관점, 특히 유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언제나 신앙 대 수양의 구도였다. 물론 동양사상을 ‘종교’라는 범주 안에 담아내려는 시도 역시 기독교적인 입장에서의 종교개념이기 때문에 이미 종교와 정치, 교육과 문화가 더욱 치밀하게 유기체적으로 조합된 유학을 유교라 이름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유교가 종교인가 비종교인가라는 논의가 활발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기독교가 생각하는 종교라는 틀 자체가 협소해 보이고 동양사상에서 생각하는 정신 혹은 사상으로서 유학의 깊이는 신앙이라는 개념과 행위를 넘어 더욱 실천에 정향되어 있기도 하다.

이제는 사영리로 간단히 대변되는 기독교의 진리 도식에서 그 이외의 문화권에서 오랜 시간 역사적 실험과 인간적 실천이 있어왔던 수양의 종교형태가 아무런 의미와 가치를 던져주지 못하는 것인지 오히려 되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오늘날 신앙의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자기수양과 공동체 윤리가 부족해서 나타나는 개인적 일탈 혹은 교회적 범죄들에 대하여 신앙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이미 우리의 양심과 실천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인간의 죄악을 다시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께 책임을 지우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신앙과 수양을 두 구도로 놓고 타력구원과 자력구원을 논하며 안주하던 시대가 지나고 구원받았다는 이들의 비양심적인 세상살이를 보면서 남에게 전도하려거든 자기 자신부터 새롭게 전도하라는 다소 거친 표현으로 유학의 수기치인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은 수양의 중심이고 수양은 신앙의 표현이다. 더 이상 따로 떼어놓을 수 없고 이제는 둘을 같이 놓아야 한다. 

비교에서 대화로
기독교가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기독교 윤리가 얼마나 우월주의 위에 서있는가를 알 수 있다. 진리는 절대적이지만 인간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절대성을 확보했다고 인식될 때 절대성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우리 역시 상대적인 세상에서 상대적인 인식과 실천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할 때에만 대화가 가능하다. 

비교는 항시 서로를 차이를 부각시킨다. 절대적 진리를 소유했다고 믿는 신앙인들에게 비교란 더욱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만큼의 차이를 확인하려는 작업에 불과하다. 결국 기독교인들이 바라보는 비기독교인들에 대한 인식이란 차별일 때가 많다. 그만큼 모이는 교회는 쉽지만 흩어지는 교회는 어렵다. 교회의 벽이 참 높다.

대화라고 하는 것은 차이가 아닌 공통점을 부각시킨다. 우리가 참으로 인종과 성별, 문화, 가치관과 세계관의 차이를 벗어나서 하나의 똑같은 인권을 지닌 인간으로서 만난다면 차별 없이 대화할 수 있는가. 그리고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에 조건이 붙을수록 그것은 사랑이 아니게 된다. 대화란 사랑하기 위해 우리 안의 조건들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만나는 것이다.

동양사상, 유학 역시 오랜 시간 편견 가운데 있어 왔다. 수양의 개념부터가 그렇다. 그것은 오히려 신앙이 깊게 배어 있는 인간의 참된 본성과 실천가능성에 대한 신앙에서부터 출발한다. 사실 인간을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으로 규정한다면 인간의 종교성 혹은 신앙은 어떤 형태로든 표출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세계관 이외의 범주를 어떻게 긍정하고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차이가 아닌 공통분모가 사랑의 접점이 될 수 있고 만남의 장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다시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조차 차별과 갈등을 풀어갈 수 없는 교회의 아픔과 고민 속에서 교회 밖에 대한 포용은 더 큰 욕심일지도 모른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기독교 세계관이 제시하는 궁극적 비전인 임하실 하나님의 나라와 임하신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어떤 세상살이를 해나가야 하는가. 돈에 관심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사실은 돈에 제일 환장한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저 세상을 향한 우리의 도도한 영적 추구가 우리의 입으로는 거룩을 말하면서도 우리의 속으로는 가장 세속적인 것에 골몰하는 모습일 때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서 개혁을 선도하는 존재가 아닌 세상에서 개혁되어야 할 존재가 되고 만다. 

근본주의와 번영신학의 양극단을 함께 움켜쥐고 소비하는 신앙생활을 넘어 다시 자연 안에서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그런 세계관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되었던 퇴계의 겸손한 미덕을 본받을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선의 역사가 욕망으로 치닫고 아니 어쩌면 전 세계가 힘과 지배의 논리로 살아갈 때 동방의 작은 나라의 한 유학자 퇴계는 이 세상을 지탱하는 원리와 우리가 따라야 할 윤리를 사랑과 생명의 관점에서 제시하였다. 우리가 하나의 세계관 안에 살고 있는 것보다 여전히 수많은 세계관들을 만나야 한다. 유학의 영성 혹은 세계관은 오늘날 서구중심의 기독교 세계관에도 새로운 활력이 되어 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고유한 사상, 역사, 전통을 잘 모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목소리가 작게 들리기 때문이다. 오늘날 포용과 혼합을 혼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안의 갱신을 위해 그리고 더욱 우리다워지기 위해 우리의 상황(context)을 새롭게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초야의 즐거움 – 퇴계 이황


나는 본시 산야(山野) 체질

고요가 좋아라 번잡은 싫고.
번잡을 좋아해선 아니 되지만
고요만 좋아해도 치우친 거지.
그대여 대도(大道) 지닌 사람을 보게
저자를 깊은 산과 같게 본다네.
도리에 맞다면 행할 뿐이니
가도 되고 돌아와도 되지.
하지만 세속에 물들까 두려우니
조용히 수양함이 차라리 낫지.



[편집자주]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가던 필진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후에 이 청년 필진은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에 진학하여 기독교와 동양사상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2015년 6월호부터 “쉬어 가는 페이지” 코너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필진은 ‘쉬어 가는 페이지’인데 주제가 재밌을지 모르겠다며, 갈피를 잡기가 힘들지만 계속해서 써 나가겠다며 매번 결심을 새롭게 하며 이번 호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번 호를 끝으로 아쉽게도 이 코너를 ‘진짜’ 쉬게 됩니다. 필진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전하는 메시지가 독자님들께도 큰 울림이 되기를 바라며, 지금까지 함께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김주한 | 길가에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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