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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  통권 160호  필자 : 왕빈  |  조회 : 5020   프린트   이메일 
[선교나침반]
상황화의 종착역을 보여준 중국 유대인(2)

 


 

카이펑 유대인이 자신들이 믿고 있는 유대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비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유교와의 동화가 점진적으로 이뤄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홍치이년비’는 이스라엘교(유대교)의 기원과 취지, 하늘에 대한 예배와 조상숭배, 카이펑 유대인 커뮤니티의 내력과 발전 역사, 이스라엘교(유대교)와 유교와 대동소이한 내용 등을 기록하고 있다. ‘정덕칠년비’는 유대교의 역사를 다시 한번 서술하고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에 대한 카이펑 유대인의 공헌을 기록하면서도 유가사상과 유대교의 일치성을 강조하고 있어 상당히 동화가 진행된 것을 엿볼 수 있다. 청나라의 ‘강희이년비’는 유대교의 계율을 더 이상 강조하고 있지 않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카이펑 유대인 문화의 쇠락에는 유대인 지식인들이 과거제도를 통해 출세의 길을 걸은 것이 적잖게 영향을 미쳤다. 카이펑 유대인이 언제부터 과거시험을 응시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명나라 때 유대인들이 관료로 진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카이펑 유대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중국화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
 

명나라에서 과거를 통해 진사가 된 유대인이 20여 명이나 됐고 카이펑 현지 주요 비즈니스를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유대인 73개 성씨, 500여 가족, 5000명이 카이펑에서 거주했던 기록이 있을 정도다.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선 유대인들도 어려서부터 공맹(孔孟)사상과 중국 문화, 사서오경 등을 기본적으로 숙지해야 했다.
 

청조에서 카이펑 유대인들은 유가 문화에 완전히 젖어 유대교 본래의 이념과 의식은 매우 희박해졌다. 특히 과거에 응시하면서 중국 전통사상과 유교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고, 봉건제도의 환경과 각 민족의 관리 교류를 통해 유대인 특유의 민족의식이 희박해졌다. 유대인들의 동화는 그들 자녀들의 이름을 짓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문화의 동화는 민족 내 커뮤니티의 동화를 넘어 결혼과 신분의 동화에 이르러 결국 히브리 문자까지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대인들이 카이펑에서 처음 거주할 때는 히브리 이름을 사용했으나 갈수록 중국인 성씨를 사용하게 됐다. 결국 명나라 시절 카이펑 유대인들의 이름은 유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게 농후해 보였다. 가장 전형적인 명말(明末) 청초(清初) 장씨 가족의 6명의 아들은 싼더(三德), 시자오(希召), 시콩(希孔), 시리(希礼), 시멍(希孟), 지우더(九德) 등 공맹과 유가 경전에 영향을 받은 듯한 이름을 가졌다.
 

과거에 급제한 유대인 지식인들은 유대인 간의 결혼제도를 솔선수범해서 깨고 혼인 자체가 사회적 신분과 선비의 상징이 되게 했다. 명조 말에 유대인 장메이(张美)는 6명의 처를 두었는데 그중 4명이 유대인 여성이 아니었다. 명말 청초 카이펑 유대인의 7대 성씨 등기책을 보면 카이펑 유대인은 쑤(苏), 궈(郭), 천(陈), 쉬(徐), 구(顾), 우(吴), 자(贾), 린(林), 니우(牛), 뤼(吕), 후(胡), 저우(周), 쏭(宋), 왕(王), 동(董), 콩(孔), 정(郑), 덩(邓), 쉬(许) 등 40여 개 성씨의 외족부녀를 부인으로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유대인 후예가 갖고 있는 성씨는 스(石), 가오(高), 아이(艾), 리(李), 장(张), 자오(赵), 진(金) 등 7개다. 유대인 유생들이 정부의 관리가 된 뒤 임지를 옮겨 다니면서 고유의 민족 커뮤니티를 벗어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타민족과의 통혼이 이뤄졌다. 정부 관리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통혼은 물론 자녀들까지 이민족과 통혼하는 걸 허용하는 문화가 보편화됐음을 의미하게 됐다. 유대인 커뮤니티 내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드니 유대인 간 결혼은 더욱 어렵게 됐다.
 

