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펑 유대인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고대 중국의 유대인을 연구한 학자들은 카이펑 유대인들이 경전을 전심전력을 다해 읽고 도를 닦으며 율례와 계율, 종교의식을 계속 유지하려고 애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유대 고유의 절기 문화조차 지키지 못한 채 이민족과 결혼을 하고 중국 사회에서 입신양명의 길을 걷기 위해 ‘사서오경’ 등을 익히면서 유교화의 길을 간 게 문제라는 것이다.
이 같은 분석을 크게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통혼(通婚)설’ ‘격리설’ ‘과거제도설’ ‘관용설’ ‘반유대주의’ ‘중국과 유대문화의 유사설’.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학과 통혼, 과거제도가 유대인의 독특성을 와해시키고 중국에 동화되게 했다고 본다. 특히 유가사상을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고 현지화하려고 한 게 카이펑 유대인의 전통을 붕괴시켰다고 한다. 중국 문화에 착근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의 태도를 비교한다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비슷한 역사단계를 거치면서 유가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중국 내 광범위하게 교리와 문화가 전파된 것에 비하면 유대교는 지역 사회와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슬람교는 자신의 종교적 입장에서 유가사상을 해석하는 데 비해 유대교는 유가사상을 통해 유대교를 재해석하려고 했다. 그 결과 유대인의 주체의식이 희박해지면서 유대교의 쇠락을 가져오게 됐다. 중국 문헌을 보면 명나라 이전만 해도 유대인이나 무슬림이나 비슷한 경로를 거치면서도 자신들의 종교적 입장이 무시되지 않았건만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됐다.
예를 들어 1512년 명나라의 ‘정덕칠년비(正德七年碑)’를 보면 유대교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카이펑 유대인이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헌한 것이 서술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유대교의 ‘정수귀결(精髓归结)’을 유가의 ‘삼강오상(三纲五常)’과 연관시켜 유가사상을 찬양하면서 유가의 윤리사상과 유대교의 일치성을 매우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이펑 유대인은 유가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유대교의 정신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청조 강희(康熙)황제 시절 상황이 크게 변했음을 알 수 있다. 1663년 청나라의 ‘강희이년비(康熙二年碑)’에서는 유대교의 교의, 규범준수를 강조하고 있지 않고 역사의 기억만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맞춰져 있다.
‘정덕칠년비’에서는 기록자로 ‘유대유생(犹太儒生)’인 진사(进士)출신 줘탕(左唐)으로 돼 있지만 ‘강희이년비’에서는 기록자로 ‘전 형부(刑部) 상서(尚书) 현 공부(工部) 상서’ 류창(刘昌)으로 돼 있다. 유대인이라는 종교적 의식이 매우 희박해진 것을 보여준다. 명나라와 달리 청나라에 이르러 카이펑 유대인의 유가사상에 대한 흡입력이 매우 높았을 뿐 아니라 가치관에 있어서도 유교화됐다는 의미다. 카이펑 유대인은 무슬림과 달리 중국 문화에 대해 적응력을 높여가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본래의 민족문화를 계승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마테오 리치를 통해 존재 사실이 전해진 카이펑 유대인들은 처음엔 철저하게 유대교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천창치(陈长琦), 웨이첸즈(魏千志) 등 두 중국학자는 카이펑에서 유대인이 거주하게 된 시기를 A.D. 998년으로 잡고 있다. 이들은 이후 165년간 유대교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유대회당을 정식으로 세우고 종교활동을 규격화시켰다고 추정했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카이펑 유대인들은 비석을 세워 유대교 전통 의식을 새겨놓았다. 1489년 명나라의 ‘홍치이년비(弘治二年碑)’와 ‘정덕칠년비’ 등에는 이스라엘 선조와 관련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담의 19대 손이다” “토라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귀신을 경배하지 않으며 하나님만을 섬긴다” 등등.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 언급돼있는 노아, 이삭, 야곱, 아론 등의 이름도 찾아볼 수 있다.
