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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8.1  통권 168호  필자 : 왕빈  |  조회 : 2686   프린트   이메일 
[선교나침반]
美•英•独에 이어 중국도 학생선교운동 있었다
청년•학생선교의 플랫폼을 만들라(2)

 

미국 학생선교운동의 절정기
세계선교사에 신기원을 연 것은 10만 명의 학생선교자원자를 배출하고 2만5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SVM)이다. SVM은 실행위원회, 이사회, 자문위원회 등 기구가 있지만 선교사를 직접 파송하지 않았다. 지역교회와 유대관계를 갖고 각종 해외선교기관의 심부름꾼이 되고자 했다. 아울러 초기 10년 동안 400개 대학과 100개 신학대학, 200개 의과대학, 300개 정규 선교연구기관에 학생선교운동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애썼다. 훗날 SVM은 YMCA 대학부, YWCA 대학부, 범신학대선교연맹(ISMA), 캐나다범대학선교연맹(ICMA) 등과 함께 세계선교의 지경을 넓혀 나갔다. SVM의 출현은 앞서 1886년 헬몬산수양회에서 로버트 윌더, 존 R. 모트 등 선교동원가와 선교지원자 100명을 배출한 것이 결정의 계기가 됐다.  


1886년 여름 D. L. 무디가 인도한 헬몬산수양회는 미국 학생선교운동의 새로운 동력을 탄생시켰다. 프린스턴대학 대표로 참석한 로버트 윌더의 누이인 그레이스 윌더가 이같이 예언했다. “우리의 기도는 헬몬산수양회에서 응답될 것이다. 프린스턴에서 시작한 선교자원운동은 범 대학운동이 될 것이다. 수양회 참석자 가운데 100명의 자원자가 나올 것이다.”  


7월 6일부터 8월 1일까지 열린 헬몬산수양회에 250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윌더는 첫날 참석자 중 21명의 대표들이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이미 진지하게 고민해 왔다는 것을 발견했다. 무디는 수양회에서 하루 한 차례만 설교했다. 7월16일 아서 T. 피어슨 박사의 ‘모두가 가야 하며 모두에게로 가라’는 주제강연에서 참석자들은 크게 감동받았다. 윌더는 이날 오후 선교에 관심 있는 학생들을 모아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기도회는 자연스럽게 ‘10개국 모임’이라고 명명됐다. 학생들이 직접 강사가 돼 일본, 페르시아, 미국인디언, 독일, 아르메니아, 덴마크, 노르웨이. 중국, 인도 등 10개국에 대한 선교의 시급성을 역설했다. 


윌더는 선교사자녀로서 인도에서 보낸 생활을 소개하며 ‘왜 당신이 가야 하는가’가 아니라 ‘왜 당신은 가지 않으려고 하는가’라며 도전의 메시지를 전했다. 10개국 모임이 시작된 지 8일째 되는 날 78명이 선교자원서인 프린스턴 선언문에 서명했다. 수양회가 끝나갈 무렵 마지막 1명이 서명, 총 100명이 이 선언에 동참했다. 윌더는 존 N. 포먼과 함께 학생자원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1년 동안 휴학하고 미국과 캐나다의 162개 대학을 방문했다. 그 결과 1887년 말까지 2106명이 선교사 자원 선언서에 서명했다. 그중 500여 명이 여성들이었다. 미주대학생선교운동의 대명사인 SVM은 이렇게 시작됐다.

 
1888년 50명의 학생대표들이 매사추세츠주 노트필드에 모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해외선교를 위한 SVM을 정식 출범시켰다. 코넬대학 출신 존 R. 모트가 의장 겸 실행위원장에 선출됐다. SVM은 다섯 가지를 목적으로 삼았다. 첫째,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 개인의 생업으로서 해외선교 사역을 생각해 보도록 한다. 둘째, 학업에서나 활동 분야에서 선교를 위해 지원한 학생들을 교회선교부에서 직접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다. 셋째, 전체 지원자들을 하나의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활발한 운동에 참여하도록 한다. 넷째, 여러 선교부에서 필요로 하는 양질의 지원자를 확보한다. 다섯째, 국내에 남아있는 학생들에게 기도와 헌금으로 선교 사업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한다. 


