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고든콘웰신학교 국제신앙연구소(Center for the Study of Global Christianity)의 2013년 6월 발표 자료에 따르면, 중국은 네팔에 이어 기독교가 가장 빨리 성장하는 국가에 등극했습니다. 네팔의 성장률이 10.93%인데 비해 중국의 성장률은 10.86%로 근소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중국에서 기독교 인구증가율은 총인구 증가율의 약 10배에 달한다는 놀라운 수치로 드러났습니다. 기독교 인구만 고려하면 미국 브라질에 이어 중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가장 많은 기독교인이 있는 나라입니다.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될 경우 2030년에는 중국은 기독교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가 될 것입니다. 중국교회가 이처럼 세계로부터 주목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데는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준비해놓은 그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셨고 그 결과 오늘이 있게 됐습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요즘 부쩍 중국교회의 원로들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이 납니다. 특히 2010년 이후 여름에 그 원로들이 주님의 품에 안겼기 때문에 더 느끼는 것 같습니다. 2011년 6월 30일 셰모산(谢模善), 같은 해 7월 23일 양신페이(杨心斐), 2013년 8월 3일 린센가오(林献羔).
“전 세계가 중국교회의 성장에 놀라고 있다고 들었어요. 가정교회가 고난과 핍박 속에 세워졌다고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중국 내 사역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분의 재림을 함께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가정교회의 원로지도자 리톈언(李天恩) 목사(88)의 말입니다. 리무성(李慕圣)으로도 불리는 그는 1975년 사형선고를 받은 뒤 세 번이나 형 집행정지를 받았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앞장선 한 공산당 서기는 훗날 정치적 이유로 15년 형을 선고 받고 그에게 유명한 일화를 남겼죠. “나는 당신을 세 번이나 죽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당신이 믿는 예수님이 당신을 지켜주었소. 그러나 마르크스는 나를 지켜주지 못했소. 나도 당신이 믿는 복음이 참이라고 믿습니다.”
필자는 2009년 그와의 만남을 통해 수많은 고초 가운데서 복음을 놓치지 않고 해맑은 웃음을 이어갈 수 있는 불멸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60년에는 10년 형을 선고받고 갖은 고초를 겪었죠. 당시 철광석을 캐며 안후이(安徽)성 노동개조소에서 지내면서 한겨울 웃통을 벗고 팔다리를 벌린 채 6시간씩 벽을 쳐다보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한번은 10여 미터 아래로 떨어져 사선을 넘나들기도 했죠.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는 가족들과 일 년에 한번, 그것도 30분 이내로 만날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환경도 그의 복음 전파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만기 출소한 뒤 자신의 고향인 허난(河南)성 곳곳을 순회 전도하고 양육을 해나갔습니다. 그 결과 중국에서 가장 복음의 확산 속도가 빨랐던 허난성의 팡청단체(方城团契)가 탄생했습니다. 장롱량(张荣亮•65) 등 허난성 출신 가정교회 지도자 모두가 그에게 신앙훈련을 받았죠 그는 노구를 이끌고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 35개 민족의 거주지를 일일이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죠. 그중에는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면서 ‘십자가 신’을 섬기던 후베이(湖北)성 선농자(神农架)자연보호지역에서 거주하던 만주족 후예도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교회의 미래에 대해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성장 동력이었던 농촌 가정교회 안에서 젊은이들을 찾아보기 점점 어려워지고, 이들의 헌신도 또한 예전만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죠.
“도시로 떠난 젊은 기독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보다는 세상의 유혹에 빠져 주님을 멀리 하는 것 같아요. 정부의 간섭이 줄어드는 대신 십자가의 신앙이 희석되고 있어요. 앞으로 중국교회는 세속화의 물결과 일전을 벌여야 합니다. 중국 최고 지도부는 가정교회 성도가 이미 70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울러 핍박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교회가 성장한다는 법칙도 깨달았죠. 때문에 과거보다 가정교회 상황이 좋아졌습니다. 문제는 이럴 때일수록 교회가 더 잘해야 한다는 겁니다.”
