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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  통권 160호  필자 : 천 형제  |  조회 : 2929   프린트   이메일 
[기획]
중국선교를 위한 제자훈련


지난 11월에는 한국중국선교협의회 주관으로 제5차 2015선교중국 콘퍼런스가 ‘제자훈련과 선교중국’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특별히 주제강연을 펼쳤던 천 형제님의 글을 요약 정리했다. 천 형제님은 1987년부터 중국의 변화가 컸던 28년간의 제자훈련 사역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음을 확신하시며 메시지를 전하셨다.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십니다.” 다니엘서의 이 구절은 그가 중국에서 오랜 기간 섬김의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힘이 됐다. 물론 실패와 좌절을 겪을 때도, 고난을 당할 때도 있지만 주님이 중국을 사랑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주님은 중국을 어떻게 사랑하실까?”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의 답을 강의를 따라가며 찾아보기로 한다. _편집자주


“주님은 중국을 어떻게 사랑하실까?”하는 앞의 질문에 그는 복음이 중국 전역에 전파되고 있으며, 중국교회를 사용하셔서 중국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임받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중국교회가 부흥하여 일어나는 것을 볼 것이며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중국교회는 견고한 교회로 성장할 것이다. 그런 후 전면적인 선교가 중국교회에서 강력하게 일어날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기를 기도한다. 어떤 때는 마음이 급해질 때도 있어서 바로 지금 중국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느낄 때도 있다. 다함께 중국교회의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 지를 생각해보길 바란다.
 

우리는 오늘의 중국교회를 어떻게 성장시켜야 하고, 중국교회가 어떻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제자훈련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번 선교중국 콘퍼런스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의 명사는 ‘제자’이다. 우리는 제자가 된 뒤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제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제자는 추상명사가 아니다. 제자는 우리가 큰 대가지불을 하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우리 자신이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만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주님께서 그의 교회에게 주신 사명은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하는 것이다.
 

존 스토트가 쓴 어떤 책에서 말하기를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제자가 있는데 이 세계는 지금 성경의 원리에 따라 훈련된 제가가 너무 부족하다고 언급했다. 또한 그는 하나의 단어를 언급했는데, 그것은 제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제자를 삼는 것이 시작되는데 주 예수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어떤 사람이 주님을 따르려 한다면, 날마다 그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서 본다면, 중국교회는 많은 제자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그 비율은 어떤가? 만약에 우리가 이런 비율을 생각해본다면, 8천만 기독교인들이 중국에 있는데 진정으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얼마나 있길 바라는 걸까? 우리는 이런 비율이 상당히 낮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교회를 위해 많은 걱정을 한다. 도대체 진정한 제자를 얼마나 양육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큰 문제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사도행전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제자훈련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그들에게 엄격한 훈련을 시키는 것으로 제자삼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많은 사역을 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제자를 삼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제자훈련의 범위는? 하나의 범위는 “우리가 어떻게 제자훈련을 해야 하는가”이다. 그리고 이들 제자들은 선교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심지어 땅 끝까지 나가서 주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제자훈련을 할 것인가?
 

처음 제목으로 삼은 것은 ‘선교훈련을 위한 제자훈련’이다. 사실 이 제목을 ‘선교를 위한 제자훈련’으로 고쳤다. 그것은 훈련을 받은 제자들은 선교적 목적에 도달해야 된다는 말이기 때문에 제목을 수정했다. 첫 번째 문제는 우리는 어디서 제자훈련을 해야 하는가? 중국에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중국의 어느 지역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제자훈련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것은 우리의 견해와도 맞는 것일까? 우리가 한 사람의 훈련자라면 우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서 훈련을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훈련은 그들이 1년, 2년, 3년 후에,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훈련받은 제자들의 사명에 관련된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선교라고 말하며, 우리는 선교 사역을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들 제자들은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교회에서 제자들을 양육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양육한 제자들이 선교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필요함을 본다. 많은 선교학자들은 우리가 가서 단지 복음을 전하고, 좋은 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만으로는 선교 사역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는 것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하나의 모형을 주 예수를 통해 보았다. 그가 12명의 사도를 불러모으고, 그들을 인도하셨다. 후에 120명도 그렇게 하셨다.


사도행전 1장에서 마가 다락방에서의 무리들, 그들은 예수의 대사명에 대해 거절할 수 없었겠지만 한편으로는 큰 부담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서 말씀하셨다. 그들이 대사명을 받은 후, 주 예수는 하늘로 승천하셨다.
 