원래 카이펑 유대인은 자신들만의 예배 의식을 고수해왔다. ‘홍치이년비’와 ‘강희이년비’에도 예배의식이 비교적 소상히 언급돼있는데 유대인들은 매일 인시(寅时), 오시(午时), 술시(戌时) 등에 3차례 예배를 드리고 예배 전 반드시 목욕재계를 하고 모든 욕구를 억제하며 의관을 바르게 한 뒤 신발을 벗고 남색 모자를 덮어썼다.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절한다-바로 선다-침묵으로 찬양한다-우는 듯 찬미한다-뒤로 3보 이동한다-앞으로 5보 이동한다-왼쪽을 향한다-오른쪽을 향한다-조심스럽게 머리를 쳐든다-머리를 조아린다-다시 절한다.” 경외와 겸비를 드러내는 게 그 목적이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다. 초창기 카이펑 유대인은 안식일을 도(道)에 입문하는 길, 선에 이르는 기초라고 여겼다. 안식일에는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어 먹지도 않았다. 1613년부터 1770년 약 150년간 허난(河南)성을 방문한 30여 명의 예수회 신부들은 카이펑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분별해 지키는 모습을 목격했다. 폴 고자니 신부는 1772년 8월 25일에 쓴 편지에서 카이펑 유대인이 안식일을 매우 정성스럽게 지키고 있다면서 불을 피워 밥을 짓지 않고 안식일 전날 모든 음식을 미리 만들어서 먹는다고 적었다. 1810년 개신교의 첫 중국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도 카이펑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매우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카이펑 유대인들은 할례도 거행해 왔다. 1851년 ‘런던유대인전도회'는 카이펑 유대인 자오진청(赵金诚)과 자오원쿠이(赵文魁)를 상하이로 데려와 히브리어를 배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들에 대한 소식은 당시 상하이에서 발행하던 ‘북화첩보(北华捷报)’에 언급돼 있다. "상하이로 온 2명의 카이펑 유대인 모두가 할례를 받았다. 할례는 모든 남자아이에게 시행됐고 시술은 태어난 지 1개월 내에 한다.”
카이펑 유대인들의 식습관도 독특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소와 양을 죽일 때 힘줄을 골라내 먹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카이펑 유대교는 ‘도근교(挑筋教, 힘줄을 골라내는 종교)’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이는 당시 카이펑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도근골목’(挑筋胡同, 국민당 정부 시절 교경골목, 教经胡同)이라는 별칭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중요한 유대교 절기를 지켰다. 이들은 종교절기일을 ‘계(戒)’라고 하며 1년에 유월절, 초막절, 부림절 등 7번 절기일을 지켰다. ‘강희이년비’에는 특히 속죄절이 기술돼 있다. 속죄절은 유대교의 연례 금식일로 지난날 사욕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지켜진 절기다. 속죄절은 ‘안식일 중 안식일’, ‘큰 안식일’(레위기 16장 23절, 31-32절)로 표현되며 상거래, 여행, 농사 등 어떠한 노동도 허용되지 않았다. 진 도멘게 신부가 1722년 카이펑을 방문했을 때 초막절을 지키는 유대인을 목격했다. 그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토라를 어깨에 짊어지고 오른쪽 어깨에는 빨간 끈이 둘러져 있었다. 카이펑 유대인은 자선을 선택사항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로 여겼고 일종의 성스러운 일로 간주했다. ‘정덕칠년비’에는 ‘과부와 고아, 병든 자 등을 도와야 한다’는 유대인의 전통이 기록돼 있었다.
카이펑 유대인들은 토라를 ‘대경(大经)’, ‘도경(道经)’, ‘정경(正经)’이라고 부르면서 소중하게 간수했다. 하지만 황허(黄河)가 범람하면서 카이펑의 유대회당 내부에 있던 토라가 유실되기도 했다. 유대인 가오쉔(高选) 등이 위험을 무릅쓰고 회당에 들어가서 ‘도경’ 10권을 무사히 건져내기도 했다. 명말청초(明末清初) 예수회 신부들이 카이펑을 방문했을 때 카이펑 유대인 사이에서 경전을 파는 사람은 하나님을 파는 것과 같다는 관념이 두루 퍼져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867년 3월 사무엘 아이작 조세프 쉐레세위스키(Samuel Isaac Joseph Schereschewsky, 1831-1906)가 베이징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을 때 카이펑에서 온 유대인 3명이 베이징을 방문, 교회의 큰 관심을 받자 쉐레세위스키는 카이펑으로 조사를 떠났다. 그는 카이펑에서 유대인이 300호 정도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더 이상 믿지 않고 있었으며 현지 주민들과 통혼하고 있었다. 그가 25일간 있을 때 소요가 발생해 더 이상 체류할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1864년 영국 런던에서 카이펑 유대인 전도회가 세워졌는데 이 단체는 데이비드 사순(David Sassoon)가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카이펑 유대인은 중국 내 주요 이슬람세력인 회족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장구한 문화, 특히 유교에 직면해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고 부단히 자신의 정체성을 조정하는 반면 자신만의 전통과 종교성을 잃어 결국 빈껍데기만 남게 됐다.
