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창법난(會昌法難)
경교는 635년 알로폰(Alopen, 阿羅本)이 장안(長安)에 들어온 이후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100여 연간 융성하였다. 그러나 당 무종(武宗, 841 - 846 재위) 때 이른바 회창법난에 직면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회창법난은 불교가 주요 공격 대상이었으나 경교, 마니교, 조로아스터교에도 파급되었다. 회창(會昌) 5년(845년) 조귀진(趙歸眞), 유현청(劉玄靖), 등원기(鄧元起) 등 도교계 인물들이 외래종교를 배척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무종은 사부(祠部)에 명하여 외래종교 사원과 승려들을 조사하게 하였다.
《구당서(舊唐書)》 권18의 기록에 따르면, “회창 5년 하4월 사부(祠部)로 하여금 천하의 불사와 승려를 사찰하였는데, 큰 사원 4천6백 개소, 난(蘭, 작은 사원)이 약 4만 개소, 승려는 26만 5백 명이었다.” , “추7월 경자(庚子)에 폐불의 칙명을 내리자 중서문하(中書門下)성에서 상도(上都)와 동도(東都)의 사원 10개와 승려 10명만 남기도록 하자”라는 건의를 올렸고, 무종은 “각각 사원 2개와 승려 30명만 남기게 하였다.”
이어 중서성에서는 “천하의 사원을 폐하고 동상(銅像)과 종(鐘)과 경(磬)은 염철사(鹽鐵使)에 맡겨 동전을 주조하게 하고, 철상(鐵像)은 관아로 넘겨 농기구를 만들게 하고, 금은과 옥돌은 탁지부(度支部)에 이관”하여 국고로 편입하자는 건의를 하였고, “승려를 환속시켜 본관으로 돌려보내 납세호에 충당하게 하였으며, 외국인의 경우에는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이러한 건의에 따라 8월에 폐불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짐이 듣건대 삼대(三代) 이전에는 불교를 말하지 않았고, 한위(韓魏) 이후에는 불교가 점점 일어나 나라의 기풍을 그르치게 되는 것도 깨닫지 못하게 되어 백성들이 날이 갈수록 미혹당하였다. (···) 천하의 사찰 4천 6백여 개소를 없애고 승려 26만 5백 명을 환속시켜 양세호(兩稅戶)에 충당하고, 하급사원 4만여 개소를 철폐하고 토지 수만 경을 회수하고, 노비 15만도 회수하여 양세호로 삼고, (···) 경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등 승려 3천여 명도 환속시켜서 중화의 법도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라”라고 했다.1)
당시 외래종교로서 민간에 크게 확장되고 있던 불교를 탄압하려는 이러한 상소는 급격히 확장되고 있던 불교사원의 재산을 회수하고 사찰로 편입된 승려와 노비 등 노동력을 납세원으로 되돌리려는 목적도 함께 그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사찰의 귀금속과 재산을 몰수하고 사찰 인력을 생산 인력으로 전환시켜 납세원을 확장하려는 조치로 이어졌다.
당시 전국의 불교 승려는 26만 5백 명이었으나, 기타 경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등 외래종교는 3천여 명 정도였다. 경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가 불교에 비하며 아주 적은 규모였음에도 함께 박해를 받게 된 가장 근본 원인은 경교를 포함하는 이 3종 외래종교가 토착화를 하는 과정에서 중국 통치 계급과 지식 계층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여 중국 문화의 일부분이 되지 못했으며, 여전히 ‘이교(夷敎)’로서 ‘사법(邪法)’·‘이속(異俗)’으로 배척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교 등 3교의 승려 3천 명이라는 규모는 불교에 비하여 아주 적은 수치이지만 그 교세를 적다고 할 수는 없다. 불교는 이들보다 5백여 년이나 빠른 A.D. 1세기에 중국에 전입되어 위진남북조 혼란기를 거치면서 황실 또는 귀족들의 보호 아래 민간에 그 기반을 크게 확산할 수 있었다. 5백여 년 늦게 진입한 경교 등 3교가 100여 년의 기간 동안 승려 수가 3천을 기록하였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규모이다. 그러나 무종 연간에 도교숭상 기조의 강화와 더불어 나타난 불교 등 이교 탄압 조치는 중국에 막 뿌리를 내리고 기반을 확산해 가고 있던 경교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당말의 경교
무종의 폐불과 외래종교 탄압 조치는 무종이 죽고 선종(宣宗, 847-859 재위) 즉위 뒤에 복구되었지만 이후 경교는 기존의 세력으로 회복되기 어려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교가 중국에서 한 차례의 박해로 급속히 세력이 위축된 가장 큰 요인은, 경교가 중국에서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지면서도 뿌리를 탄탄히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대대적인 박해를 받았기에 그 충격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경교 신도들은 주로 서아시아 혹은 중앙아시아의 각 민족이었고, 선교사들도 대부분 외국인이어서 한족을 상대로 폭넓은 대중적 기반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당대 경교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도 여전히 신도들에게 일상 종교생활 중에 사용하는 고정된 중문 경전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과도 연결되는 상황이다.
경교 선교사들이 조정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그 엄호 아래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는 점도 급격한 쇠퇴의 요인이었다. 결국 중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漢族) 가운데서 적극적인 발전을 도모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경교 쇠퇴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당대에는 불교, 경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등 외래종교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왕실에서는 도교를 신봉하고 있었기에 조정과 유대를 통해 경교 교세를 확산시키는 것은 근본 한계가 있었다. 여러 종파가 중국에서 경쟁적으로 포교 범위를 확산시키고 있던 상황에서 경교는 도교와 불교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하였고, 결국 약한 기반으로 말미암아 중원에서 기반을 확립하지 못하였다. 경교가 중국 중원에서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지만 대외무역 항구나 소수민족지역에서는 신앙의 명맥을 계속 유지해 나갔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랍의 역사가이며 여행가이던 마수디(Mas’ūdī, ? - A.D. 956)는 황소(黃巢)의 난(85 - 884)이 일어나서 879년 농민군이 광주성(廣州城)을 함락하게 되었을 때에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하였는데, 그중에 유태교도, 그리스도교도, 조로아스터교도 20만(다른 사적에는 12만)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2) 여기서의 그리스도교도는 경교도이며, 광주성에서 경교도의 비중이 적지 않았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중국 서북지방 신강(新疆)지역에서 경교는 전입된 6세기 이후 꾸준히 확산되었으며, 원대(元代)를 거쳐 청대(淸代)까지 그 맥이 이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당송 시기의 경교 벽화, 묘비와 시리아문·바라바문·소그드(Sogd)문자로 기록된 경교 문헌들은 이 지역에서 다수 발굴 보고되고 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미주
1) 이상 《구당서》 내용은 <본기> 제18상.
2) 耿昇 譯, 《黃金草原》 (靑海人民出版社, 1988), 330쪽.
사진 | 고대사원문자료모음
김종건 | 문학박사(중국사), 한동대학교 글로벌리더십학부 객원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