사도행전에 2장에 이르면, 우리는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하시면 그들이 감동을 받고, 대사명을 받아 복음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복음을 전한 뒤에는, 그들이 예루살렘교회를 세우는 것을 본다. 그래서 우리는 주 예수가 이들을 훈련하신 후에야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다. 복음을 전하는 것의 중요한 하나의 결과는 곧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그들은 예루살렘교회를 세웠다. 예루살렘교회를 설립한 후에 교회는 많은 제자들을 양육했지만 오래지 않아 예루살렘교회가 부흥하자 핍박이 시작됐다. 곧 스데반이 받은 핍박이었다. 제자들은 흩어졌다. 신기한 일은 이들 제자들이 흩어질 때, 사도행전 8장에서는 이렇게 각 지역으로 흩어진 제자들은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각 지역으로 피난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상 그들은 피난간 것이었다.
 

제자들은 각 지역으로 피난가서 흩어졌지만 성경에는 피난간 이야기가 없다. 그들은 전도하러 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빌립은 사마리아로 가서 사마리아교회를 세웠다. 사도행전 11장에서는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사람들이 흩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베니게와 안디옥으로 곧장 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후에 안디옥교회를 세웠다.
 

우리는 이처럼 간단하게 시작된 모형을 보면서 제자훈련은 기본적으로 교회 안에서 양육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들 교회가 양육한 제자들이 끊임없이 복음전하는 일과 교회세우는 일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행전 13장에서도 바울이 어떤 사람들을 데리고 동일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후에 바울은 설립한 교회에서 제자들을 양육하고 계속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다. 사도행전 16장에 이르면, 마케도냐의 이상을 본 후에 그들은 유럽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서쪽으로 향하는 전략을 세운다. 그리고 복음은 계속해서 전해지고 전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견고하게 세워지고 온 세상에 복음전하는 선교 사역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우리는 부디 일을 급하게 이루려고 하다가 도리어 일을 그르치지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가 부흥된 후에 일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된다. 사도행전 2장을 통해 중국교회는 복음전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성경에서 이들 본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로 양육된 최소한의 3천명을 볼 수 있다. 또한 구원받은 사람들이 날마다 더해 가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제자훈련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베드로와 열한 사도들이 순수한 신앙을 전하는 것을 본다.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회개하지 않는가? 유대인은 율법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할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의 죽음과 그의 구속, 그의 구원의 은혜를 의지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요, 메시아시다. 이 회개는 유대인들이 그 당시에 엄숙하게 지키는 일 가운데 하나였다. 아마도 그들 가정이 파괴되고 가족이 죽거나, 공동체가 요구하는 대로 따라야 하거나,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를 해야 하고, 예수를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된다.
 

사도들은 믿음이 없었을 때는 무지한 백성이었다. 이들은 어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 끊임없는 사도훈련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계시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꾸준하게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지켰다. 서로 교제하며, 서로 왕래하며, 서로 사랑했다. 주를 믿는 사람들은 진실로 친형제보다 친자매보다도 그 이상이어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는 것은 중요한 제자도 중의 하나다. 우리는 이 사람이 하루에 몇 시간을 기도하는지, 성경을 몇 장을 읽는지에 따라 주의 제자 됨을 평가한다. 요한복음 13장 17절에서 예수의 제자훈련에서 가장 분명한 것은 바깥 사람들과의 접촉이 없었던 같다. 오로지 오랜 시간 제자들과 함께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는 이들을 진정한 제자들로 삼을 수 있었나. 그는 제자의 사랑에 대해 발을 씻기는 것으로 표현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제자들은 하나 되기 위하여 기도하는데 그것은 교회의 하나 됨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자의 특별한 행동인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중요한 일이기에 영원히 사도의 훈련을 지켜야 한다. 그런 후에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고, 기도를 하는 것이다. 주를 기념하라, 주님을 위해 기도하라. 기도하면서 성령충만하고, 기도하면서 주의 말씀을 알아가고, 기도하면서 주 되심을 인정하게 된다. 이것은 제자의 태도이다.
 

