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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2-23일 베이징(北京)에서 매우 의미 있는 행사가 진행됐다. 먀오족(苗族)선교에 앞장섰던 사무엘 폴라드(Samuel Pollad, 1864-1915년) 선교사를 기리는 세 번째 모임으로 ‘스먼칸(石门坎)과 향촌건설’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앞서 2014년부터 시작된 두 번의 모임은 ‘폴라드 정신의 계승’, ‘폴라드의 교육사상’이라는 주제로 각각 이뤄졌다. 폴라드 선교사는 후진타오(胡锦涛)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1985년 구이저우(贵州)성 서기로 부임한 이튿날 각급 기관 간부회의에서 언급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당시 후진타오 서기는 구이저우성에서 가장 낙후된 웨이닝현(威宁县) 스먼칸(石门坎) 일대를 폴라드 선교사가 ‘먀오족 문화의 부흥 성지’, ‘시난(西南) 먀오족의 최고 문화지구’로 탈바꿈시켰다면서 자신이 직접 그곳을 방문하려 했지만 길이 워낙 험난해 웨이닝까지만 갈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후 중국 중앙TV는 2011년 2월 폴라드 선교사의 활동과 스먼칸 일대에 끼친 영향력을 재해석한 다큐멘터리 ‘저 하늘 너머(在天那边)’를 3회에 걸쳐 방송했다.
폴라드 선교사가 누구이기에 이처럼 중국 최고지도자로부터 극찬을 받을 수 있었을까? 중국인들에게 ‘스먼칸의 보거리(柏格理, 폴라드 선교사의 중국 이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먀오족의 구원자’다. ‘먀오족의 아버지’와 같다. 구음만 있었을 뿐 문자가 없었던 먀오족을 위해 문자를 만들어주었다. 우멍(鸟蒙) 산지에 첫 먀오족 초등학교를 세워 신식교육을 도입했다. 웨이닝현 시난 먀오족 거주지에 첫 중학교를 설립했다. 구이저우성 역사상 처음으로 학교운동장, 수영장을 만들었다. 먀오족 역사상 첫 번째 의학박사 2명 배출을 비롯해 수많은 지식인을 양성했다. 우멍 산지에 첫 서양의원을 세워 처음으로 천연두 예방 접종을 실시했다. 중국 최초로 치아 불소증(불소침착증, 치아가 누렇게 변하는 질병)을 발견했다. 중국 최초로 한센병원을 개원했다. 20세기 초기 시난지역에서 가장 큰 교육네트워크를 구축해 구이저우성, 윈난(云南)성, 쓰촨(四川)성 안에 100여 개의 학교와 기관을 관할 아래 두었다. 스먼칸 일대에 수많은 교회를 세워 기독교 신자가 85%에 달하는 중국 최대 소수민족교회를 세우는 데 일조했다. 그로 인해 스먼칸 일대 많은 먀오족이 기독교 신앙을 이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구이저우성과 윈난성 일대에서는 기독교가 ‘먀오교(苗教)’로 불릴 정도가 됐다. 그의 불같은 헌신에 따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될 때 윈난, 구이저우, 쓰촨 3개 성 기독교인이 이미 30만 명에 달했다. 이는 전체 중국 기독교인의 30%라는 놀라운 수치였다.”
폴라드 선교사의 개인사를 알아보자. 1864년 가난한 영국 목회자의 자녀로 태어난 그는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으로 사역자자녀를 위해 개교한 학교에서 공부해야 했다. 1879년 프랭크 J. 다이몬드(Frank J Dymond)와 함께 옥스퍼드지역 시험에서 최우수성적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는 1881년에 국가공무원시험에 응시해 7등으로 합격했다. 런던 우편저축은행원으로 살아가던 중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설립자 허드슨 테일러 등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1886년 은행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친구인 프랭크 다이몬드와 함께 영국연합감리교회 파송으로 중국으로 떠났다. CIM이 세운 훈련센터에서 6개월 동안 중국어 교육을 받고 사무엘 토마스 돈(Samuel Thomas Thorne) 선교사가 사역하던 윈난성으로 떠났다. 이동 중 배가 파손되는 등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윈난 자오통(昭通)에 도착한 뒤 가난과 아편, 질병에 찌든 생활을 하는 이들의 필요를 채우는 데 힘썼다. 변발을 하고 중국 옷을 입고 동네를 다니며 중국어로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복음에 반응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의 일기장엔 “우리가 접한 가장 흔한 것은 (우리에 대한) 저주와 의심이었다. 금년에 한 명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쓰여질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자오통에서 처음으로 사역하던 토마스 그릴스 밴스톤(Thomas Grills Vanstone) 선교사가 질병으로 인해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선배 선교사인 사무엘 토마스 돈은 질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친구인 다이몬드 선교사는 중국인에게 폭행까지 당하자 폴라드 선교사에게 사역을 포기하자고 제안했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온 마음과 정성으로 당신(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나의 몸과 마음은 다 당신의 것입니다.” 1890년 12월 31일자 그의 일기 내용이다. 어려움 속에 있던 그는 말라리아 치료 등을 위해 쿤밍(昆明)의 CIM 소속 선교병원에 갔다가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그의 신혼집은 윈난성 최초의 서양진료소이자 약국이 됐다. 1893년 9월 3일 노부인 2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12월 21일엔 작은 예배당을 준공했다. 1893년 당시 중국 전역에 1511명의 선교사와 3127명의 신자가 있었다.
