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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이혜원 박사가 올해 엮어 낸 《의화단과 한국기독교》에서는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폭력 반(反)기독교•반(反)외세운동이었던 의화단운동이 한국기독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로 인해 1900년 이후 세계 기독교선교회들은 선교정책에 대대적인 변화를 가져오는데, 한국선교부도 이에 동승하여 선교정책도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되는 등 이메일 인터뷰를 통하여 책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았다.
이혜원 박사는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홍콩중문대학교 숭기학원(中文大学崇基学院)에서 종교학으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에서 교회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중국 복단대학(复旦大学) 역사학과에서 한•중기독교 관계사를 연구하며 박사과정(중국사 전공)을 수료하였다. 중국 화중사범대학(华中师范大学) 역사학과 동서방문화교류연구소의 방문연구원, 정동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125년사》 집필위원회의 연구원,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의 겸임연구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한국기독교역사학회의 해외이사, 중국 상해대학(上海大学) 종교와중국사회연구소의 객원연구원, 연세대학교와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 이혜원 박사
편: 편집부
편: 《의화단과 한국기독교》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소개를 하신다면?
이: 본서는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운동(义和团运动)이 한국기독교에 미친 영향을 실증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2012년에 제출된 저의 박사학위논문을 수정•보완하여 출판한 것입니다.
편: 네, 그렇군요. 그럼 ‘의화단’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좀 해주세요.
이: 의화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19세기 말 중국 민간에 널리 퍼져있던 권단(拳坛)과 비밀종교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권단이란 말 그대로 권법을 수련하는 단체로, 마을의 사당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어요. 권법을 수련하는 데에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외공 즉 권법 동작을 익혀 알아야 하고, 다른 하나는 내공 즉 기공을 수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공(기공)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비밀종교의 수련방법, 즉 향을 태우거나 귀신을 불러내거나 주문을 외우거나 좌공을 연마하는 등의 방법이 영향을 미쳤어요.
중국은 예부터 백련교(白莲教)라는 비밀종교가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백련교란 억겁 후에 미륵불이 나와 천하를 다스린다는 미륵신앙에 근거하는 비밀종교입니다. 백련교 계통의 팔괘교(八卦教), 팔괘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천리교가 1813년에 돌격대를 이끌고 자금성을 쳐들어가는 그 유명한 ‘천리교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천리교의 지파 중 산동성의 세 지파가 의화군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어요. 비밀종교에서는 내공을 수련하여 신내림을 받으면 창칼에도 뚫리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그러한 믿음은 1898년 신권(神拳)의 창궐로 널리 퍼졌지요. 의화단이란 이렇게 유사한 신앙을 가진 수많은 권법단체들이 연합한 뒤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정의를 위해 싸우는 의용군”이라는 의미의 이름인 의화단을 사용하였고, 기독교를 공격하였습니다.
편: 의화단이 왜 기독교를 공격하게 되었나요?
이: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하나는 주도권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당시 마을에서는 각 마을의 주도권을 장악한 유지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선교사들이 치외법권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마을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하였죠. 그러면서 그 마을의 주도권은 유지들한테서 선교사들한테로 옮겨가게 된 것이에요. 백성들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선교사의 우산 아래로 들어갔고, 그럴수록 유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게 되어 화가 나게 되었죠. 더군다나 교인이 되면 각종 세금을 내지 않을 수도 있었어요. 특히 마을의 공공행사는 재래 종교의 특성을 띠는 경우가 많았기에 선교사들은 교인들에게 행사비를 안 낼 수 있게 도와줬지요. 유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권단을 동원하여 교회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사회적 충돌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두 번째 이유는, 당시 화북지역에서 발생한 지독한 가뭄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가뭄의 이유가 높은 교회당 건물이 하늘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이를 당장 파괴해야만 중국 토속 신들의 노여움이 풀린다고 생각했어요. 세 번째 이유는, 배외의식 때문인데,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일부이자 서양의 일부로 생각하고 배척하고자 한 것입니다.
편: 의화단운동으로 기독교는 어떻게 되었나요?