사도행전2장의 물질의 헌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중국교회는 물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가장 꺼린다. 심지어 중국교회 안에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절대로 헌금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그들이 복을 받기를 원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자원해서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것을 본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런 머리가 되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  현재 중국에는 8천만 명의 신도와 30-40만 개의 교회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오늘날의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증인 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 이는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문제이다.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각처에 있는 교회는 모두 평안을 누렸다. 그들은 범사에 주를 경외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 되심을 고백하는 교회로 세워져 갔다. 또한 성령의 위로를 받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이심을,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통하여 증인된 삶을 사는 것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도행전13 장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안디옥교회의 사역자들이 함께 금식하며 기도할 때,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그들이 안디옥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아주 열심히 했을지라도 그것은 첫 단계에 불과하다. 두 번째 단계는 그들을 파송하는 모임을 만들고 세계선교를 위해 파송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시점에서 중국교회가 얼마나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세계선교를 위해서는 많은 교회들이 연합하고, 후방에서 선교를 견고하게 지지해주는 교회가 있어야 한다. 지금 중국교회는 어느 시점에 와 있는가? 중국교회는 성경적 관점과 현재의 상황이 어떤 의미를 반영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중국교회는 제자훈련에 대해 실제에 맞지 않게 높은 이상만 추구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제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중국교회는 제자를 양육하는 교회가 맞는가? 중국교회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시작하고 있는가? 우리가 땅에 돌이 많은데 돌을 치우지 않는다면, 씨앗이 길가에 뿌려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것은 가시덤불을 없애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
 

중국교회는 다시 한 번 뒤돌아 봐야 한다. 사회주의 중국은 현재 중국의 모습이다. 중국 가정교회의 실제 상황은 어떠한가? 현재 8천만의 신도가 있는데 가정교회는 최소한 5천만에서 6천만으로 보고 있으며, 많게는 20 만 개에서 30만 개의 가정교회가 있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설명은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30만의 가정교회 또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교회란 말인가? 그 현실은 우리가 중국 농촌교회를 공유하고 나누어야 한다. 지난해에 허난(河南)성의 한 농촌교회에서 주일예배 설교를 했는데 200여 명이 참석을 했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60 세 이상의 노인들이었다. 50세 이하의 사람들은 모두 일하러 도시로 나갔다. 도시로 나간 그들은 예배를 위해 모이지도 않고, 신앙생활도 하지 않고 있다. 농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노인들뿐이고, 농촌교회의 노령화 현상은 매우 심각하다.
 

영적인 성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들의 영성은 연약할 뿐 아니라 세속화(世俗化)에 물들어 세상을 따라가고 있다. 심지어 사역자들도 돈을 사랑하고 권세를 좋아하고, 세상의 쾌락을 즐기는 끔찍한 현실이다. 예를 들어 보자. 농촌 지역에서 아들의 결혼문제는 중요한 일이다. 집도 지어야 하지만 결국 방법이 없으니 돈을 빌린다. 사역자뿐 아니라 신도들에게도 20만 위안, 30만 위안, 40만 위안의 뭉칫돈을 빌린다. 그러나 집을 다 지어도 아들과 며느리는 돌아와 살지 않는다. 설교자도 물질 앞에서 온전할 수 있는가? 교회 안의 세속화는 매우 심각하다. 영적으로 매우 약하다. 심지어 농촌교회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 현상이 일고 있다.
 

우리는 또한 소수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소수민족교회는 농촌교회 보다 훨씬 더 열악하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문제를 갖고 있어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1970년대 문화혁명기간에 하나님은 농촌교회가 부흥하도록 하셨다. 비록 지금은 3억 명의 농민공(农民工, 농민의 신분이지만 실제로는 도시에 와서 일하는 중국의 빈곤층 노동자)들이 있지만 오늘날 농촌에는 5-6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농촌가정교회를 위해 제자양육 훈련을 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성경의 첫 번째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예수는 유대인이었으며 일평생을 그들과 함께 지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고 피를 흘려주셨다.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이다. 훈련자들은 교회 가운데로 들어가서 중국교회에 대해 충분히 알아야 한다. 그러면 오래 동안 그들 가운데 있을 수 있다. 그들과 함께, 그들 사이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두 번째,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은 18, 19 세기, 선교사들이 왜 중국의 회복을 위해 그렇게 힘썼는가? 그들은 주를 위해서는 고통을 받았고, 중국을 위해서는 헌신했지만 마치 그들은 돈 많고 권세있는 사장 같았다. 그들은 그들의 문화를 누렸다. 낙후됐던 중국이 이제는 이렇게 큰 발전을 이루었다. 사회주의 중국은 현지인 사역자를 세워서 모든 것을 하게 했다. 현재 많은 한국선교사들은 현지인들에게 훈련 사역을 이양했다. 이것은 매우 올바른 방향이다. 5•운동 뒤 중국교회는 토착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아니라 반기독교운동도 강하게 일어났다. 그들은 새로운 이념, 곧 기독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며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침략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토착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또한 그들은 유교사상을 강조했다. 이때 그들은 이미 교회의 중국화를 제기했다.
 