가정교회가 부흥했다고 해도 중국 인구 14억 명 가운데 아직도 비신자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이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교회 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원로들이 있습니다. 이미 고인들이 됐지만요. 첫 번째 인물은 셰모산 목사님입니다. 자신의 고향인 장쑤(江苏)성 양저우(扬州)에서 93세의 나이로 소천했습니다. 베이징 서우왕(守望)교회 진톈밍(金天明)의 목사안수를 직접 인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11년 5월 우방궈(吴邦国)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에게 종교자유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보낸 데도 앞장섰습니다. 그는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초대주석인 우야오쫑(吴耀宗) 목사의 절친이기도 했습니다. 1918년에 태어난 그는 14세 때 하나님을 믿은 뒤 평생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했죠. 1940년대 화북신학원을 졸업한 뒤 ‘전도회간(布道会刊)’ 편집장을 지내다가 55년 ‘성가오(圣膏•성스러운 기름)’ 잡지 편집을 맡았습니다. 이 잡지는 훗날 중국삼자회의 공식기관지인 ‘톈펑(天风)’이 됐죠. 우 목사로부터 삼자회에 동참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죠. 거부하면 체포될 걸 알면서도요. 1956년 5월 28일 밤 공안들에게 끌려간 뒤 삼자회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생활과 강제노동을 하다가 23년 만에 풀려났습니다.
그가 취조 당하던 중 복음을 전한 이야기는 유명하죠.
“마오쩌동(毛泽东) 주석이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난감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천국문은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들어가기 원하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 지금은 은혜의 문이 열린 시대요, 구원받을 때라 모두 회개하고, (…)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이에 취조하던 요원이 그를 내동댕이쳤습니다.
“네가 이 기회에 전도하느냐”며 윽박질렀죠. 그는 침착하게 “내가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당신들이 말하라고 시킨 것 아닙니까. 그럼 내가 대답 안 해도 좋습니까”라고 맞받아쳤습니다. “내 몸은 이미 주께 바쳤으며 내 생명은 주의 제단에 올려져 산 제물이 되었기에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손목엔 쇠갈고리가 꽂혔습니다.
그는 133일간 손목에 수갑을 찼습니다. 수갑이 너무 꽉 조여져 살갗을 뚫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고문과 고통 속에서 자살까지 생각했던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린도후서 12:9)라는 음성이 들려왔죠. 이 음성은 세 번이나 이어졌습니다. 셰 목사는 다른 죄수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형기가 2년 연장됐습니다. 그 기간 노동개조로 악명 높은 칭하이(青海)성 감옥에서 지냈죠. 1978년 형기가 공식 만료됐음에 불구하고 여전히 감옥에 있었습니다. 20년 이상 형기를 채운 60세 이상은 출소할 수 있다는 당시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邓小平)의 명령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상하이에 있던 가족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출옥 후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1980년대와 1990년대 두 차례 체포돼 각각 3개월 구치소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외국 선교단체는 수차례 그에게 중국을 떠날 것을 종용했죠. 그때마다 “누가 중국에서 이 일(복음 전도)을 계속할 것인가”라고 답하곤 했습니다. 끝내 그의 아내는 미국으로 떠났고. 결국 셰 목사는 이혼을 해야만 했습니다.
린센가오 목사님은 사무엘 램(Samuel Lamb)으로 외국에 널리 알려져 있었죠, 소천하기 전 그의 모습을 볼까요.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린 목사는 그의 사무실에 외국인 손님들을 초청해 자신의 삶에 대해 들려주면서 더 핍박을 받을수록 더욱 성장한 거룩한 훈련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목회철학은 중국 당국과 중국 내 믿는 자들을 비롯한 교회 참석자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정부가 법제를 강화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다면 정부를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인간의 법보다 우선입니다.” 그의 주된 설교주제는 기독교인들이 겪는 고통이었죠. 그는 이렇게 종종 간증했습니다. “나는 욥의 승리와 욥의 실패를 이해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불평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아내를 잃은 나는 아내의 장례식조차 갈 수 없었죠. 하나님께서 고통, 상실, 고문 등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때까지, 이것은 화살과 같이 나를 찔렀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들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마카오가 내려다보이는 산악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침례교회 목사였던 아버지에 의해 신앙인으로 자라났습니다. 교회 박해가 대대적으로 시작되면서 1955년부터 2년 간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중국 당국은 1958년 그에게 두 번째 형을 집행했습니다. 그는 노동수용소에서 20년을 보냈습니다. 가혹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는 것을 쉬지 않았죠. 그가 이끈 가정교회는 삼자회 가입을 거부했습니다. 