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아프리카선교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참혹한 전쟁과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이나 동물의 뼈가 뒹구는 황량한 사막일 것이다. 혹은 벌거벗은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 먹는 식인 풍습을 여전히 아프리카의 보편적인 그림으로 이해하는 이들도 심심찮게 만난다. 이들은 몇 년 전 TV에서 방영한 ‘아프리카의 눈물’이 더 이상 아프리카의 보편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듯 하다. 동물의 왕국이나 사파리를 즐길 수 있는 동부의 세렝게티 같은 국립공원을 떠올린다면 그나마 나은 것이리라. 얼마 전 선교한국에 참여했던 아프리카 청년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볼멘 소리를 들었다. 그 골자는 그들의 고향에 좋은 것들과 아름다운 유산들이 그렇게 많음에도 왜 그렇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아프리카를 그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러고 보니 아프리카를 선교의 대상으로 생각하면서 우리가 중요한 진리를 망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 역시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의 일부라는 진리를.
놀라운 부흥을 체험한 위대한 세기 이전에도 아프리카는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식민시대를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문명이 도입되기 훨씬 이전에도 아프리카는 자체의 문화를 발달시키며 그 풍요함을 누리고 있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식민주의 정부와 결탁한 각종 종교제도 이전에도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축복 속에 창조의 질서를 지켜 오고 있었다. 그것은 성경이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언약의 일부인 하나님의 하나님 되어 주심, 즉 인간의 범죄와 배신, 그 결과인 죽음의 계속되는 반복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 그 자체였다. 그것을 깨뜨린 것은 문명과 발전을 핑계삼고, 거룩한 고등종교를 빙자한 인간의 죄성이 낳은 또 다른 추악한 모습이었다. 그 역사는 혹독한 아픔에 종지부를 찍은 독립의 시대를 60년이나 지나 온 지금까지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이 땅과 그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옥죄고 여전한 결핍으로 내몰고 있다.
아프리카선교를 위해 다시 생각할 점
아프리카를 뒤덮은 문명화의 진통: 진부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아프리카는 대륙 전체가 전반적으로 문명화의 진통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수십여 내지 수백에 달하는 크고 작은 부족으로 이루어진 많은 국가들은 독립 이후에 권력을 향한 헤아릴 수 없는 전쟁을 겪어야 했다. 과거 이 대륙에서 식민지를 경영했던 열강들은 그러한 현상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배를 이어가고자 했다. 그 결과 식민정부를 대신하는 부족들에게 모든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을 피할 수 없었다. 전체 인구의 5-10% 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이 전체 국부의 90% 이상을 소유함으로 빚어지는 부의 편중현상 내지 부익부 빈익빈의 악순환은 여전히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이다.
십여 년 전부터 아프리카에서도 문명화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휴대전화 바람이 불고 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지역의 청년들뿐 아니라 아낙네들에게까지 휴대전화 보급률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정부의 보호정책 아래 통신회사들은 오지라 불릴 만한 곳에도 수신안테나를 세우는 등 인프라 구축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아직도 경제적으로 열악한 수준을 면치 못하는 이들 대부분은 선불 방식으로 겨우 그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청년들 사이에서는 스마트폰 이용률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물론 이것이 약삭빠른 물질주의자들의 영악한 상술의 결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자연스레 겪게 된 문화적 과도기라 하겠다. 문제는 1960년대에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과도기적 현상이 이미 수십 년을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형태를 달리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질주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를 뒤흔드는 제4차 산업혁명 등 급속한 변화의 바람은 발전, 더 나은 삶을 미끼로 순진하기만 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혼을 빼놓고 있다.
