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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  통권 171호  필자 : 김주한  |  조회 : 1518   프린트   이메일 
[쉬어 가는 페이지]
수양의 주관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주자학 역사의 전개 11)
-격물치지, 주자 수양론의 또 다른 측면-

 

격물은 주로 대상으로 드러나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활동이고, 이 격물 공부가 바로 경험 주체가 자신의 본성인 성()을 간접적으로 인식해가는 방법이다. 주체로서 심은 본성인 성을 잠재적으로 갖추고 있지만 경험 주체인 심이 그 성의 내용을 밝혀내는 길은 대상으로 드러나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격물 공부에 있다. 대상으로 드러나는 사물의 이치는 나의 본성과 동일한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물의 이치들을 연구해 가는 것이 나의 본성을 발견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전병욱-

 

진리는 해석되지만 해석의 권위를 잃어버릴 때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와 철학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종교와 철학의 사상들이 일상생활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우리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늘 우리의 문화 속에 녹아든 여러 사상과 대화일 것입니다. 사람은 단순하게 시간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그 시간의 의미에 대해 역사의식을 가지고 질문하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의 인간소외에 대한 근본 불안감은 인간의 존엄성을 긍정할 대안적인 사상에 늘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마다 각각의 사상들을 설파하긴 하지만 진리를 품었다는 사람들이 내뱉는 독설이나 말과 행동이 다른 비도덕적인 행태들을 보고 있노라면 진정 무엇이 인간을 살리고,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길인지 허탈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사유한다는 것은 결국 해석한다는 것이고 해석은 머리 속으로만 그리는 지적유희를 위한 놀이가 아닌,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과 세상을 위한 발판이 되어야 할 텐데 그러한 해석들이 또 다시 인간의 이기심과 야망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 때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요.

 

주자가 유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긴급하게 생각했던 것은 역시 ‘도덕실천’이었습니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고 인간사회를 아름답고 평화롭게 만드는 것은 도덕이며 또한 이것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수양의 목적 또한 신비적인 종교경험이나 지적인 업적을 이루는 것에 두지 않고 도덕적인 마음을 품고 그 마음으로 세상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와 너를 구분하는 마음이 아닌 그러한 차별을 벗고 ‘우리’가 하나 되기를 꿈꾸는 대동사회입니다. 해석의 권위는 반드시 실천에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체계와 방법을 가진 사상일지라도 사람을 살리는 학문이나 수양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정말로 진리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진리는 사랑 아닌 것이 없고, 실천 없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것을 도외시하거나 기만하는 사상과 해석이라면 우리는 과감히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격물치지, 일상의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도덕실천의 이상

주자의 수양론은 한마디로 ‘마음공부’입니다. 도덕적인 행동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최종 판단하는 것이 바로 주체적인 마음의 영역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우리는 나 자신만을 생각할 수도 있고 남과 더불어 살기를 작정할 수도 있습니다. 주자는 도덕적인 마음을 먹는 일이 현실을 초월한 종교의 일이 아니라 바로 이 현실 속에 있는 일상의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어떤 종교적인 신비를 추구하지 않고 마음이 살아가는 이 땅의 일상의 관계들 속에서 곧장 도덕적인 실천을 추구하였습니다.

 

주자는 ‘격물은 이천선생의 이른바 경전을 탐구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해가고 고인(古人)에 대해 토론하는 일 등이 어느 하나 공부의 내용이 아닌 것이 없다. 만약 이런 평역하고 분명한 공부의 방법을 버리고 굳이 무형(无形)·무적(无迹)의 영역에서 찾으려고 들고 엿보려고 든다면 모르긴 해도 사이불학(思而不学)의 병에 빠지고 말테니, 반드시 정신이 피곤해지고 힘이 고갈될 것이고 날로 새로워지는 경지에 나아가는 길이 아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듯 주자는 수양이 마음의 문제임과 동시에 마음이 일상사를 바라보는 공부의 영역임을 강조했습니다.

 

마음은 대상과 환경을 떠나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자는 일상사와의 단절을 강조하는 초월적인 수양론과 단번에 깨달음을 추구하는 일회적인 수양론을 모두 거부하고 마음이 일상의 만남들 속에서 도덕성을 길러갈 것을 주장했습니다. 도덕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만나는 일마다 대상마다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도덕실천은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일 뿐만 아니라 어떻게 마음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탐구의 문제라는 것을 직시하고 적극 세상의 이치를 일상 속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사랑을 넘어 하나가 되기

유학자들은 세상의 이치를 궁구하며 그 안에서 사랑의 원리를 발견해 나갔습니다. 자연의 이치는 서로를 살려주는 상생의 방식인데, 오직 인간만이 그러한 거대한 세상의 하나 됨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세계에 갇혀 세상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왜곡되는 모습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학은 평화의 깨어짐이 사람의 이기심에서 시작함을 꼬집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오해들에 부딪힙니다. 그러한 오해들 속에서 때때로 왜곡된 사랑의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주는 이에게는 사랑이지만 받는 이에게는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 소통을 중심으로 하듯, 도덕실천 또한 실천하는 주체뿐만 아니라 대상과 환경에 따른 관계성까지 고려할 때 아름다운 실천이 됩니다. 진정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 더 깊은 사랑을 할 수 있고 또한 진정으로 사랑할 때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수양은 사랑하려는 마음과 이해하려는 배움이 어우러질 때 더 깊은 도덕실천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자기 위주로 사랑하는 것, 또한 나아가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을 우리 시대의 용어로 ‘갑질’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해 없이 배려가 있을 수 없고 배려 없이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도덕실천은 끊임없는 사랑의 대화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 안에 진리가 있다면 우리는 늘 나를 중심에 놓는 사고에서 만남에 충실하고 대화에 진실한 실천의 영역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비윤리성을 가감 없이 목도하는 시대의 한복판에서 우리의 사랑은 어떤 모습인지, 나와 가장 가까운 관계들부터 꼼꼼히 숙고해보아야겠습니다. 겸허히 마주하고 배우는 일은 또 다른 사랑의 시작이 됩니다.

 

 

 

김주한 | 길가에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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