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중국을주께로>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영등포중화교회 박희원 목사입니다. 지난 40여 년 동안 영등포중화교회를 담임해 오셨고,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은 유소충 목사님의 뒤를 이어 지난 9월 30일부터 담임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담임 사역을 시작한 지 이제 막 두 달이 채워지고 있는데 그야말로 신참 냄새를 풍기며 주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을 바라며 나가고 있습니다.
먼저 이번 호 웹진 <중국을주께로>(이하 <중주>) 편집장님으로부터 원고청탁을 받고 ‘다음 사역자가 꿈꾸는 영등포중화교회’라는 주제로 독자 여러분과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다섯 가지의 소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려고 합니다. 첫째, 영등포중화교회와 만남, 둘째, 유소충 목사님의 후임이 되기까지, 셋째, 한국 사회 속에서 한국 화교교회가 품어야 할 비전, 넷째, 세계 속에서 한국 화교교회가 품어야 할 비전을 나누고 맺는말로 마치려고 합니다. 첫째, 영등포중화교회와의 만남 저는 영등포중화교회에 오기 전에 두 곳의 한국교회를 거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유년기 시절은 서울 신도림의 한 감리교회에서, 청소년기는 서울 개봉동의 한 고신측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유년 시절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주변 환경에 이끌려 목사가 되겠다는 장래희망을 품고 자랐습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주변 환경을 통해 저를 사역자의 길로 인도해주셨음을 보게 됩니다. 어렸을 적에 저희 집은 교회건물 안에 세를 들어 살았기 때문에 교회의 온 구석구석을 다니며 놀았던 점이나 당시 담임목사님의 아들과 자주 어울려 놀았던 일들은 저에게 교회는 무엇보다 우리 집 같았고 마음껏 놀 수 있는 놀이터였습니다. 저희 집이 개봉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저희도 집 근처에 있는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중3이 된 저에게 중국선교에 대한 비전을 심어 주셨습니다. 어느 계절인지는 잊었지만 그날은 청소년 헌신예배를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초청된 강사님은 중국선교사님이셨습니다. 그분의 성함과 당시에 하셨던 말씀은 사실 기억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만 그때 그분이 신고 오셨던 신발은 기억에 선명합니다. 바로 낡은 운동화였습니다. 설교를 하러 오신 분이 검정구두를 신지 않았던 점은 매우 보수적이라는 고신측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저를 깊은 생각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 운동화를 신고 산 넘고 물 건너 복음을 전하러 다니셨을 것을 생각하면, 그 운동화는 어느 신발보다 아름답고 빛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저는 “하나님 저도 낡은 운동화를 신겠습니다.”라고 결단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1999년 1월 고3이 되는 해부터 영등포중화교회에 출석을 하였습니다. 당시 저희 어머니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중국어를 공부하고 계셨는데 중어중문학과 교수님 가운데 중국어문선교회 박성주 대표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박성주 대표님을 통해서 한국 화교교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저의 비전이 중국선교사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터라 저에게 화교교회에 가 보는 것은 어떨지 권해주셨습니다. 청소년기에 많은 애정을 쏟아 부었던 교회를 떠나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입 시험을 준비하는 중대한 시기에 중국선교의 비전을 확고히 해주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으며 저는 영등포중화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영등포중화교회 출석을 권해주신 어머니와 한국에 이러한 교회가 있다는 정보를 어머니께 알려주신 박성주 대표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만남’은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매우 중대한 요소입니다. 영등포중화교회와의 만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둘째, 유소충 목사님의 후임이 되기까지 저는 영등포중화교회에서 고3 시기를 보내고 유소충 목사님의 추천을 받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장로회신학대학교로 모여들었기에 모(母)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에서 전도사로서 사역하는 일은 매우 보편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역자를 특별하게 존대하는 한국교회의 문화 안에서 신학생은 자신의 코흘리개 시절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모 교회를 떠나 사역하는 것이 어쩜 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느 동기생들과는 달리 모 교회인 영등포중화교회에서 사역을 해나갔습니다.
앞으로 중화권에서 사역을 하려면 지금부터 중화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유소충 목사님의 지도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동기들 중에는 다른 교회에서도 사역을 해 봐라, 관계도 넓히고 또 다른 사역현장도 체험해보는 것은 어떠냐며 사역지 추천도 해주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았습니다. 당시 영등포중화교회에서 제게 주어진 섬김은 토요일 청소와 영등포소학교 어린이예배 보조교사, 그리고 성가대원이었습니다. 중국어 초보자인 한국인신학생이 화교교회에서 할 수 있는 섬김의 영역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유소충 목사님과 상담도 해보았습니다. 유 목사님은 그래도 한 길을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해주셨습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해결해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어를 습득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여겼기 때문에 마음의 부담은 계속하여 이곳에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대학 시절 진로에 대해 나름 깊이 있게 고민하는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수월하게 대만 가오슝(高雄)에 있는 성광신학원의 신학대학원으로 진로를 결정하였습니다. 