결론적으로 유대인 지식인들의 유대교 신앙이 약화되고 행위 또한 자민족 전통에서 벗어나면서 본래의 신앙과 전통은 희박해졌다. 유대인이면 가질 수밖에 없는 메시아 갈망 사상도 사라지게 됐다. 1850년 런던유대인전도회에서(가) 파견한 사람이 카이펑에 왔을 때는 히브리어를 읽을 수 있는 유대인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과 50여 년간 랍비가 없었다는 것을 목격했다고 절망했다. 이는 유대인 고유의 메시아사상도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예수회 신부들이 확인했던 카이펑 유대인의 할례의식도 더 이상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1867년 영국 성공회 주교가 카이펑을 방문했을 때, 유대인들이 그들의 종교를 잃어버리고 중국인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확실한 중국인이 됐다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여기서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중국화 과정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명조 중엽 해금(海禁)정책(해상 교통, 무역, 어업 등에 대한 제한 정책) 실시 이후 중국에서 활동하던 무슬림 학자들은 갈수록 적어졌다. 중국 무슬림 가운데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들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이슬람 교리에 정통한 사람들도 드물었다. 이에 무슬림 지식인 사이에서 스스로 이슬람 교리를 지켜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됐고 민족전통과 종교이데올로기가 모든 운동의 핵심이 됐다. 무슬림들은 2가지 방식을 택했다. 하나는 모스크교육이 종교교육제도의 핵심과 이슬람 인재를 양성하는 기반이 됐다. 모스크교육은 중세 이슬람국가의 모스크교육제도와 중국 전통의 사숙교육제도을 결합하는 형식이었고 훗날 중국 특색의 교육제도의 기초가 됐다. 모스크교육은 무슬림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통로가 됐을 뿐 아니라 일반 무슬림들의 이슬람교 의식을 강화시키는 기초가 됐다. 다른 하나는 이슬람 경전의 활발한 한역(汉译)운동이다. 이는 많은 중국 무슬림들이 경전을 학습하고 이슬람교에 대해 매우 익숙해질 수 있게 했고 유가와의 관계에서도 서로 협조할 수 있게 했다. 무슬림 학자들의 중국어 저작운동은 청나라 말까지 이어져 300여 년간 다져진 유학의 정수를 받아들이는 한편 민족문화를 계승하도록 해 중국 문화로의 동화를 막는 순기능 역할을 감당했다.
 

무슬림들의 이 같은 활동과는 달리 카이펑 유대인들은 일종의 고립된 상태에서 지냈다. 16세기 전에는 페르시아의 유대인 공동체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나 점차적으로 외부와의 교류가 줄어들었다. 특히 중국 사회에서 폐쇄정책이 기승을 부리면서 카이펑 유대인 커뮤니티는 다른 나라에서 거주하는 유대인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렸다. 1605년 마테오 리치는 카이펑 유대인 아이톈을 만난 뒤 카이펑으로 사람을 급파해 카이펑 회당 책임자에게 편지를 보냈고 편지를 받은 책임자는 리치에게 회당의 관리를 맡길 수 있다고 회신했다. 회당 책임자가 리치에게 이같이 제안한 이유는 카이펑 유대인 커뮤니티 내에서는 회당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후에 3명의 카이펑 유대인이 베이징으로 와서 리치를 만났을 때 회당 책임자가 죽은 뒤 카이펑 유대인들 가운데 히브리어를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1723년 8월 18일 아노이니 고빌(Anoine Gaubil)은 “나는 직접 그들(카이펑 유대인)이 히브리어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서구의 사부(师父, 스승)를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히브리어 어법과 성경을 모른다고 인정했다. 더욱이 미쉬나는 물론 성경의 역사도 몰랐다”고 밝혔다. 카이펑에서 유대인 회당이 건립돼있을 때 마침 유학의 대가인 주희(朱熹)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터라 카이펑에서도 유학이 강세를 보였다. 카이펑 유대인들은 유학이 자신의 전통문화와 교육을 대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점차적으로 유대인의 정체성이 무너지면서 중국으로의 동화를 피할 수 없게 됐다. 1850년 유대인의 후예가 이 같은 편지를 썼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들은 향을 피우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의 종교가 다시 흥왕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빈약한 상황이 우리의 기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카이펑 유대인은 외부역량을 통해 신앙을 회복하고 커뮤니티를 복원하고 싶었지만 이미 때를 놓쳤다.
 