셋째, 중국 가정교회의 제자들과 훈련이다. 도대체 우리의 제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중국 가정교회의 제자들은 최고의 지도자요 교회를 책임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제자를 삼아야 하고, 훈련을 하기 위해 훈련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 우리는 청년사역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그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에는 일반훈련과 전문훈련이 있다. 일반훈련은 성경훈련인데 신학과 주해설교, 교회역사, 교회성장과 선교 등이다. 훈련기간은  2-3 년이다.  젊은 사역자들은 더욱 더 영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중국 농촌교회는 더욱 더 새로워져야 하고 구조적 전환을 필요로 하기에 그런 훈련된 청년사역자들이 필요하다.
 

어린이주일학교교사를 훈련하는 목적에 대해서도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일자리를 찾아 떠났나? 모임에는 참석하고 있는가? 우리는 주일학교를 섬기는 그들을 찾아야 한다. 어린이교회교육은 하기가 쉽지 않다. 어린이 사역은 100년의 시간이 걸린다. 다음세대를 위한 훈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중국의 어떤 지역에서는 어린이주일학교교사를 위한 훈련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교사의 목적은 훈련을 통해 교회 안에서 큰 일들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주일학교교사로서 더 주일학교를 더욱 부흥시킬 것이다. 또한 중국 농촌에는 6천여 명의 류서우얼통(留守儿童, 고향에 남아있는 농민공자녀. 웹진《중국을주께로》 8월호 ‘차이나 윈도’참고)가 있다. 그래서 주일학교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왜 세대가 단절되었나? 교회가 주일학교 사역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에는 주일학교 사역은 큰 발전이 없었고, 지금은 어린이주일학교교사 훈련을 받을 사람이 없다. 주일학교교재를 만드는데 큰 지출을 하는 등 대가지불을 하며 우리는 농촌으로 가서 주일학교교사 훈련을 시켰다. 중국 농촌교회는 더욱더 새로워져야 한다. 그리고 대학생 사역과 도시교회를 세우는 것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중국에는 3천5백만 명의 대학생이 있다. 대학생들이 도시교회를 세우는 주요한 그룹이다. 다시 말하지만 제자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제자양육을 해야 한다. 교회는 2 년 동안 그들을 제자훈련을 받게 하여 그들을 다시 지역교회로 보내 그 지역교회를 섬기게 한다. 미래 중국교회는 하나의 교회가 하나의 지역을 섬기는 그들이 신학교육을 하기를 바란다. 외형적인 규모보다는 신실한 제자로 양육하는 것, 해외선교사로 나가기를 소망하며 그들을 도울 것이다. 중국교회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책임있는 좋은 길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13 억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고 선교해야 할 필요가 있다. 타문화선교는 중국에서 소중한 사역이다. 그래서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다. 중국교회가 농민공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농민공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몇 년이 지난 후에는 그들에게서 사역자와 선교사가 나올 것이다..
 

성령이 안디옥교회를 향해 강하게 말씀하셔서 바울과 바나바를 보냈던 때처럼. 성령은 가장 좋은 전도자를 보내실 것이다. 가장 뛰어난 교회 지도자는 그들이 선교를 할 수 있는 부담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교회는 기꺼이 선교적 책임을 져야 한다. 그 결과, 중국교회는 선교하는 중국으로, 끊임없이 천만의 선교사가 중국에서 나와야 한다. 그때 중국교회는 세계 어디에서나 한국선교사들과 멋진 동역자가 될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사역은 지역교회를 세우고 부흥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회개의 기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순위에 두고 성령의 역사로 회개하여 우리 몸과 마음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 장 1 절)
 





번역 | 차하경 · 본지 편집장
 

차하경 (2015-12-02)
개인메일로 연락드렸습니다.
김미미 (2015-12-02)
차하경님이 번역을 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중국어 원본이 있는가요?
그것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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