문명화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부작용이 있음은 모두가 주지하는 바이다. 이것은 순진하다 해서, 과거에 숱한 아픔을 겪었다 해서 아프리카를 빗겨가지 않는다. 현대의학은 수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살리고 공동체의 의료상식 수준을 향상시키는 등 공헌한 바가 크다. 이중 대부분은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이룬 것이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의료사역이 이러한 현대의학의 유일한 통로는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사악한 목적을 가진 이들에 의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많은 이들이 새로운 의약품의 실험으로 희생되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대의학의 보급이 항상 긍휼과 자비의 기준으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이익 추구나 국제정치의 힘겨루기의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한다는 것이 더 이상의 비밀은 아니다. 발전한 현대의학 기술이 아프리카 의료인들에게 공평하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과 공동체 안에 또 다른 ‘가진 자’를 형성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어두운 단면들이다. 이는 의료인들이 공인으로서의 윤리의식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출산 뒤 출혈이 멈추지 않는 산모에게 혈액응고제를 투여해 사망하게 하는 등 병원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의료사고들은 아직 사람들의 기본권에 대해 예외조항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런 현상은 크고 작은 부족공동체에서 자신들의 전래방식을 고집하게 하고, 그로 인해 더 많은 희생을 낳는 이유가 되고 있다.
발달과 전통 사이의 갈등: 문명화의 물결이 구석구석을 파고 들면서 도시뿐 아니라 시골에서도 발달을 향한 욕구가 거세어지고 있다.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일제히 교육정책을 우선순위에 두면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에도 최소한 초등학교를 세우는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초등학교가 세워진 몇 개의 마을들을 단위로 묶어 중등학교를 세우고 지원하면서 교육을 받은 인구가 증가하고, 이렇게 교육을 받은 인재들은 도시로 나가 더 나은 수입이 보장된 직장을 갖게 되었다. 이는 자연스레 가시적인 소득증대를 낳고, 농촌에서 조차도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아이들을 도시로 ‘유학’보내는 것은 이제 자연스런 현상이 되었다. 이런 현상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공동체 안의 신분이다. 경제력의 향상은 자연히 신분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전통권위에 대한 직접 도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많은 아프리카공동체에서 일고 있는 전통으로 회귀운동을 잘 설명해 준다. 어른들은 ‘요즘은 무서운 세상’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전통과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이를 위협하는 변화에 대해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에게 전통과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문명화뿐 아니라 돈으로 상징되는 경제력의 파괴적인 힘이다. 교육을 받아 사회적 지위를 지니거나 경제력을 가진 젊은 세대는 더 이상 노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을 두렵게 하는 것은 그들이 죽은 후 자신들의 조상들을 볼 면목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전통종교를 비롯하여 이슬람이 자신들의 고유종교라고 굳게 믿고 있는 공동체일수록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슬람 전략의 공격적 선회
전 대륙에 걸쳐 이슬람의 전략은 더욱 공격적으로 바뀌고 있다. 오래 전부터 ‘실지회복(失地回復)’을 모토로 기독교인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을 재개종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약 100년 전에 동부에서 시작되어 현재 서부에 일고 있는 열정적인 모스크 건축운동은 이들에게 자신들의 종교적 신실성을 입증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모스크가 세워진 지역이 이방인들을 향해 자신들의 영토임을 선언하는 정치 선언이기도 하다.
또 이들은 행정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여러 중요 거점의 성지화나 그 지역에 샤리아 입법을 추진하며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곳에서 야간 코란학교를 개설하는가 하면, 기독교인 청년들을 재개종시키기 위한 결혼전략을 실시하기도 한다. 공동체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의 재개종을 전제로 성지순례와 생활보조금 지급 등 각종 혜택을 약속하기도 한다. 일단 개종한 이들은 그들의 공동체인 움마(Ummah)의 일원으로 철저히 보호하며 어디를 가든지 이슬람공동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진행되고 있는 아프리카의 도시화 현상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모슬렘공동체의 확장이다. 이는 여전히 부족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는 교회와 비교할 때 매우 큰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도시를 찾은 시골청년들에게 필요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그들만의 공동체는 그만큼 사람들을 포용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같은 모슬렘들 마저 두려움으로 몰아넣고 있는 한 가지 현상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폭력적 성향이다. 케냐 나이로비의 웨스트케이트(Westgate) 쇼핑몰 테러와 대학생들을 살해한 이슬람 군부세력이 알샤밥임은 이미 드러난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세월호의 아픔을 겪던 그 해 나이지리아에서 여학생들을 납치한 보코하람 역시 그러한 극단 이슬람주의자들이다. 이들에게 모슬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이슬람에 굴복하지 않는 한 자비의 대상이 아니라 이슬람제국 건설을 위한 거룩한 전쟁(지하드)에서 제거해야 할 적이거나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대상이다.