정부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18세 이하의 청소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가르칠 수 없게 했죠. 1979년 린 목사는 광저우(广州) 다마잔(大馬站)에서 가정교회를 다시 시작했죠. 참석자들이 빠르게 늘어 더 큰 건물로 옮겨갔습니다. 교회는 당국에 등록돼 있지 않지만 당국은 이를 지켜보고 있는 상태였죠. 매주 4번 드리는 예배에 참석자는 약 4000명에 달했습니다. 린 목사는 오픈도어선교회와 함께 사역하면서 기독교서적 20만권을 중국 크리스천들에게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전도자이자 음악가였던 양신페이(杨心斐)는 언리(恩立)라고 불리기도 했죠. 1928년 10월 24일 푸젠(福建)성 샤먼(厦门)의 4대째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양신페이는 푸저우(福州)음악전문학교를 거쳐 1953년 상하이음악학원을 졸업한 뒤 항저우(杭州)시문화국에서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정된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죠. 1958년 7월 27일 삼자회에 가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돼 16년간 감옥 생활과 강제노동을 해야 했죠. 마오쩌동의 초상화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을 강요받았지만 완강하게 거절해 머리카락을 모두 잘리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1974년 1월 샤먼으로 돌아온 뒤 수많은 차세대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양육했습니다. 매년 160명이 그를 통해 세례를 받았죠. 2003년 ‘밤의 노래(夜间的歌)’라는 제목의 간증집을 출간했죠.
그녀는 삼자회에 가입하지 않은 것을 당연시했습니다. “이교도의 바람이 이미 교회 안으로 잠식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나의 위치와 신앙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 결코 삼자회에 가입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나의 조국을 매우 사랑하며 국가 법률을 위반한 적도 없어요. 그러나 그들은 나를 비판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과 삼자회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샤먼에서 전통 가정교회와 도시교회 간 리더십 계승과 협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원활했던 이유 중 하나가 양신페이라는 여걸이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죠. 양신페이는 40여 개의 가정교회를 세웠고 그녀가 인도하는 성경공부 모임에는 1000명이 넘는 크리스천들이 몰려들었습니다.
200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전 세계 화인 ‘중국복음대회’에서 중국 대륙을 위해 대표기도를 인도한 게 외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이었습니다. 이때의 기도문입니다. “주님, 중국 대륙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있어 구원을 받지 못했나이다. 아직 하나님의 기도소리를 듣지 못했나이다. 우리의 국가가, 우리의 땅, 우리의 잃어버린 영혼들이 어떤 희망도 없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나이다. 주여, 당신의 사람들을 선발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소서. 주여, 그들이 복음을 듣고 당신의 면전에서 회개하게 하소서.”
2005년 향년 91세로 하나님의 품에 안긴 위안상천(袁相忱) 목사님도 빼놓을 수 없죠. 그는 워치만니(니퉈성•倪柝声), 왕밍다오(王明道), 린센가오 목사 등과 함께 중국기독교를 대표했었습니다.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뒤 삼자회에 참여할 것을 거부해 1958년 4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반혁명’이라는 죄명으로 수감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1933년 왕밍다오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베이징성서학원에 진학, 목회자의 길을 걸으면서 한 번도 불의에 굴복한 적이 없었죠. 수감생활 중 그와 동료 수감자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감옥을 직접 지으라는 황당한 명령을 받기도 했습니다. 석방된 뒤에도 10년간 공민증도 없이 보호관찰대상자로 있었습니다. 그는 1980년부터 ‘바이타스교회’를 인도, 수많은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1994년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이 교회에서 말씀을 전했죠. 위안 목사는 1995년 미국 백악관의 초청을 받았지만 기도를 한 뒤 거절했을 정도로 일생을 기도로 살았습니다. 1998년에는 300명의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위안 목사의 전기인 ‘살아있는 제사’가 1999년 싱가포르에서 출간됐습니다.
모쪼록 중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이 앞선 선배들의 정신을 잘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환경에 지배받지 않는 주님의 온전한 일꾼이기를 바랍니다. 중국교회의 성장에 놀라는 시선과 함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이 적잖은 걸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현재 ‘바알에 무릎을 꿇지 않은 사역자들’을 통해 중국 전역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들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합니다. 그중에는 삼자회와 협력하기도 합니다. 결단코 삼자회와는 같이 갈 수 없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된 마음은 하나님 나라일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기를 결단하는 중국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 왕빈 | 중국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