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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1  통권 163호  필자 : 나은혜  |  조회 : 2095   프린트   이메일 
[나은혜 선교문학]
가슴을 울리는 사랑, 《편지》

우리 가족이 선교지에 와서 두 해 쯤 지났을 때였다. 서울에 있는 아가페교회가 “J랜드”라는 이름으로 매월 선교지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책 한 권씩을 보내주었다. 그러던 어느 달에 나는 《편지》라는 소설책을 소포로 받았는데, 한 젊은 부부의 생과 사를 넘나드는 가슴 울리는 사랑 이야기였다. 선교지에서는 좀처럼 접할 수 없는 책이기에 참 재미있게 읽었다. 《편지》는 한국에서 한참 인기가 있는 책이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나 역시도 그 책 《편지》를 읽으면서 한참을 흐느껴 울었을 만큼 감동이었다.
 

《편지》는 숲과 나무를 사랑하여 수목원에 근무하는 한 젊은 연구원과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시’를 사랑하는 한 여자와의 사랑 이야기이다. 그 여자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후에 다시 국문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똑 떨어지게 똑똑한 아가씨다.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인 지적이고 전형적인 서울 아가씨와 자연을 너무도 사랑하여 아예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순수하기 그지없는 젊은 수목연구원과의 그림 같은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수목원을 달리며 사랑을 속삭인다. 그렇게 사랑이 깊어진 그들은 드디어 결혼을 한다. 하지만 가난한 그들은 살 집이 없어서 수목원 안에 있는 아무도 쓰지 않고 비워있던 허름한 통나무집을 수리하여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투박하고 소박한 집 입구에 깜찍하고 예쁜 우편함을 만들어 달며 달콤하고 작은 행복을 누린다. 그런 그들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밤이면 빽빽-- 소리를 내는 오리주전자에 물을 끓여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다. 그렇게 낮 동안 쌓인 피로를 풀면서 두 사람은 미래를 설계하며 마냥 행복해 한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이 젊고 싱싱한 신혼부부는 결국 1년 반의 짧은 결혼생활을 뒤로 하고 영영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젊은 수목연구원 남편이 악성 뇌종양에 걸린 것이다. 그런데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젊은 남편은 죽기 전에 자신의 사후에 일어날 일들을 위해 준비를 시작한다. 사랑하는 아내의 삶이 자신이 죽고 나서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영원의 길을 떠났을 때, 아내가 용기를 잃지 않고 삶을 잘 영위해 갈 수 있도록 아내에게 자신이 없는 이 세상에서 배달될 편지를 쓴다. 그리고 그는 죽는다. 지적이고 아름다운 젊은 아내는 남편이 죽자 너무나 힘들어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녀는 계속해서 죽은 남편에게서 배달되어 오는 편지를 받는다. 때로는 울리고 때로는 웃기는 남편의 편지를 받으면서 아내는 마치 남편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자신의 죽음으로 인한 극한 슬픔의 과정을 겪을 아내를 생각한 남편의 사랑과 배려의 편지는 때맞추어 배달되어 온다. 아내가 이제 그 슬픔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새 삶을 시작하기까지 남편의 편지는 단계별로 계속 배달되어 온다. 그러던 중 아내는 죽은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게 되고, 아내는 남편의 분신인 아기와의 만남을 행복해 하면서 삶의 용기를 갖게 된다. 죽은 남편의 살았을 때의 사랑이 살아 있는 아내의 희망이 되어서, 이제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책 《편지》를 읽으면서 나의 삶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당시 선교지에서 불혹의 나이라는 40대를 넘어 선 나는 어느 듯 일상생활 속에 찌들어 가고 있었다. 그동안 신앙훈련에 집중하느라고 정서적인 채움을 필요로 하는 나의 마음이 원하는 요구들을 채워주지 못했었음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어가면서 그동안 내가 소중히 가지고 있다가 오랫동안 잊어 버렸던 무언가를 되찾은 느낌이 들었다. 더욱이 선교지에서의 삶은 늘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부부생활도 건조해지기 쉬웠다. 특히 이곳에서는 선교사로서 자신의 신분을 숨기며 살아가야 하는 스트레스로 인해 오는 정신의 부담도 힘들게 느껴지고 상처 입은 이웃(동역자)으로 인해 힘들기도 하던 때였다. 그러던 차에 한 권의 책을 통해 새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잃어버린 정서도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마 나는 한국에 있었으면 이런 종류의 책은 읽을 생각도 안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교지에서는 이런 일반 소설도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고국의 냄새와 정서가 배어있어 선교사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젊디젊은 부부의 풀잎에 맺힌 이슬 같은 풋풋한 사랑이야기는 양희은의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를 생각나게 해 주기도 했고, 당시 선교지에서 긴장하며 살고 있던 나에게 윤활유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런데 《편지》는 나의 정서를 치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전혀 예기치 않았던 놀랍고 급작스런 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우리 공동체의 한 자매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과 함께 교제하던 간호사 선교사가 있었다. 싱글이어서 항상 함께 예배를 드리며 가족처럼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의 조카가 미국에서 언어 연수차 이곳에 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선교사의 조카인 그 자매는 연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자매의 부모는 연애 중인 그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자 그 남자와 떼어 놓기 위해서 선교사인 이모가 있는 이곳에 딸을 보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자매는 이곳 대학교에서 언어를 배우러 다니면서 주일에는 우리 집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며 교제하였다. 그러다가 자기 이모가 선교에 관한 일로 한동안 다른 곳으로 가게 되자. 이 자매는 나를 엄마처럼 따르면서 매주 빨래 보따리를 가지고 와서 우리 집에서 빨래를 해서 가지고 가며 가족처럼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자매는 우리 집에서 《편지》를 빌려다가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 책을 빌려 간지 이틀이 지나지 않아서 이 자매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그 자매의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고서야 자매가 급하게 미국으로 돌아간 것을 알았다. 우리는 너무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서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자매는 《편지》를 읽고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연애 중에 있던 자매에게 《편지》는 집안에서 반대하지만 본인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강한 힘을 실어 주었던 것이다.