1891년 SVM에 의해 미국의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제1차 국제학생전도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1940년까지 1차 세계대전 기간을 제외하곤 정기로 열렸다. 1945년까지 선교단체와 교회의 후원으로 2만여 명의 학생들이 SVM선언에 동참한 뒤 선교지로 떠났다. SVM은 ‘우리 시대에 세계복음화’라는 구호를 통해 청년학생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선교의 십자군’으로 세계 곳곳으로 떠나갈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1892년 4월 영국에서 SVM이 조직된 이래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 유럽에도 SVM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는 로버트 윌더의 개척정신의 열매였다. 1891년 장로교 선교부 소속선교사로 인도로 떠났던 윌더가 그해 영국 케스위크 수련회에 참석, 선교비전을 대학생들과 나누었기 때문이다. 윌더는 1906년 존 B. 슬레만에 의해 시작된 평신도선교운동(LMM) 탄생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13-14년 독일,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등 유럽 전역에 세계기독학생연맹(WSCF)을 조직하는 데도 앞장섰다.


미국 학생선교운동의 전환기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입니다.”


형제애와 남을 위한 헌신의 사랑,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이타심을 복음을 통해 배우고 계발했던 세계 청년학생들은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 곳곳으로 떠나갔다. 하지만 선교지도자들이 하나님 말씀의 권위 인정과 성경연구의 중요성, 사명감, 헌신, 학생들의 지도자로서 자질 강화 등에 소홀히 한 결과 세계학생선교운동의 핵이었던 학생자원운동(SVM)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이 때문에 미국의 어바나 대회, 영국 IVF가 발전한 국제복음주의학생운동(IFES), 국제CCC, 네비게이토선교회 창립 등을 통해 학생선교운동은 다변화가 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절정기를 맞았던 SVM은 30년대 들어 급격하게 쇠퇴하게 됐다. ‘학생들과 기독인 세계선교’라는 주제로 열린 36년 인디애나폴리스 대회에서 해외선교 지망자는 25명에 불과했다. 40년 토론토 대회 참석자는 465명으로 급전직하했다. SVM의 몰락은 어쩌면 예고된 일인지도 모른다. 지도층의 잦은 교체와 조직이 방대해짐에 따라 지도부의 숫자가 늘어나 효율적인 운영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1930년대 대공황에 따른 재정의 압박은 SVM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했다. 또 해외선교에 집중하느라, 학생들의 신앙생활 향상을 위한 총체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했다. 피상적이고 행정 차원에서의 선교운동을 펼쳐나간 것이다. 아울러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이 주창한 ‘사회복음’(Social Gospel)의 영향으로 학생들의 관심이 국제평화, 경제개발, 사회정의, 인종차별 등으로 옮겨갔다. 이는 학생들에게 복음의 사회책임을 가르치지 못한 반작용이었다. 이 때문에 36년 대회 때는 많은 참석자들이 전도자이기보다는 오히려 전도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했다. 결국 SVM은 59년 미국크리스천협회와 전국기독학생연합회(NSCF)로 병합됐다. 이어 66년 가톨릭학생회와 연합, 대학기독인운동(UCM)을 형성했지만 69년 총회에서 해체를 결의했다.  


SVM의 영향력이 상실되면서 새로운 학생선교운동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1936년 6월 14개 대학, 학생 53명이 컬럼비아성경대학 설립자인 로버트 매퀼킨 박사의 도움으로 북캐롤라이나 애슈빌에 모여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세계선교에 대해 토론했다. 그들은 각 대학에 새로운 모임인 학생해외선교펠로십(SFMF)를 만들어갔다. 학생들은 소속 대학에 지부를 만들고 기도회 성경연구회 등을 통해 세계선교의 비전을 키워갔다. 38년 SFMF 연례총회가 17개 대학 60여 명의 학생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케네디 후드를 최초의 전임간사로 임명했다. 41년 SFMF는 미국 전역에 36개 지부 2628명의 회원을 가진 선교단체로 발전했다. 