카이펑 유대인 동화 정도를 10여년 전 사망한 자오핑위(找平宇) 이야기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오는 하사받은 성씨이다(자오핑위는 죽기 전까지 자오라는 성을 갖게 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명나라 특무로 공을 세워 얻은 것이었다). 자오의 유대인 조상은 청나라 관리로 일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훗날 가세가 기울어졌다. 이 때문인지 그의 할아버지는 미장이로 일했다. 자오핑위는 운 좋게 공부를 한 뒤 중국공산당의 통치 아래 세무국에서 근무했다. 그의 어머니는 한족이었다. 유대교 종교의식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가 유대인 후예라는 걸 알 수 있는 것은 돼지고기를 안 먹고 가끔 발효되지 않은 빵(무교병)을 먹는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우파(右派)로 몰려 고깔모자를 쓰는 등 갖은 수모를 겪어야 했다. 부인과 함께 허난성 신정(新正)으로 쫓겨 가서 5명의 자녀와 함께 지냈다. 그리고 유대인 후예라는 걸 인정해서는 안 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20년 만에 복권된 뒤 세무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죽기 전에 과거 카이펑에 있었던 유대회당 모형을 제작하겠다는 꿈을 안고 살았다고 그의 부인인 추이수핑(崔淑萍)이 회고했다. 둘째 딸 자오쉐팅(赵雪婷)은 자신의 성이 황제가 하사했다는 걸 아버지로부터 들어 알 뿐 유대교 신앙과 유대인 습관 등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결국 유대인 후예라는 걸 인식할 뿐 완전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카이펑 유대인 후예는 ‘도경골목’에서 주로 살았는데 1958년 이후 우루무치(乌鲁木齐), 란저우(兰州), 시안(西安), 청두(成都),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선전(深圳) 등지로 이주하기 시작돼 현재는 자오 성씨 일가만이 고향인 카이펑을 지키고 있다. 1980년대 허난성 인민병원과 카이펑시 위생방역센터에서 유대인의 DNA를 분석한 결과 카이펑 유대인 후예와 이라크 유대인과 아랍유대인이 비슷한 인자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한 사료에 따르면 카이펑 유대인은 명말 예수회 신부가 카이펑을 방문하기 전에는 ‘유대’라는 단어를 모르고 ‘이사락업(一赐乐业, 발음이 ‘이츠러예’로 이스라엘을 음역한 것)’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했다. 아울러 유대인의 주요 절기인 ‘성전설(수전절, 광명절)’도 몰라 지키지 않고 있었다. 성전설은 B.C 2세기 시리아왕에 의해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되찾아 성전을 청소하고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해 8일간 이어지는 절기다. 신약성경에는 단 1차례, 요한복음 10장 22절(“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에 나온다. 봉헌절 또는 하누카(Hanukkah), 등화의 절기(빛의 절기, the Feast of Lights)라고도 불린다.
 

카이펑 유대인들은 현지 문화에 서서히 동화되면서 마침내 민족문화까지 상실한 채 중국인으로 살아가게 됐다. 카이펑에서 유대인 후예가 아직 살아가고 있지만 완전히 민족종교를 회복하기에는 시간이 상당이 걸리거나 특별한 외부적인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 이름 ‘모세’를 갖고 있는 장싱왕(张兴旺)의 카이펑 집에는 성경과 일곱촛대, 다윗의 육각별, 역대 재중 이스라엘 대사와 함께 찍은 사진 등 유대인의 후예임을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그의 아들은 영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했지만 학교에서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유대인의 후예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유대인이 엄청난 핍박 속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전통을 이어갈 뿐 아니라 결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했던 것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매우 상이한 결과가 드러났다. “유대인답지 않다”는 말이 중국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다.



왕빈 | 중국전문가

 

박상웅 (2015-12-02)
중국 유대인 소식 넘~ 반갑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더 많은 관심과 기도가 있기를 원합니다
중국 유대인 알리야를 기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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