자매의 부모는 자매가 사랑하는 남자와 떼어 놓으려고 하고 극심한 반대를 하고 있어서 부모를 거역하지도, 사랑을 택하지도 못하고 갈등을 하고 있던 차에 《편지》를 읽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사랑을 이루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용기를 내어 돌아간 것이다. 결국 자매는 미국으로 가자마자 브라질 이민 2세였던 그 남성과 결혼을 했고 지금은 벌써 두 명의 아이를 낳고 잘 살고 있다. 선교지로 배달된 《편지》는 이처럼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서 나의 정서 회복의 윤활유 역할을 해 주었을 뿐 아니라, 가족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해 괴로움에 빠져 있던 한 커플을 구제해 주었다.  


사실 선교지에서는 정서가 건조해 지기 쉽다. 그런 가운데 매달 J랜드에서 보내오는 한 권의 책은 선교사의 삶에 큰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 이후에도 J랜드에서는 정말 내가 한국에 살고 있었다면 결코 쉽게 보지 않았을 《봉순이 언니》 라든가 《8월의 크리스마스》등의 책들을 보내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늘 제자훈련이니, 영성훈련이니 하는 기독교 서적들만 볼 때는 채움을 받지 못하던 정서의 만족을 이런 일반 소설을 읽으면서 채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물론 J랜드에서는 선교지에서 도움이 되는 신간 기독교 서적들과 좋은 복음성가나 경음악 CD 등 많은 것들을 보내 주었다. 중요한 것은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자칫 건조하기 쉬운 선교사의 삶을 치유하고 돕기 위하여 매달 관심을 가지고 책을 보내 주었다는 것이다. 아가페교회의 이 작은 관심과 사랑, 그 자체만으로도 나와 우리 가족은 큰 격려를 받았다. 아마도 선교지에서 J랜드를 통하여 매달 한권의 책을 선물로 받는 많은 선교사들이 나와 동일한 고마운 마음을 느낄 것이다.



 

나은혜 | 장로회 신학대학교 선교문학 석사, 미국 그레이스신학교 선교학 박사, 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 지구촌 은혜 나눔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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