이: 1900년 당시 중국에는 70여 만 명의 천주교인과 20여 만 명의 개신교인이 있었어요. 의화단의 공격으로 2만 5천여 명의 천주교인과 2만여 명의 개신교인들이 살해되었고, 47명의 천주교 선교사들과 188명의 개신교 선교사들도 살해되었지요. 교회가 파괴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교인들의 가옥이나 미션스쿨, 교회 관련 건물들 모두 파괴되었어요. 결국 8개 연합군이 군대를 동원해 북경을 함락하고 의화단을 지지한 청조의 서태후와 광서황제가 피난을 가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편: 그런 의화단운동이 한국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인가요?
이: 네, 그렇습니다.
편: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대략적으로 설명 좀 해주세요.
이: 책을 보시면 다 나와 있지만, 크게 몇 가지로 나눠 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반기독교운동 차원의 영향입니다. 1900년 한국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반기독교운동이 일어납니다. 그 와중에 1900년 11월에는 한국의 모든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을 도륙하라는 고종황제의 밀명을 담고 있는 밀지가 각 지방에 전달되는데요. 다행히 당시 황해도를 여행하고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가 그 밀서를 손에 넣고 서울의 에비슨 선교사에게 라틴어로 전보를 쳐 알렸고, 에비슨은 당시 미국 공사와 함께 외부대신을 찾아가 그 밀서의 진위 여부를 따졌지요. 그리고 그 밀서가 거짓이었던 것이 판명되고, 전국에 훈령을 내려 거사를 막았습니다. 소위 ‘도륙밀지사건’으로 알려진,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로 계획된 반기독교운동이었는데, 그 운동이 바로 의화단운동에 직접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한국교회에 직접 미친 영향입니다. 당시 만주지역에는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였고, 한인촌에 기독교가 많이 전파되어 있었어요. 의화단운동 당시 만주지역 한인교회들은 직접으로 수난을 겪게 되죠. 또한 의화단을 피해 수많은 선교사들과 중국교인들이 한국으로 피난을 오는데, 한국교회는 그들을 보살펴 줍니다.
마지막으로는 선교정책 차원의 영향입니다. 의화단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었고, 의화단을 계기로 선교정책은 대폭 수정됩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한국장로교에서 신학교를 설립한 게 언제인지 아십니까? 한국감리교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에게 목사안수를 준 게 언제인지 아십니까? 모두 1901년입니다. 왜 1901년에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목사안수를 줬으며, 또한 정교분리정책을 헌장에 넣어 발표하였는지, 보통은 1901년이라는 해를 주목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 모든 게 모두 우연히 1901년에 일어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의화단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1901년의 한국선교정책에 대해 정확히 바라볼 수 있게 되죠.
편: 의화단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 의화단운동이 한국기독교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생각을 갖고 처음 자료를 찾기 시작한 것은 홍콩에서 유학하던 시절이었어요. 당시 중국종교사라는 수업을 들었는데, 의화단이 큰 사건으로 다뤄졌지요. 그리고 의화단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국경을 접하고 있는 한국이 영향을 받지 않았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찾아보니, 한국에서는 의화단전쟁이 한국에 미친 정치•외교 영향에 대해서만 연구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의화단이 한국기독교에 미친 영향에 대해 글을 써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자료를 찾다 보니 제가 처음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드러나면서 박사논문으로 확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편: 한•중기독교관계사를 연구한다고 하였는데, 왜 한•중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이: 제가 신학을 하고,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한국과 중국에 대해 동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저의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중국인(화교 2세)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관심이 중국에 가게 된 것이죠. 그런데 연구를 하다 보니, 교회사에서 한•일관계나 한•미관계는 연구도 많고 학자도 많지만 한•중관계는 연구가 일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전까지 한국교회는 중국교회한테 큰 영향을 받아왔는데도 연구가 전혀 안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한•중 기독교관계사를 본격적인 연구주제로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편: 앞으로의 연구 계획이 궁금합니다.
이: 앞으로도 한국교회사와 중국교회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당장은 한국에 있는 중국인교회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재한 선교사복음주의연합공의회의 재한 중국인, 일본인선교위원회가 한 역할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윤치호가 상해 중서서원 유학 당시 받은 신학과 사상의 영향에 대해서도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한국과 중국의 접경지대에 놓인 연구주제들을 탐색하면서 한•중기독교 상호간의 영향에 대해 연구할 계획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