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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  통권 159호  필자 : 김주한  |  조회 : 4068   프린트   이메일 
[쉬어 가는 페이지]
무위지치(无为之治) - 노자, 자연의 도를 따르는 사회


 

 

“노자철학의 핵심은 자연이다. 자연은 ‘나는 나로서 있다.’는 말이다. 풀은 풀로서 있고 나무는 나무로서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자연이다. 그리고 그 자연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란 ‘다르게 있는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동일성과 보편성을 부정하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동일성과 보편성은 인간의 사념 속에 있는 것이요, 사실로서 실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실재는 ‘지금 바로 여기’, 사념 밖에 사실로서만 현존하고 있다. 이 현존실재가 노자철학의 실질적 기반이 된다. 이것이 이른바 도다.”  _송항룡
 

하늘에 떠있는 무지개는 모두 몇 가지 색깔일까요. 간단히 일곱 가지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보다 편리하게 말하고 생각하기 위한 방법일 뿐 실재는 아닙니다. 무지개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자연과 사물들은 언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다채로운 빛깔과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지식은 판단과 분별에서 나오지만 그것은 우리의 주관과 문화적 관습이 투영된 ‘가치관’일 때가 많습니다. 무엇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에 다가서게 되면 우리는 변화무쌍한 현실 그대로를 보기보다는 흔들리지 않는 주관과 신념을 강조하게 됩니다. 결국 무지개는 일곱 가지라고 해야 정답이 되는 사회가 지식수준이 높은 사회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잘 보고 있는 사회는 아닐 것입니다.
 

노자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인간 사회의 갈등이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의 잣대로 친소(亲疏), 이해(利害), 귀천(贵贱)을 구분하며 더 높은 이익을 향해 나아가지만 1등만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다양성은 존중받지 못합니다. 노자는 경쟁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내버려두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위(无为)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조화의 근거를 자연에서 발견합니다. 자연은 어떤 가치를 향해 경쟁하지 않고 스스로 균형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의 도(道)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방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투구만을 일삼는 천하무도(天下无道)의 상황에서 노자는 이러한 도의 무위를 본받는 정치가 행해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무위란 단지 개인의 수양적인 차원에서 욕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라는 의미를 넘어 이 사회의 투쟁과 갈등을 해소할 정치적 담론으로 확장됩니다. 이러한 정치가를 노자는 성인(圣人)이라고 말합니다. 성인은 도를 체현한 존재로서 먼저 그 자신이 사리사욕의 분별과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더 큰 조화를 그리며 정치를 행합니다. 이것은 국익을 논하는 일개 왕의 시각이 아닌 천하를 논하는 성인의 시각이라는 점에서 보다 거대화 된 통치자의 처세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무위자연(无为自然)은 형이상학적 실재에서 무위지치(无为之治)라는 정치적 현실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노자는 유가사상과는 달리 윤리성’을 중시하기보다 ‘공능성(功能性)’을 중시한다는 점입니다. 자연은 어떤 윤리적 목적을 위해 달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스스로 존재합니다. 생명이 살아 숨 쉰다는 것 자체에 자연은 의미가 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 각자의 목소리로 서있다는 것 자체에는 윤리적 가치가 없습니다. 윤리라는 말은 그렇게 쉬운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과 악을 가늠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무엇이 절대적인 선인지,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절대적인 선을 따라 살고 있는지는 무거운 질문입니다. 윤리마저 정치적 도구가 되거나 종교적 수단이 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가치의 투영을 통해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차별 없는 자연과 같이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으로 바라보고 돌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지만 그 무위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은 오히려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넘치는 부분을 덜어내면서 무한히 역동합니다. 단지 그것이 눈으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위지치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욱 능동적으로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것이 작위적인 모습의 통제나 강제가 아닌 다양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으로 드러나 자연이 스스로 자생하듯 사회가 스스로 자정(自定)하도록 하는 사회적 구조를 만드는 것 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모두가 획일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 자신으로서 서있고 그러한 건강한 개인들이 건강한 사회를 일구어 간다는 것입니다. 있는 사람, 높은 사람만 존중받는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차별 없이 자신의 개성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꿈꿔봅니다. 그것이 또한 노자가 생각했던 이상 사회의 모습입니다.
 

도상무위이무불위(道常无为而无不为), 도는 항상 무위하지만 되지 않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도는 만물을 낳고 기르며 이 세상에 충만하게 작용합니다. 욕심을 내지도 않고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습니다.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공을 이루어도 그 자리에 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도는 생명을 보존하지만 자랑함이 없고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도는 멈춰있지 않고 신명나게 흘러갑니다.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리고 이내 낙엽이 떨어지고 앙상해지지만 또 다시 싹을 틔워냅니다. 그런 사계절의 모습 속에서 역동적인 도의 자취를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과 사회도 이러한 자연처럼 아름답게 피고 소박하게 지는 모습이면 참 좋겠습니다. 고이고 썩어질 욕심보다 나누고 퍼져갈 사랑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이러한 노자의 무위자연과 무위지치의 내용들을 어떻게 적용해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날마다 기독교적인 ‘가치관’과 세상적인 ‘가치관’의 충돌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비슷한 유형의 가치관들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가치관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노자와 같이 무위와 인위로 쉽게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욕심을 따라 사는 인생은 언제나 인위적입니다.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에 언제나 나와 남에 대한 구분과 차별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교만과 기만, 태만의 악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관점을 벗어나 하나님의 관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나의 능력과 노력을 넘어서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하나님의 숨결과 손길을 경험하며 오늘도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지탱해 가시는 하나님의 무위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자연과 사람은 생명 그 자체이지만 하나님은 그 자연과 사람에 목적과 방향을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친히 다스리십니다. 때문에 자연의 무위보다 하나님의 무위는 더욱 큰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무지개의 색깔을 이미 규정해 놓은 사람은 자신의 관념에 갇힐 뿐 무한한 아름다움을 경험 할 수 없습니다. 무위를 추구하는 이유는 정말로 사람과 세상과 하나님이 무한한 깊이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노자의 무위는 또한 탈윤리적인 공능성을 말하지만 하나님과 사람과 세계를 잇는 관계성은 더욱 깊은 윤리적 의미, 곧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오래참고’로 시작되는 고린도전서의 사랑장(13장)에서 이러한 사랑의 무위성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위는 결국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가 된다는 의미에서 무한한 사랑에 관한 풍부한 상징이 됩니다. ▩



♣ 김주한 | 길가에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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