1895년 아내와 영국으로 돌아가 쉼을 갖던 그는 1898년부터 두 명의 선교사와 함께 제2기 사역을 시작했다. 자오통 지식인 가운데 신자가 생겨나고 이들은 훗날 한족 전도자가 됐다. 폴라드 선교사는 자오통 최초의 교회 초등학교와 여학교를 운영하는가 하면 ‘전족’ 폐지운동에도 앞장섰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사람(폴라드 선교사)은 믿을 만한데 기독교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1891년부터 이족(彛族) 집단거주지에서도 활동했으나 선교적 돌파구를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1904년 구이저우성 안순(安顺)에서 사역하던 J. R. 아담스(J. R. Adams) 선교사의 소개로 먀오족이 그를 찾아오면서부터 먀오족선교를 본격화했다. 1905년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궁금해 그를 찾아온 먀오족이 4000여 명에 달했다.
먀오족 이름의 유래는 고대 갑골문자에서 찾을 수 있다. 먀오(苗)는 먀오족 서부방언 지역에서 스스로 부르는 민족 명칭의 한어(汉语) 음역으로 그 뜻은 ‘사람’이다.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먀오족은 ‘몽족(Hmong)’으로 불리기도 한다. 중국에서 좡족(壮族), 만주족(满族), 후이족(回族)에 이어 4번째로 규모가 큰 소수민족이다. 하지만 가장 가난하고 못 배워 무시당하고 심지어 다른 민족들의 노예로 살던 종족이다. 특히 시장첸후먀오자이(西江千户苗寨)는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먀오족 촌락으로 전체 주민 중 먀오족 비율이 99%, 1200여 가구 6000여 명에 달한다. 이곳은 인류학자(민속)들이 먀오족 문화가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된 지역으로 꼽는 지역이다.
폴라드 선교사는 먀오족을 위해 자오통 스먼칸에서 진료소 개설을 통해 의료선교를 하며 교회를 설립했다. 교회는 주일엔 예배처소였고 평일엔 학교로 사용됐다. 그는 “교회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먀오족 문자를 만들어 ‘먀오문 기초’, ‘먀오족 원서독본’ 등을 편역하고 ‘마가복음’, ‘마태복음’ 등을 먀오족 문자로 번역했다. 또 종두법을 실시해 수많은 사람을 고쳤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 약방을 열고 주일예배 후엔 약을 나눠주었다. 그의 사후인 1926년에는 먀오족을 위한 병원이 설립됐다. 폴라드 선교사는 먀오족에게 “물을 끓여 먹어라, 손을 씻어라. 날 것을 먹지 말라” 등 예방의학 기초의식을 전수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건강하게 되고 죽은 후에는 천당에 간다” 등 복음의 내용을 가르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예방약을 먀오족 형제에게 놓아주고는 자신은 과로와 장티푸스에 걸려 순교했다. 그의 장례 행렬에는 먀오족, 이족, 한족 등 수많은 이들이 통곡하면서 뒤따랐다. 먀오족은 복음을 전해줄 뿐 아니라 참된 인간 대접을 해 준 폴라드 선교사의 무덤을 한 달 이상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사람대접을 해 준 폴라드와 함께 천국에 가겠다”고 울부짖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먀오족들은 소천하면 폴라드의 무덤 옆에 묻힐 것을 유언하는 등 가장 큰 영예로 여겼다. ‘먀오족을 위한 ‘구원의 별’로 불린 그는 70개 지교회, 1만 명의 세례교인, 5000명의 세례 전 학습자 등 약 6만 명의 신자를 섬겼다. 그가 세운 광화(光華)초등학교에만 400여 명의 학생이 재학중이었다. 우수한 학생을 대도시로 보낸 양질의 교육을 받게 한 뒤 스먼칸으로 돌아와 교사 또는 의사로 활동하도록 도왔다. 폴라드 선교사는 술을 좋아하고 조혼과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는 먀오족 문화를 개선시켰다. 15-16세에 조혼하는 풍속을 바꿔 남자는 만 20세, 여자는 만 18세가 된 뒤 결혼하도록 장려했다. 스먼칸 일대의 대다수 먀오족은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먀오족으로부터 선교사, 의사, 교사로서가 아니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은 폴라드 선교사, “우리 아버지보다 우리를 더 사랑했다”고 먀오족이 그에 대해 고백할 정도로 온몸과 온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준 그야말로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용한 선교사의 표상이자 기독교인의 모델일 것이다. 예수님을 바로 보여주는 기독교인이야말로 중국교회의 희망이자 중국사회와 가장 조응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먀오족과 함께 먹고 함께 걷고 더불어 살아간 폴라드 선교사와 같은 이들이 많아지면 비기독인이 넘쳐나는 중국사회도 기독교인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때 기독교 복음은 사랑을 타고 중국 전역을 변화시켜나가는 강력한 마중물이 될 것이다.
왕빈 | 중국전문가
사진출처 | 바이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