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 대신에 감사를
바울은 두 번째 전도여행을 떠났을 때 아시아 쪽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허락하지 않아 주춤거리다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유럽 쪽으로 방향을 돌립니다. 역사가들 가운데는 이 일을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때 바울이 찾아가서 복음을 전한 유럽은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면서 문명이 발달한 선진대륙이 되었는데 아시아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민족복음화운동을 하는 분들 가운데는 이 때 바울이 아시아로 오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아시아 쪽으로 왔다면 우리나라는 기독교 역사 초기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나라가 되었을 것이고 나라의 모습도 달라졌을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울 때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였는데 바울은 아마도 고구려 땅부터 밟았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영토는 매우 광대했기에 복음이 넓게 퍼져나갔을 것을 그런 아쉬움이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복음화를 바라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 때 바울이 아시아 쪽으로 향했다면 그 발길이 우리나라에 닿기 전에 중국을 먼저 밟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중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2천 년 전에는 바울의 전도로 유럽에서 왕성하게 역사했던 성령이 지금은 아시아 대륙에서 강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한반도에서 그러했고, 지금은 중국 대륙이 세계에서 성령의 역사가 가장 강한 곳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아시아 대륙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동역자로 살아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아시아 대륙의 크리스천으로 지금 우리의 이 의무를 다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힘쓰니”
성서는 앞에서 말씀 드린 일을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사도행전 16:6-10)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냥 넘기고 있는 단어 둘을 저는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는 10절에 있는 “힘쓰니”입니다. 사명에는 ‘힘씀’이 따라야 합니다.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 종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하는 꾸지람과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었습니다(마태복음 25:14-30).
사명은 힘씀과 고난 속에 이뤄집니다. 바울은 유럽의 관문인 빌립보에서 체포당하고, 맞고, 갇혔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았는데 우리는 모두 선교중국의 비전을 본 사람들이며 그 비전을 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얼마나 힘쓰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싶어집니다.
“인정함이러라”
또 하나는 10절 끝부분에 나오는 “인정함이러라”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환상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를 바로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환상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만일 바울이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우연히 있었던 것으로 여기고 잊어버렸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10절) 인정했습니다. “인정함이러라”를 〈표준새번역 개정판〉은 “확신하였기 때문이다”라고, 〈공동번역 개정판〉은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했는데, 저는 “결단함이러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14억 중국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선교의 깃발을 들고 세계복음화를 이루기 위해 행진하고 있는 중국교회의 좋은 동역자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그 확신을 새롭게 해야 하며, 새로운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중국어문선교회는 제주 이전이 하나님의 명령이며 인도하심 인줄로 인정하고, 확신하고, 이에 순종하기로 결단을 내렸고 힘써 이전했습니다. 중국어문선교회는 제주 이전에 따르는 정리를 마치고 16일(월)에 이전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저는 이전 감사예배에서 사도행전 16장을 본문으로 하여 이 같은 말씀을 전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전한 장소가 제주대학 앞이어서 젊고 싱싱한 분위기가 본부에도 가득 찬 것 같이 느껴집니다. 신록의 계절인 5월이어서 더욱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선교회가 젊어져야 하고, 우리의 사역 역시 이렇게 싱싱하고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다문화 문제는 중국이 대선배
5월호의 특집 주제는 “국내 다문화사역의 현주소와 과제”입니다. 이 문제는 범위가 넓기 때문에 6월호에도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단일민족’이라는 점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또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1980년대에 해외여행을 할 때 다른 나라의 입국신고서에 ‘국적’란이 있고 또 ‘민족’란이 있는 것을 보고 ‘번거롭게 왜 둘을 만들어 놓은 거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저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다문화사회가 되어 텔레비전에 다문화가정을 소재로 하는 주간 프로그램이 생기고, 농촌학교에는 다문화 아동들이 날로 늘어나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국제화가 된 학교들은 서울 강남에 있는 것이 아니고 농촌에 있다.’라는 우스갯말이 생기고, 19대 국회에 다문화 출신이 여당의 비례대표의원으로 활동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다문화 문제는 중국이 대선배이며, 한 수, 아니 여러 수 위입니다. 우선 중국의 헌법 제4조에서 소수민족들에 대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각 민족 인민은 모두 평등하다. 국가는 소수민족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고, 각 민족의 평등, 단결, 상호협조관계를 옹호하며 이를 발전시킨다. 국가는 소수민족의 특성과 필요에 근거하여, 각 소수민족지구의 경제와 문화발전에 최선을 다한다. 각 소수민족 집거의 지방은 구역자치를 실시하고, 자치기관을 설치하며, 자치권을 행사한다. 각 민족자치지방은 모두 중국과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다. 각 민족 모두는 자신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가 있으며, 모두 자기의 풍속과 관습을 유지하고 개혁할 자유를 가진다.”라고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명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숫자는 별로 많지 않지만 56개 소수민족이 주로 변강(边疆)에 포진해서 살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예전 헌법에는 ‘중국은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는 대가정이다’라는 말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우리는 다문화 문제에 대해 중국으로부터 배우거나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5월입니다. 6일이 임시공휴일이 되어서 어린이날에 이어 나흘 연휴가 되어 좋아하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사업을 하는 분들은 노동절 연휴에 한국을 찾는 ‘유오커(游客)’들 때문에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중주》가족 여러분에게도 이 5월에 즐거운 일, 기쁜 일이 많기를 바라며 5월의 ‘발행인 통신’을 닫습니다.
감사합니다. ♣
♧ 유관지|중국어문선교회 고문, 본지 발행인. 성화감리교회(분당)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