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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을 뒤집어쓴 채 울며 기도하며 시작된
중국생활
대학생 때 CCC를 통해 중국 단기선교를 2주간 정도 다녀왔다. 베이징에서 출발해 동북지역의 캠퍼스를 돌며 친구를 사귀고 복음을 전하며 그 땅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하루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찬양을 부르며 캠퍼스를 걷고 있는데 캠퍼스의 많은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누가복음 10:2) 이 말씀이 생각났다. 그 순간 나의 신앙을 위해서만 살던 내 모습이 너무 작게 느껴졌다. 캠퍼스에서 제자화를 외치며 기도했던 내가 한 사람도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중국 단기선교를 마치고 돌아온 뒤, 1년 동안 자비량으로 중국엘 나갈 결심을 하고 6개월 동안 차곡차곡 떠날 준비를 했다. 드디어 1년 뒤, 설레는 마음으로 그 땅을 다시 밟았다. ‘중국어도 안 되는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땅, 중국에는 누구 하나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바짝 엎드렸다. 매일같이 1시간씩 이불을 뒤집어쓴 채 이불 속에서 울며 기도했다. 중국은 보안 때문에 찬양을 크게 부를 수도 없었고 소리를 내어 기도도 할 수 없었다. 주일날 한인교회도 갈 수 없었기에 오로지 그분을 신뢰하며 그렇게 그곳의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중국어공부에 집중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이 생활하던 간사님이 이젠 중국인친구를 만나보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중국인친구를 사귀기 위해 학생식당으로 들어갔다.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며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주변의 학생들을 둘러보는데 한 여학생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혼자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고 아주 여성스러운 모습이었다. 앞에 앉아도 되겠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고 지금 중국어를 배우고 있는데 좋은 친구를 찾고 있다며 말문을 텄다. 그날 이후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어 어딜 가든 항상 같이 다니며 중국어를 배우며 6개월 동안을 교제했다.
그쯤 우리팀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했고 거기에 그 친구를 초대했다. 그 친구는 우리가 연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크리스마스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는 것이라는 처음 알았고 복음에 대해서도 처음 들었다고 했다. 복음을 전하는 시간 내내 그 친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고 그 친구가 돌아간 뒤 설문지를 보았는데 그 친구가 예수님 영접에 표시를 한 것이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그 설문지를 보면서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우린 계속 좋은 친구로 지내며 함께 성경공부도 시작했고 주일엔 교회도 함께 다녔다. 조금씩 신앙이 자라는 친구를 보며 1년만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 현실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 인생의 십일조를 드리자
그래서 ‘내 인생의 십일조를 드리자’라고 결심했다. 만약에 내가 100년을 산다고 했을 때 10년을 중국을 위해 드리기로 결심한 뒤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 당시 교제하고 있던 형제와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스물다섯 살에 결혼하고 함께 다시 중국에 갔다. 다시 밟은 중국, 처음에는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였다. 둘이 함께 구한 신혼집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 물을 끊여서 설거지와 목욕을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 땅을 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감사했다.
하지만 20대의 열정으로만 시작된 신혼생활과 사역은 쉽지 않았다. 후원자들도 개발하지 않고 무작정 1년 동안 벌어 놓은 돈만을 가지고 왔기에 6개월 만에 바닥이 났다. 하나님은 그런 환경을 통해 우리부부를 성숙하게 하셨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기도하게 하셨다. 비자를 받기 위해 학비가 필요했고 월세도 내야 하는데 우리부부의 주머니에는 중국돈 1위안이 없어 버스도 타지 못하고 걸어 다니는 신세였다. 당연히 학비와 월세는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다시 기도하며 후원자개발을 위해 1년 만에 귀국해서 교회와 사람들을 만나며 한 달에 50만 원을 정기적으로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학비와 월세를 한꺼번에 내기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다시 중국으로 떠나기 전날까지 기도를 쉬지 않았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지인이 우리를 후원하고 싶다는 한 분의 후원자를 소개해주었다. 다음 날 통장에 돈이 입금 되었다. 처음에 말씀하신 금액은 200만 원이었는데 250만 원이 들어왔다. 사실 우리부부가 필요한 금액이 250만 원이었다. 그분이 송금하러 은행엘 갔는데 50만 원을 더 해야겠다는 감동을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 계신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때를 따라 채우셨다.
100프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의지한 시간
중국에 돌아와 다시 사역에 집중하며 친구들을 사귀었다. 캠퍼스 부대표로 섬기면서 자비량사역자들과 매일같이 땅밟기 기도를 하며 중국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했다. 1년에 두 번씩 초청파티를 해서 복음을 전하고 연결된 친구들과는 성경공부를 하며 캠퍼스를 개척하였다. 2년 동안의 개척사역을 하던 중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아 중국인사역자들과 팀을 이루어서 사역을 하면서 또 다른 사역스타일을 배울 수 있었다.
사역을 하기 위해 아기를 5년 동안 낳지 않기로 결심을 했었기에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첫째 아이가 생겼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하혈로 인해 병원에 갔더니 아기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술을 하고 나서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고 회복실에서 나오다가 쓰러졌다. 신랑의 부축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 모른다. 사역을 위해 5년 동안이나 미루었던 아이인데 왜 데리고 가시냐고…. 회복을 위해 쉬던 어느 날 말씀을 보는데 이런 감동을 주셨다.
“선아야 너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보내서 그렇게 마음이 아픈데,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를 너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은 내 마음은 어떻겠니?”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감사하며 아픈 마음이 회복되었다.
옮겨간 지역에서 3년 정도 사역을 하던 중 싱가포르 자매 간사랑 새로운 캠퍼스개척사역을 시작했는데 4명의 여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1년 동안의 성경공부와 제자양육을 통해 2명의 친구가 사역자로 헌신했으며, 현재 한 명은 가정교회 사역자로, 한 명은 러시아선교사로 사역 중이다. 나머지 2명 또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1년 반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임신이 되었고, 출산 후 캠퍼스사역을 내려놓게 되었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동역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나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고 그만큼 나는 성숙해갔다.
한국에서는 자유롭게 찬양할 수 있고 많은 집회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도 알 수 있었다. 마음껏 찬양할 수 없고 보안을 위해 수시로 전화번호를 바꿔야 하고 미행을 하면 1시간 넘게 집을 돌아가야 했지만, 그 모든 시간들이 너무 감사했다. 100프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의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됩니다.
강선아 | 제주세선교회 중국어 예배부 섬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