증가하는 난민과 환경 문제
오래 전 르완다 내전과 수단의 분쟁을 비롯하여 대륙 곳곳에서 일고 있는 전쟁은 갈 곳 없는 난민을 양산하였다. 이는 많은 나라들과 공동체 안에 심각한 사회 구성비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이집트, 모리타니아, 알제리 등 북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더욱 강력하고 배타적인 부족주의를 부채질하고 있다. 특히 이런 난민들은 시골보다는 도시와 그 근처에 난민촌을 형성하여 정착하고 있다. 이는 질병과 위생, 의식주와 의료시설의 부족, 사회 안의 인종차별과 범죄율 증가 등 심각한 사회현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미 오래 전 보고된 대기권의 오존층에 구멍이 뚫린 것을 포함한 아프리카의 환경 문제는 점점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그 수위를 높이고 있다. 한 해에 축구장 1200만 개에 달하는 600만ha의 숲이 사라짐으로 해서 매년 1Km씩 남하하고 있는 사막화의 가장 큰 주범은 이상기후로 인해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가뭄이다. 여기에 연료(땔감)를 위한 벌목과 가축의 방목, 시골지역에서 종교적, 실질적 목적을 위해 매년 행하는 bush fire 역시 한 몫을 하고 있다.
세계선교의 전면에 선 아프리카의 교회들
놀라운 부흥을 체험한 위대한 세기의 영향은 아프리카에서도 나타났다.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삶과 사역을 통해 회심자들이 늘고 교회들이 줄을 이어 세워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세우고 또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위해 서양 선교사들의 신학을 교육받았다. 하지만 그러한 신학교육은 아프리카 토양에 맞지 않는 서구신학의 답습으로 인한 한계를 드러냈다. 건강한 아프리카 신학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까지는 성경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과 통찰력의 부족과 천주교 신학의 영향으로 인해 지나친 상황화의 부작용을 겪어야 했다. 교회 안에는 과거의 부족주의 전통에 뿌리를 둔 권위의식이 자리하고 교회는 또 하나의 계급적 특권층의 집합소로 전락하기도 했다. 또한 제자로 성장하는 과정이 생략된 교회교육으로 인해 주일의 교회생활과 일상적인 삶이 구분되는 이원론과 사회에서의 성숙한 윤리의식 부재라는 불가피한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20세기 기독교 신앙을 비서구적 종교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거친 아프리카 대륙에는 수많은 기독교인들과 급속한 교회성장이라는 열매가 나타나게 되었다.
오늘날 아프리카 교회는 세계선교의 동력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미 많은 교회들이 자국 내의 크고 작은 다른 부족을 품고 땀 흘린 열매를 보고 있으며 더 많은 지역으로 나아가기 위해 사람들을 훈련하고 있다. 자국 안에서 경험을 거친 사람들은 지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나아가고 있다. 대륙 안에 흩어져 있는 미전도종족들을 위해 추수할 일꾼들을 동원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전에 노예사냥꾼을 당했던 작은 부족출신의 사역자들이 복음을 들고 그들과 유사한 역사적 아픔을 가진 부족들에게로 나아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런 열정은 대륙을 넘어 다른 대륙과 국가들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한 교회로 나타나기도 한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가장 급격히 성장하는 교회 중의 하나는 아프리카 교회이다. 뉴욕을 비롯한 미주지역에서도 이런 디아스포라사역에 대한 매우 놀랄만한 보고들이 줄을 잇고 있다.