캐나다 IVF(IVCF)가 39년부터 미국으로 발전되면서 두 단체는 합병 논의를 시작했다. 이는 IVCF의 세 가지 목적인 전도, 제자도, 선교 중 세 번째 목표인 선교와 SFMF의 비전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45년 11월 SFMF가 IVCF와 합병되면서 SFMF는 주로 기독교계통 학교(무디성서학교, 휘튼칼리지, 컬럼비아성서대학 등), IVCF는 비기독교대학에서 활동하면서 복음 사역을 펼쳤다. 특히 IVCF의 선교담당 간사였던 크리스트 윌슨이 SFMF의 책임을 맡으면서 북미주선교 대회를 열 것을 결정, 46년 151개 대학 575명의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첫 대회를 가졌다. 그 후 48년부터 이 대회는 미국의 일리노이주 어바나주립대학에서 3년마다 열리게 됐다. 이 대회가 오늘날 어바나선교 대회다. 지난해 12월에 열린 어바나 대회는 170개국 2만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학생선교 대회가 됐다. 어바나 대회의 성공은 SVM과는 달리 인종 문제, 선교현장에서 기독인의 사회책임, 해외선교와 국내선교, 공산권의 이해와 선교 등을 대회 프로그램에 포함시켜 학생들의 욕구를 채워준 데 기인한다.


영국•독일청년•학생선교운동의 새 물결

독일과 영국의 청년학생선교운동도 20세기 들어 새로운 흐름이 형성됐다.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자유주의 신학에 저항하며 기독교 가치관을 대학과 지식인층에 퍼뜨려갔다. 독일의 경건주의 기독인들은 영국과 미국 복음주의 학생모임에 참석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D. L. 무디가 인도한 미국의 북애틀랜타에서 열린 학생수련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중 한 사람이 “우리 독일이 복음을 먼저 받았는데 지금은 복음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느냐”라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베를린으로 돌아온 그는 몇몇 기독인들과 이 문제를 깊이 논의, 1890년 8월 대학생수련회를 개최하는데 합의했다.

이 수련회에는 20명 만이 참석했고 매년 여름방학 각 대학에서 돌아가면서 개최할 것을 결의했다. 수련회 참석자들을 중심으로 소그룹 기도모임과 성경공부모임이 생겨나면서 마침내 1897년 독일기독학생동아리(DCSV)가 설립됐다. 당시 11개 대학 110명의 회원으로 시작했지만 1913년 29개 대학 1000명으로 늘어났다. DCSV는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박해로 1938년 강제 해산되기까지 건강한 선교운동을 펼쳤다. 특히 DCSV 출신들은 독일의 국가교회와는 별도로 히틀러 치하에서 지하교회 운동을 주도했다. 


한편 영국 케임브리지기독인연합(CICCU)이 복음주의의 정체성이 흔들리던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SVM의 국제조직)의 영국 SCM에 대항하며 별도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1919년 북잉글랜드 케직수련회에 케임브리지대학과 옥스퍼드대학 출신의 복음주의자 29명이 참석한 것을 계기로 1928년 IVF를 정식 발족시켰다.  


IVF는 3년마다 선교모임을 가졌다. IVF는 1930년대 신학대학이 좌경화하고 교회가 자유주의신학과 세속화에 휘둘리던 영적 위기 속에서 복음주의 신앙을 수호하는 견인차가 됐다. IVF가 있는 대학들은 모두 영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특히 1952년부터 존 스토트 목사가 새로운 유형의 복음주의의 과제를 제시, IVF의 사명을 완성해 나가는데 앞장섰다. IVF는 1947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영국, 노르웨이, 캐나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스위스, 중국 등 10개국으로 구성된 IFES(국제복음주의학생회)로 발전됐다. 이후 IFES는 세계 142개국 회원 30만 명을 네트워킹 했다.