2009년 8월 대만으로 유학을 가기 전에 저는 주일 아침 동역자(同工)기도회 인도, 오전 예배 사회, 오후 청년부 사역을 하였습니다. 대만에서 3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2012년 여름에 본 교회로 돌아와서 같은 해 9월 전도사로 부임하여 전임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사역 분야는 대만으로 유학 가기 전에 했던 사역을 포함하여 매달 한 번의 주일 오전 설교와 행정 사역이 더해졌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교회의 전반적인 사역과 행정업무를 배워 나가며 유소충 목사님의 지도하에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후임을 아껴주시고 지도해주신 유소충 목사님과, 기다리며 후원해주신 영등포중화교회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셋째, 한국 사회 속에서 화교교회가 품어야 할 비전 106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중화기독교 화교교회는 현재 일곱 교회가 소속되어 있습니다. 창립 순서대로 나열하면 한성교회(1912년), 인천교회(1917년), 부산교회(1929년), 수원교회(1955년), 대구교회(1957년), 영등포교회(1958년), 군산교회(1963년)입니다. 현재 한국의 화교는 2만여 명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화교 3세들이 결혼을 하여 화교 4세들이 태어나 성장하고 있습니다. 많은 화교들이 한국인과 결혼을 하고 최근에는 귀화하는 일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화교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은 화교교회에서도 특별히 주목하는 바입니다. 1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오며 한국의 화교교회는 자연스럽게 중국 문화와 한국 문화가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역사가 깊은 화교들을 시작으로 중국에 관심이 있거나 관련이 있는 한국인, 그리고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에 한국에 들어온 신이민중국인, 그리고 꾸준히 늘어나는 조선족 동포, 그리고 대만과 홍콩 등의 화인(華人)들이 대부분 화교교회의 구성원입니다. 한국 속에서 화교교회는 이렇게 다양한 역사와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진 삶을 살며 신앙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비전을 품고 연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는 100만여 명의 중국인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중에는 유학생, 근로자, 결혼이민자, 조선족 동포 등이 있습니다. 2만의 한국화교 숫자와 100만의 재한 중국인 숫자는 비율적으로 매우 크게 보입니다. 그야말로 화교교회의 사역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한국 화교교회의 비전은 낯선 100여 년 전에도 그러하였듯이 한국땅에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섬기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그들의 정착을 돕는 차원이 아니라 그들이 한국에 오게 되는 결정을 하는 가운데도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한 것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국에 온 목적도 돈을 버는 것이 아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함이며, 공부를 하고 좋은 직장을 얻고자 하는 청년들에게는 인생의 참된 인도자인 주님을 만나기 위해 하나님이 당신을 한국에 보내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도 화교교회가 품어야 할 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넷째, 세계 속에서 한국 화교교회가 품어야 할 비전 복합적인 문화가 다양하게 공존하는 곳이 화교교회입니다. 복합적이고 다양한 것만큼 서로 조화롭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함께 나누어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더욱 더 하나가 되자는 사랑의 외침이 필요합니다.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가운데 우리와 다른 문화는 제외하고 어느 특정 문화만 강조해서는 하나가 되기 어렵습니다. 각자가 습득해온 삶의 서로 다른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는 서로 다름 가운데 공통으로 얻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화교교회의 복합성과 다양성은 사회 여러 분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우리를 지켜보는 많은 이들을 구원의 길로 초청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5절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 교회를 새로 찾아오는 분들에게 교회를 어떻게 찾아오셨느냐고 물어보면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왔다는 대답을 많이 하십니다. 한국에 관광하러 왔다가 주일이 겹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시는 분들도 대부분 인터넷에서 화인(華人)교회를 찾았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며 저는 세계 속에서 화교교회는 어떤 비전을 품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화교교회는 나그네의 안식처가 되어야 하는 비전입니다. 그리고 제가 영등포중화교회에서 20년의 시간을 보내며 느낀 것은 많은 이들이 단기간 한국에 머물다 자국(自國)으로 돌아간다는 점입니다. 몇 년 일하고 돌아가고, 몇 년 공부하고 돌아가고, 또 한국생활 적응에 실패하여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화교교회는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화교교회는 만남과 헤어짐을 하나님이 주신 세계선교의 발판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이들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게 도와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제자로 훈련하고, 훈련받은 그들이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서는 자신이 받은 복음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할 수 있게 인도하고 격려하며 지지해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맺는 말 지난 월요일에는 몇몇 동역자들과 함께 도봉산으로 등산을 다녀왔습니다. 가기 전에 인터넷으로 도봉산 등산 경로에 대해 간략한 정보를 얻었는데 도봉산은 돌이 많기로 유명하며, 도봉산 정상까지 가는 길은 계속되는 오르막길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만큼 경사도 가파르고 등산 초보자들은 안전에 주의해야 하는 산이었습니다. 하산을 하며 든 생각이 있습니다. 등산을 하는 중에 우리 일행은 수많은 나무의 잔뿌리를 디딤돌 삼아 산을 오르고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어떤 나무의 뿌리는 새끼손가락보다 얇은데 우리의 묵직한 몸무게를 지탱해주었습니다. 결코 무시하지 못할 잔뿌리의 결속력을 지닌 힘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 얼마나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뻗어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우리 화교교회도 견고한 잔뿌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화교교회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잔뿌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잔뿌리를 밟고 지나갈 때 안전할 수 있게, 험한 인생길 군데군데 있는 디딤돌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밟고 지나간다는 말은 쓸쓸한 느낌을 자아내지만 한국 화교교회는 이를 기쁨으로 여길 것입니다. 한국 화교교회의 존재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넘어지지 않고 또 신앙의 도전과 전진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 높이 도약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귀히 쓰임 받는 도구가 되는 기쁨이 충만해지리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박희원 | 영등포중화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