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주> 가족 여러분께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을 드립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셨다는 기쁜 소식이 중국의 동서남북, 도시들과 부락들과 사막과 산간오지, 방방곡곡에 골고루 전해지고, 이 소식이 중국교회를 통해서 열방에 퍼지기를 다시 한 번 기도하면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다짐을 <중주> 가족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일
지난달 6일(화), 서울 광진구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교(총장 임성빈, 이하 장신대)의 한경직 기념 예배당에서는 뜻 깊은 예식이 있었습니다. 리모델링을 마치고 이날 새롭게 개관하는 장신대 여학생관을 ‘김순호 기념 여학생관’으로 명명하고 준공을 감사드리는 예식을 가진 것입니다.
장신대 여학생관은 1987년 7월에 건립되었는데 3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시설이 낡아져서, 지난해 6월에 리모델링에 착수해 공사를 마치고 이날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고 합니다. 안팎이 새로워진 여학생관은 연면적이 174.58㎡으로 늘어났고, 2인실, 4인실, 장애학우 기숙사, 나눔방(휴게실), 강의실, 세미나실, 기도실, 쉼터를 갖추고 있습니다.
김순호 기념 여학생관 준공 감사 예식은 1부 예배, 2부 예식, 3부 개관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부 예배에서는 장신대 이사장 신정 목사(광양 대광교회 담임)가 설교했고, 2부 예식에서는 건축경과보고, 감사패 증정, 축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3부의 개관식은 김순호 기념 여학생관으로 자리를 옮겨 테이프커팅과 입장, 기념촬영, 시설관람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김순호 선교사는 그의 전적인 헌신과 희생, 그리고 많은 업적 등 장엄한 느낌을 주는 생애에 비해서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인물을 찾아내서 새로 개관하는 여학생관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 무척 의미 있고 아름답게 여겨집니다.
장신대 임성빈 총장은 개관예식에서 “김순호 기념 여학생관이 단순히 숙식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교회와 사회와 국가에 봉사할 여성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영성훈련의 공간으로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장신대는 김순호 선교사의 숭고한 믿음과 신실한 지도력이 계승되기를 바라면서 여학생관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 데, 정말 이 여학생관을 거치는 학생들이 김순호 선교사를 닮기 위해 힘쓰고, 그 가운데 김 선교사를 닮은 여성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최초의 여성선교사
김순호(金順好, 1902-1951) 선교사에 대해서는 <중주> 2003년 9/10월호(통권 83호)의 ‘발행인 통신’에서 ‘여선교사 김순호’라는 제목으로 단편적인 소개를 해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 글을 찾다가, 2003년을 전후해서 여러 해 동안은 이 <중주>가 격월간으로 발행되었고, 2004년부터는 계간으로, 2006년부터는 다시 격월간으로 발행되었다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면서 <중국을주께로>가 2014년 9월호부터 ‘웹진’으로 전환하면서 월간이 된 사실에 대한 감사를 새삼스럽게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03년 9/10월호의 졸고를 참고하면서 김순호 선교사의 생애를 다시 한 번 체계적으로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김순호 선교사는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에서 출생했습니다. 재령은 미북장로회의 선교지부(宣敎支部)가 있던 곳으로, ‘기독교 천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교회가 왕성하던 곳이었습니다.
김순호 산교사의 부친 김두한은 재령동부교회의 장로였습니다. 재령동부교회는 장로교의 초대 산동선교사였던 박태로(朴泰魯) 목사님이 담임했던 교회입니다. 박 목사님은 이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중에 1912년에 총회의 부름에 순응해서 산동(山東)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병을 얻어 귀국했는데 회복되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신 분입니다.
당시는 여자가 신학문을 공부하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그는 부친의 배려와 후원으로 재령동부교회가 세운 명신학교(明信學校)를 거쳐 서울의 정신학교(貞信學校)에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1921년에 정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올라 요코하마여자신학교를 졸업했고, 귀국해서는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신학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재령동부교회 전도사가 되어 모(母) 교회를 섬겼습니다.