중국 학생선교운동

미국의 학생자원운동(SVM)은 중국기독교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유럽과 북미주에서 온 선교사들은 기독대학과 신학교 등을 설립하는 한편 청년학생들이 참여하는 대형집회와 순회전도를 통해 선교단체를 구성해 나갔다. 하지만 1920년대 전국을 휩쓴 반기독교운동과 1930-40년대 이데올로기의 극한 대립은 청년학생선교의 동력을 차단시켰다.  


청년학생회 조직이 생겨난 것은 1885년 푸저우(福州)에 영화서원(英华书院)이 설립되면서부터였다. 이어 통저우(通州)의 노하(潞河)서원과 항저우(杭州)의 육영(育英)서원에도 청년학생회가 구성됐다. 특히 1895년 미국의 D. W. 라이욘 선교사가 청년선교운동을 이끄는 한편 SVM의 지도자 존 R. 모트 선교사가 1895년부터 1928년까지 6차례 중국을 방문,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지역마다 기독청년회가 조직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모트 선교사는 1913년에만 14개 성(省)에서 약 13만 명의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1897년 1월 모트는 전국의 청년회 조직을 하나로 묶어 상하이(上海)에서 제1차 대학청년회 전국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22개 대학단체가 참여했다. 1898년에는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제2차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1912년 상하이에 본부를 둔 ‘중화기독교청년회 전국협회’가 설립됐다. 1922년까지 전국청년회는 5만3800여 명의 회원을, 대학청년회는 200여 개 학교 2만4100명의 회원을 갖게 됐다.  


1922-27년 반기독교운동이 중국을 휩쓸면서 선교운동은 큰 난관에 부닥쳤다. 1922년 4월 4일 세계기독학생연맹이 베이징(北京) 칭화(清华)대학에서 32개국 146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11차 대회를 가졌다. 이때 550여 명의 중국인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는 ‘현대 학생들에게 어떻게 기독교 복음을 전할 것인가’, ‘학교생활을 어떻게 기독교화할 것인가’, ‘교회 안에서 학생의 책임은 무엇인가’ 등에 대해 논의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이는 반기독교 정서가 중국 안에 널리 퍼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하이에 반기독교 학생동맹이 이뤄진데 이어 베이징대학 교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와 리스쩡(李石曾)의 지도하에 반종교운동 조직이 성립됐다. 또 베이징대학 리다자오(李大釗) 교수 등은 ‘신보’(晨报)에 ‘비종교자선언’이라는 글을 게재, 공개로 반기독교 학생운동을 지지했다. 특히 광동(广东) 중국사회주의공청단의 격월간지인 ‘선구’(先驱)가 ‘비기독교학생동맹호’란 이름으로 개칭, 적극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했다. 또 소년중국학회장 위자쥐(余家菊)는 ‘중화교육계’란 잡지에 “기독교 교육이 중화민족 존재를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항일구국운동을 거치면서 기독교는 세속의 길을 걷게 됐다. 1935년 기독교대학에서 크리스천학생 수는 고작 4분의 1에 불과했다. 정기로 예배에 참석하거나 종교과목을 이수하는 학생은 3분의 1에도 못 미쳤다. 공산당과 국민당이 극한투쟁을 벌이면서 학생들도 이분화가 됐다. 당시 대표 학생단체였던 ‘중국그리스도인학연’(학연)과 ‘기독교학생운동’(학운)은 대립했다. 자유신학의 영향권에 있던 학운은 학연의 캠퍼스 복음화 사역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학운은 훗날 공산당의 통일전선전술에 의해 와해됐다. 이에 비해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기독교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학연은 복음 전파의 사명과 사회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다양한 청년학생운동을 일으키며 중국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45년 전국의 복음주의 학생대표들은 총칭(重庆)에서 ‘중국의 각 대학 기독학생연합회’를 결성했다. 자오쥐잉(赵君影) 목사와 학연 설립을 주도한 데이비드 에드니 선교사는 왕밍다오(王明道) 목사와 함께 베이징기독교회에서 집회를 갖고 부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후 공산당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기독청년들은 왕밍다오, 쉬홍다오(许宏道) 목사 등을 초빙, 연합기도회를 가졌다. 하지만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등장하면서 선교운동은 급격히 쇠퇴,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왕빈 | 중국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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