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한 사진 한 장의 기대
2009년, 6년의 한 마디 사역을 마치고 안식년을 준비할 때에, 국내의 협력 교회들과 사역보고를 나누기 위해 프리젠테이션 작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 아래의 흐릿한 사진은 선교보고를 위한 프리젠테이션의 마지막 화면이었습니다.
일부러 화면의 사진을 흐리게 처리한 이유는 이 사진은 사역의 결과가 아니라 안식년을 마치고, 다음 사역 기간에 행할 사역에 대한 기대와 계획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간 뒤에 가장 먼저 은내천지역의 아이들에게 작은 선물을 하여 이 흐린 사진을 선명한 사진으로 바꾸어 놓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원래 이 사진의 출처는 서양의 한 비영리 단체의 소개책자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단체가 하는 일은 아시아권의 빈곤지역에 사는 아이들에게 문고형도서관을 세워 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읽은 《히말라야 도서관》도 한 대기업의 후원으로 히말라야의 소외된 지역 아이들에게 건물형도서관을 지어 주며, 교육의 평준화를 책에서 시작하고 생활의 평준화, 동일한 기회의 평준화를 준비하는 것이었는데, 저는 앞의 이 사진을 보며 무릎을 쳤습니다.
평소에 문서사역의 끝은 현지의 문서사역자를 발굴하여 세우고 이양해 줌으로 한 매듭을 지어야 하는데, 그 문서사역자를 세우는 첫 시작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책을 번역하고, 배부하는 일로 끝나지 않고, 그 사역을 꾸준히 이어가고 확대할 문서운동가의 출현이 절실했는데, 그 시작을 작은 문고형도서관처럼 작은 도서관을 섬길 사람한테서 시작됨을 본 것입니다.
문서사역이란 일단 문서를 좋아하고, 활자와 친한 사람들이 자기 재능을 확인하고, 섬기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인데, 그 일의 출발이 바로 작은 문고형도서관을 운영해봄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을마다, 아이들이 모이는 장소마다, 한 사람의 운영담당자를 세워, 문서를 관리하고, 대출하고, 주기적으로 독서법과 독서나눔을 인도함으로 자신의 역량을 발굴하고 독서층의 점검과 함께 실제 문서를 통한 영향력을 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 NGO 단체들도 문고형도서관과 건물은 세우지만, 그곳에 사람을 세우는 일까지는 내다보지 못한 듯이 보였습니다. 주기적인 도서들의 업데이트만을 생각하며, 기업들과 연결하지만, 문서사역의 끝은 책에서 끝나지 않고 사람한테서 끝이 나기에 반드시 현지 문서운동가들을 함께 염두에 두며 진행해가야 합니다.
선명한 사진 한 장의 감사
이제 그 마지막 프리젠테이션 사진을 다시 꺼내 들고 지난해 12월에 교회 성도님들이 모아준 헌금을 챙겨서 서안(西安)을 경유하여 은내천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 서안에 들린 이유는 서안에 현지 사역자가 운영하는 중국기독교 서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그림책과 동화책, 그리고 부모교육과 자녀양육에 관한 책 50여권과 한국에서 준비해온 10여권의 책, 책꽂이에 진열할 액세서리와 그림을 사들고 공항으로 갔습니다.
은내천지역 도착 첫날은 현지 선생님이 타지에서 모임을 갖고 계셨기에 대신 지역의 상황과 지리를 잘 아는 따님을 보내주시어 가져온 책을 현장에 풀어놓았습니다. 아이들은 방학이고, 선생님들이 잠시 모임 차 떠났기에 모임방은 한산하고 평안했습니다. 미리 부탁한 책꽂이는 4단으로 작은 사이즈였고, 거기에 채워 놓을 나머지 책들을 사기 위해 바로 시내 중심가의 신화서점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일반도서 중에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동화책, 소설, 학습문고 등 50여권의 책과 지구본을 구입하여 책꽂이에 꽂아주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챙겨간 도서진열용 아크릴도 4개를 설치하여 곳곳에서 책을 진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품고 간 책들을 한 권씩 닦고 꽂아 놓으며, 절로 기도가 나옵니다. ‘이 책을 읽을 아이들의 영혼도 하나님 품안에서 한 영혼씩 꽂히게 하옵소서.’ 작은 소리로 기도하며 기념사진을 한 장 찍어왔는데요. 옆의 작은 문고형도서관입니다.
7년 전에 흐릿했던 마지막 사진이 선명하게 바뀌는 순간이었고, 작은 마음의 짐을 벗어 놓고 돌아왔습니다. 서안에서 3일, 은천에서 3일은 책을 준비하고, 비치하며 작은 문서운동가의 행복한 기쁨을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앞으로 과제도 있습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에 있어 아직 사역의 보안과 문서 감각을 지난 현지 사역자를 세우지 못한 점입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한 곳에서도 아이들을 위한 모임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그곳에도 함께 후원과 마음으로 세워 줄 응원그룹을 세우는 일입니다. 한 번의 후원이 아닌 계속되는 기도제목 교류와 방문으로 아이들에게 책으로 할 수 있는 경험을 함께 풍성히 전해 주고 오는 기회를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새해가 되고 한 달이 지난 뒤에 한 통의 편지와 함께 사진도 같이 왔습니다. 아이들이 개학하여 모임도 시작되었고, 그 작은 모임방에 아이들의 손에 책이 들려진 사진이었습니다.
현지의 선생님들께 책을 보내 드릴 때의 기쁨도 있지만, 현지 아이들의 손에 책이 들려지는 모습은 차원이 다른 감사였습니다. 이제 새로운 꿈을 꾸어 봅니다. 처음의 흐릿한 사진이 선명한 사진으로 바뀌었다면, 이제는 선명한 사진이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가는 꿈을 봅니다. 그리고 이 글이 다시 그 새로운 꿈의 흐릿한 밑그림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문서운동가의 꿈도 꾸어 봅니다.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들을 함께 공유하고, 그 일을 이어갈 줄 동역자와 즐거운 대화를 꿈꾸어 봅니다. 그날이 속히 오게 하옵소서. 함께 기도하며 글을 맺습니다.
이광열 | 동인교회 담임목사, 전 중국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