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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  통권 170호  필자 : 유관지  |  조회 : 3184   프린트   이메일 
[발행인통신]
목은교회(沐恩堂) 앞에서

건국일(10월 1일)에서 시작되는 중국의 국경절(国庆节)이 들어 있는 10월이 되었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유커(游客)’들의 모습을 대할 수 있는 때이기도 합니다.


37년 전 9월의 일

한 달 전쯤에 상하이(上海)에 다녀왔습니다. 좀 창피한 이야기입니다만 상하이에서 숙식을 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초청한 분이 여러 일정을 짜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상하이의 번화가, 맛집들, 임시정부 청사, 심지어는 백범 김구 선생이 도피생활을 하던 자싱(嘉兴)까지 방문하도록 해놓았는데, 이 자싱방문이 말썽이었습니다. 2, 3일 뒤에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G-20 정상회담이 열리게 되어 있어서 교통통제와 검문검색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고속도로 출구에 장갑차가 나와 있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평소에는 한나절에 다녀올 수 있다는 자싱방문에 금쪽같은 하루가 휘익,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황푸구(黄浦区)에 있는 성삼일교회(圣三一堂)와 목은교회를 꼭 방문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안내하는 분이 거길 가자고 하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하기에 기독교인으로서 꼭 가 봐야 할 곳이라고 했습니다. 안내자는 “런던선교회와 관련된 유적지들을 안내해 달라고 하는 기독교인들은 계셨지요.” 하면서 전화를 해보더니, “한 달 전에 공문을 보내야 방문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라고 하길래 밖에서 건물만 보아도 좋으니 가자고 했습니다.  


성삼일교회는 중국 삼자애국운동회와 기독교협회, 양회(两会) 본부가 거기 있어서 가 보고 싶었는데, 결국 불발이 되었고, 목은교회 앞에만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목은교회를 애써 방문하려고 한 것은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쓸 때, 최초로 문을 연 교회가 이 교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979년 9월 2일이었는데, 그때 중국에 다녀온 재미교포 목사님이 첫 예배의 모습을 이렇게 전해 주었습니다.  


“한 1,500명쯤 들어갈 수 있는 교회당인데 중국 정부에서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했던 것 같아요. 웬걸, 한 시간 전에 꽉 차서 그 뒤에 온 사람들은 교회당 밖에서 예배를 드렸어요. 찬송을 부르는데 어찌나 우렁찬지 지붕이 날아갈 것 같더군요. 목사님이 설교를 하려고 단에 섰는데 목이 매어 한동안 말씀을 못하셨어요. 축도를 하고 예배가 모두 끝났는데 사람들이 일어서지를 않았어요.” 


이 이야기를 들려준 분은 당시 동양선교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던 임동선 목사님이었는데 임 목사님은 지난 달 24일(토)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90대이심에도 두 주간 남미 여러 나라 선교여행을 하시고 돌아오셨는데, 선교여행 중에 걸린 감기가 악화되어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  


1980년대 전후, 한국교회는 중국선교에 대해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당시 한국 여권으로는 중국을 방문할 수 없어서 중국교회의 소식을 제대로 알 수 없었습니다. 이때 재미교포들이 중국을 출입하면서 중국교회 소식을 전해 주었고, 그들이 전해 준 소식은 선교열기를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목은교회의 첫 예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 여러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는데 돌아보니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오, 저녁예배를 드리고 있네!’

목은교회는 1887년 미국감리교회에서 지었습니다. 처음 이름은 중구(中区)감리교회당이었는데 헌금을 많이 한 무어(Moore)를 기념하기 위해 1890년에 무어기념교회(慕尔堂)라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1929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고딕식으로 다시 지어 1931년에 완공했고, 1958년에 상하이 각 교파가 연합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태평양전쟁 때 이 교회당은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사용되었고 문화대혁명 때는 중학교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중국교회 현대사의 쓰라림이 그대로 담겨 있구나!’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목은교회 문에는‘상하이시 문물보호단위 1989년 9월 25일 공포’라는 표지물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시간 안내표가 붙어 있었는데 주일에는 오전에 두 번, 오후에 한 번, 그리고 저녁 7시, 이렇게 예배를 드린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오, 저녁 예배를 드리고 있네!’하며 반가워했습니다. 


저는 저녁예배 애호론자 입니다. 저녁예배는 저녁예배만의 독특한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주일 저녁예배를 없애고 오후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세속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위해 주일의 의미를 손상시키는 일이고, 바로 그런 것이 한국교회를 약하게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2007년에 목회 일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저녁예배를 굳세게 지켰습니다. 목은교회는 상하이 번화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 지하철 인민광장역이 있었고, 대각선으로는 신세계백화점이 있는데 이도 낯익은 이름이고, 백화점 꼭대기에 큼직한 삼성 광고판이 있어서 더 반갑고 친근하게 여겨졌습니다. 




“주여, 북한의 교회들도!”
목은교회 앞에 서니까 저절로 나오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주여, 북한의 교회들도 이렇게 문을 열게 하여 주옵소서!” 북한의 교회들이 문을 열게 된다면 목은교회와는 모습이 다를 것입니다. 남아 있는 교회당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북한의 교회들은 6•25전쟁 중에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북한 당국은 “6•25전쟁 때(그들의 말로는 ‘조국해방전쟁 시기’에) 미제의 폭격으로 예배당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지금도 열을 올리고 있는데 사실은 평양의 장대현교회(章台岘教会)를 비롯해서 여러 교회들이 그 뒤에 복구와 재건과정에서 파괴되었습니다. 여하튼 몇 도시에서 한두 개의 교회당이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소식도 있기는 하지만 중국처럼 쉽게 복당(复堂)될 수 있는 교회당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첫 예배를 혹시 야외에서 드리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37년 전 가을에 목은교회가 첫 예배를 드릴보다 몇 배 더 우렁찬 찬양과 많은 눈물을 보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앞에서 목은교회가 상하이 번화가에 있다고 했는데 북한의 교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표되는 것이 북한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김일성광장 가까이에 있었던 남산현교회입니다. 장대현교회, 산정현교회, 모두 요지에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교회의 바깥 정문은 잠겨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중국사정을 잘 아는 분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전화를 하면 안에 들어갈 수 있고, 양회 직원들과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라고 하더라구요. 


교회당 왼쪽에 ‘上海 两会’ 간판을 볼 수 있었는데 차가 한 대 오니까 안에서 사람이 나와 그 쪽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차가 안으로 들어가니까 문을 다시 잠그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목은교회 앞에서 감격도 하고, 기도도 하고,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이런 것도 은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목은교회(沐恩堂)를 직역하면 ‘은혜로 목욕하는 예배당’이 되는데 은혜로 목욕하고 돌아온 셈이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이 “발행인 통신”에 담으면서, 《중주》가 그런 감격과 중국선교의 열정을 선사하는 역할을 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유관지|중국어문선교회 고문, 본지 발행인. 성화감리교회(분당)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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