지상명령 완수와 세계선교라는 목표 아래 세계의 교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교회들은 각 국가별로 혹은 전 대륙에 걸쳐 선교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EMS(Evangelical Mission Society), 가나의 GEMA(Ghana Evangelical Mission Association)와 아프리카 전체의 선교기구인 MANI(Movement of African Nationals’ Initiative)가 대표되는 예이다. 이것은 아프리카가 단순히 교회개척의 대상 혹은 개발과 긍휼사역의 대상이라는 기존의 아프리카선교에 대한 편견에 대해 진지한 반성을 요구한다.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아프리카 선교를 다시 생각하기 위해 위에 제시한 몇 가지 주제들과 이미 새로운 선교동력으로 성장한 아프리카교회의 모습은 그야말로 기존의 아프리카선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진지하게 고려하여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게 한다.
첫째, 달라스 윌라드가 그의 책 ‘잊혀진 제자도(The Great Omission)’에서 강조하였듯이 기존의 가시적 성과를 지향하던 사역에 빠진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의료, 교육, 어린이, 스포츠, 지역사회개발 등 여러 가지 전략도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에 자신이 제자로서 복음을 몸 전체로 살아내는 진정한 제자삼기(disciple making)가 빠져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많은 노력과 투자가 이루어졌든지 간에 자기만족을 위한 자신만의 사역에 불과할 것이다.
둘째, 미전도종족에 대한 접근이 보다 효율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셋째, 이와 아울러 도시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져야 한다. 도시화를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있는 지역은 종족 백화점의 모습을 보이고 여기에는 다음세대를 위한 보다 중점적인 사역이 이뤄져야 한다. 난민들을 비롯한 이주민들의 증가는 또 다른 사역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도시는 쉽게 세계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차원에서 사역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렇게 다양한 사역의 기회는 또한 자연스럽게 아프리카 도시 교회들과 네트워크와 동역의 기회가 된다.
넷째, 좁은 의미에서의 전통적인 교회개척을 넘어 다양하고 통합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한 교회사역이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의도는 종교기구로서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위에 세상 가운데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 나라화 하는 사명을 수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로서 교회였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적 비즈니스(Missional Business) 혹은 비즈니스 선교(Business As Mission; BAM)은 좋은 예가 된다.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를 비롯한 나라들에 비즈니스 선교는 좋은 전략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보여 줄 수 있는 도구가 될 것이다.
다섯째, 교회개척과 제자훈련이 선교적 삶의 훈련 내지 선교사훈련으로 나아가야 한다. 재차 강조하거니와 이것은 현재 성장하고 있는 혹은 준비되어 있는 아프리카 교회들과 파트너십과 동역이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아프리카교회를 동원하는 것이야말로 아프리카선교에서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할 점이다. 현재 많은 교회들이 세계선교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을 묻고 있다. 한국교회는 아프리카교회와 겸손하게 동등한 선에서 혹은 그들의 권위 아래 동역할 준비와 자세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 답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믿음 없음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믿음이 확실함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 소요되는 시간과 재원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세심한 리서치 과정은 우리에게 효율성과 생산성을 제공한다. 리서치를 통해 불필요한 자원의 낭비를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다 전략적인 분야에 집중하게 한다.
나가는 말
한국교회가 아프리카선교에 뛰어든 이래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그 길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 땅은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에서 멀어진 채 허우적거리고 있고, 그 땅에 함께 발을 붙이고 있는 선교사들 역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각각의 사역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때로 아주 단순한 진리를 잊고 있지 않은가 자문하게 된다. 우리가 아프리카 전체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파파야는 섬유질로 이뤄진 약한 나무이다. 하지만 물과 양분을 공급받은 그 나무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아프리카의 열기에도 그 땅의 사막화를 막는 역할을 한다. 아프리카 땅에 부름받은 선교사의 역할은 많은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로, 누군가에게 양분을 공급받아야 하는 그런 존재로 그 자리를 지키고 서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겸손하게 선 그 자리에 하나님이 내리시는 물과 양분으로 척박한 아프리카 땅에 하나님의 샬롬을 회복하게 되는 날을 기대한다.
김경술 | 선교사(한국SIM국제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