산동에서 여성선교사의 필요성이 커지자 장로교는 1931년 3월에 여선교사 파송공고를 냈습니다. <기독신보>에 실린 공고문을 보면 자격요건이 “장로교인으로 중등 이상의 학교를 졸업하고 성경학원 혹은 동등 이상 과정의 신학을 졸업한 자, 내외지에서 교역(敎役)에 종사하는 자로 연령은 만 25에서 만 30세의 충분한 성경지식과 사역경험이 있는 자”로 되어 있고, 선교비는 여전도회가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김순호가 한국교회 최초의 여선교사로 선발되어 1931년 9월에 금강산기독교수양관에서 열린 제4회 여전도회연합회 모임에서 파송식을 갖고 산동의 라이양(萊陽)으로 향했습니다.
선교를 시작하면서 그는 베이징(北京)에서 어학을 공부했는데, 방지일(方之日) 목사님의 회고에 따르면 김 선교사는 선교사들 가운데 중국어(베이징어)가 가장 정확했다고 합니다. 방 목사님은, 김 선교사님은 부녀자들을 잘 지도했으며, 중국인들은 김 선교사를 ‘김고랑(金姑郞)이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회고했습니다.
김순호 선교사는 라이양에 이어 칭다오(靑島), 그리고 1940년을 전후해서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선교사로 사역했습니다.
공산세력에 의해 순교당하다
김순호 선교사님은 해방 후에는 평양여자신학교 교수 겸 기숙사 사감으로 일했습니다. 이때의 제자였던 주선애(朱善愛) 권사님(장신대 명예교수, 1924년 평양 출생)으로부터, “그분은 회개를 무엇보다 강조하는 분이었어요. 수업시간에 느닷없이 학생들에게 회개했느냐고 묻는 일이 많았지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선애 권사님은 또, “그분은 정직을 생명과 같이 여기는 분이었습니다. 그때 공산당의 핍박을 피해 월남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경비병에게 친척집에 간다고 둘러대고서 38선을 넘는 일이 많았습니다. 김순호 전도사님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며 월남 권유를 뿌리치셨지요.”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는 신의주 제4교회로부터 전도사 청빙을 받았는데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모두 살기 위해 남으로 가지만 나는 복음을 위해 죽으러 북으로 간다”라는 말을 남기고 부임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고 교회에 대한 박해가 가열될 때도 흔들림 없이 교회를 지키다가 1951년 어느 날, 새벽기도회에서 기도하는 도중 갑자기 들이닥친 내무서원에게 끌려가 심한 구타를 당하고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순교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50세였습니다.
갈릴리의, 예수님이 지시하신 산이 되기를
김순호 선교사님의 자취를 더듬으면서 중국에서 수고한 여성 사역자들이 더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또 지금 수고하는 있는 독신 여성사역자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AM)에 2016년 통계에 따르면 독신 여선교사는 2,324명이였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는 중국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분들도 여럿 있을 것입니다. 언제 이 문제를 특집으로 다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1910년대 이후 장로교 선교사들이 사역하던 산동 현장을 답사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습니다.
참, 작년 9월호에 <중주>에 <로스역>발행 130년을 기념해서 실시된 로스 선교사의 선교루트 탐방기를 쓰면서 “2년 뒤인 2019년은 중국의 첫 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손의 <신천성서>(神天聖書) 완역 200년이 되는 해인데 그때는 중국어문선교회 주관으로 ‘<신천성서> 완역 200주년 기념 모리손 선교사의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제목으로 그가 사역하던 마카오와 광동 중심의 탐방여행을 실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더니 한 성지순례 전문 여행사가 이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산동 현장 답사로 시도해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번 호에는 ‘새 종교사무조례 시행 이후’라는 주제의 ‘특별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시진핑의 장기집권이 확정된 문제와 연결해서 우리는 새 종교사무조례 시행에 대해 관심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의, 지시하신 산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이라”(마 28:18-20) 하셨습니다.
지금 여러분과 제가 있는 자리가, 예수님의 그 음성을 듣는, 갈릴리의,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산이 되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 옥성득 교수의 한국기독교 역사 블로그
유관지|중국어문선교회 고문, 본지 발행인. 성화감리교회(분당)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