카이펑의 유대회당 건축양식은 유학의 영향이 농후했음을 보여준다. 기록에 의하면 카이펑 유대회당의 규모는 컸고 금빛 휘황찬란했다고 한다. 1772년 카이펑 유대회당을 직접 방문했던 프랑스 신부 도멘게가 남긴 도면을 보면 어림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 강희황제 시절의 평면도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카이펑의 유대회당은 서방에 있는 유대회당과는 달랐다. 정원, 정자, 전당, 문정 등으로 이뤄지는 전형적인 중국의 사당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직사각형 전체 건축물이 정원을 향하고 있었다. 중간 사당은 남북을 향하고 있었다. 동서길이는 107 m, 남북넓이는 76.6m, 면적인 약 8196m²였다. 원문(院门)은 동쪽(东)을 향해 있고 정문을 거쳐 두 번째 문을 지나면 첫 번째 내실이 보이고 대문 좌우에 화장(花墙), 즉 중국 전통건축물의 윗부분에 무늬 모양의 구멍을 내어 쌓은 담이 쳐 있고 영접 대문(迎门)에는 아치가 있고 남북으로 사랑채가 있었다. 두 번째 문 서쪽은 제2의 내실이고 영접 대전(大殿)은 전전(前殿)이 되고 원 중앙에는 패방(牌坊, 위에 망대가 있고 문짝이 없는 중국 특유의 건축물)이 있고 남북으로 두 개의 비각에 세워져 있고 정자에 명(明) 청(清)의 3개비가 세워져 있다. 전전 옆에는 독경당(토라를 낭송하는 곳), 아브라함전, 모세전이 있고 복도를 따라 가면 넓은 후전(后殿, 后庭)이 나온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카이펑 유대회당의 설치 방식에도 도교와 불교 등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점이다. 도, 천진, 유현, 지묘 등 도교의 용어가 보이고 무상, 정법, 고사 등 전형적인 불교용어도 눈에 띄었다.
카이펑 유대인들은 북송 황조의 도움으로 1163년 첫 번째 유대회당을 세운 이래 수차례 보수하고 새롭게 건축했다. 1605년 아이톈이 마테오 리치를 만났을 때에 고향에 유대회당이 있고 최근 1만여 금자(金子)를 들여 완전히 새롭게 수리했다고 소개하면서 회당 안에 500-600년 전부터 내려오는 모세의 토라를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카이펑 유대인이 남긴 비문의 기록을 보면 1163년부터 1688년까지 카이펑 유대인들은 12차례 회당을 수리하고 중건했다. 특히 1653년부터 1688년까지 35년간 4차례나 회당을 중건했다. 그러나 1688년, 강희 황제 치세 27년 이후 회당을 수리할 능력이 없어 손을 댈 수 없었다. 그 결과 가경(嘉庆)과 도광(道光)황제 치세기간(1796~1851)엔 유대회당의 벽까지 심각하게 훼손됐지만 보수가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1854년 함풍(咸丰)황제 4년, 회당은 훼파되고 카이펑 유대인들은 마침내 정신적 지주를 잃어버리게 되고 말았다. 일부는 심지어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송나라 때 전 세계 최초의 지폐인 ‘교자(交子)’를 만드는데 유대인들이 공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자는 ‘관자(关子)’라고도 불렸는데 쓰촨(四川) 지방에서 발행된 어음에서 발달한 지폐다. 1161년 금나라 황제는 카이펑에 중국 최초의 유대회당을 세우게 했을 뿐 아니라 ‘일사락업교(一赐乐业教, 이스라엘교)’라는 이름까지 하사했다. 금나라를 멸망시킨 원나라의 초기 관방 문건을 보면 금나라에서 세수, 금융, 무역 등 주요 업무의 책임자가 유대인인 것을 알 수 있다. 중국학자들은 “그들은 불가능이 없다. 유대인은 금나라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했을 뿐 아니라 상당한 명예도 획득했다”고 평가했다. 원나라 시절 유대인은 색목인(色目人, 원나라 통치자들이 서역(西域) 각 민족과 서하(西夏) 사람들을 일컫던 명칭)으로서 통치계급에 속했다.
그러나 한족이 중원을 다시 장악하면서 엄격한 법률 잣대로 유대인의 행동을 제한했다. ‘대명률(大明律) 몽고 색목인 혼인조례’에 따르면 몽고인과 유대인은 서로 혼인을 수 없었고 유대인은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반드시 익혀야 했다. 이때 한족 자녀와의 결혼이 급증하게 됐다. 또 유대인의 성이 한족 성으로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례웨이(列维)’는 ‘리(李)’, ‘스바(示巴)’는 '스(石)‘, 야당(亚当)’은 ‘아이(艾)’로 바꿨다. 그중 ‘옌싼(俺三)’이라고 불린 금의위(锦衣卫) 소속 유대인이 있었는데 그는 모반을 막은 공을 인정받아 카이펑을 수도로 삼은 송 황조의 성씨인 ‘자오(赵)’를 받게 됐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새로운 민족정책을 제정할 때 특별히 카이펑 유대인들에게 ‘조상의 습관을 좇아 볜량(汴梁, 현재 开封)에서 머물라’는 성지(圣旨)를 내렸다. 이 같은 평등과 관용정책이 오히려 민족성과 커뮤니티의 응집력을 약화시켰다. 명나라가 쇄국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서북 변경과 해로가 막혀 명나라 백성들과 타민족과의 관계 또한 멀어지게 됐다. 아울러 혈통의식이 점차 둔화되면서 카이펑 유대인은 한족과 별 구별이 되지 않았다. 히브리어는 물론 페르시아어를 완전히 잊어버리게 됐다. ▩
다음 호에 계속 됩니다.
♣ 왕빈 | 중국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