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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는 공통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인류는 세계를 인식하려는 본성이 있고, 고대와 현대는 그 인식 내용과 인식 방법에 있어 비록 상당히 다르다고 하지만 그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 ‘현대인’으로서 현대의 물질생활을 누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더 높은 목적의 추구는 없는 것인가? 성정(性情)을 도야(陶冶)하고 어떤 경지로 올라갈 필요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가? ” _몽배원(蒙培元)*
만약 우리의 삶이 미래에 대한 불안과 죽음에 대한 걱정 없이 평화로운 나날만 지속되리라 보장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어떤 배움이나 성장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람이 누리는 모든 안락함 뒤에는 여전히 ‘고통’이 있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렸던 진시황의 욕망 뒤에 찾아온 허망한 죽음처럼 말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누구하나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는 사실 속에서 우리는 그것에서 좀 더 자유한 ‘본래의 나’, ‘본래의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고통을 반추해보고 인간존재의 본성과 인간이 내던져진 이 세계의 운행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사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편안하고 안락할 때보다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당할 때 종교와 철학의 길로 인도되는 것 같습니다.
고통의 근원을 사유하는 것은 모든 종교와 철학의 공통된 출발선이지만 그 고통을 어떻게 대면하고 이겨낼 것인가, 그 중심의 사람이란 도대체 무슨 존재이고 어디로 향해 가는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과 방법론은 역사와 문화 속에서 모든 종교와 철학을 구분 짓게 해줍니다. 비교의 여지없이 어느 하나만이 즉각 옳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고통의 내용과 경험이 다르고 그것을 마주하는 사람이 다르고 그러한 거대한 인간의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철학을 다른 철학과 비교해보는 일은 우리의 고뇌에 또 하나의 고뇌를 더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고뇌에 더욱 풍부한 길을 제시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해의 깊이와 선택의 폭을 넓혀줍니다.
이번 장을 통해 사람의 본성과 사람이 추구해야 할 이상에 대해 동양사상 중에서 크게 대비되는 유교와 불교의 관점을 다루고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관점을 간단하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유교: 成圣(성인 됨) 유학의 선진들이 피력했던 정치적 관심은 단순히 법과 힘의 통치가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의 인도주의적인 정치였습니다. 유학자들은 자연 운행의 조화와 인간 본성의 발현을 만물일체적 시각에서 바라보며 정치적 규범과 권위를 지도층의 권력이나 신적인 권위에 호소하지 않고 지극히 선한 인간적인 마음의 발로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가장 조화할 수 있는 신묘함을 가지고서도 또한 가장 불화할 수 있는 악한 기질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유학은 자연히 인간 본성의 실현을 도덕수양, 인격수양에 맞추게 되었습니다. 자연의 조화로운 이치를 그대로 따르는 인간, 그 본성의 선함을 온전히 실현하고 그 덕을 사회와 세상에 실현하는 사람의 경지를 유학은 성인(圣人)으로 설정하고 모든 사람이 성인과 같이 선한 본성을 실현하는 대동사회(大同社会)를 꿈꿨습니다. 유학이 추구하는 행복은 결코 내세에 있는 것이 아닌 사람과 자연의 조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세대를 이어가는 태평성대에 있습니다. 불교: 成佛(부처 됨) 유학의 현세적인 관심, 인간다움의 수양과 이상정치의 실현이라는 목적과는 정반대로 불교는 이 세상의 가치들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나아갑니다. 유학이 본성을 사유한다면 불교는 무자성성(无自性性)을 사유하는데 이것은 곧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실재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관점에서 세상은 부정되고 초탈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내가 보는 것과 아는 것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넘어서 그렇게 모든 것을 부정하다보면 남게 되는 ‘고통’의 현실을 초월한 ‘정신’의 세계를 강조합니다. 관념 속의 나를 벗고 나면 실재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부처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即是空 空即是色)의 의미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열반이나 윤회가 단순히 이 세상을 등지고 다음 세상을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연기설(缘起说)을 통해 모든 것의 실재가 그 자체의 자성성이 아닌 상호의존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삶의 의미가 ‘마음’이라는 ‘나’의 세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곧 부처는 나를 ‘나’로 여기지 않고 그 모든 것의 연결성을 한쪽에 치우침 없이 공(空)의 눈으로 살피는 존재일 것입니다.
기독교: 成状(형상 됨) 기독교 신학의 가장 주된 관심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입니다.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물음을 넘어 하나님의 존재를 신앙하고 그분의 속성과 경륜을 탐구하는 것이 신학입니다. 이것은 여타 인문학과 신학을 가르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기독교의 주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 본성의 실현을 인간의 긍정적인 자기실현으로 보지 않고 반대로 ‘죄’로 인식합니다. 그것은 곧 신과 같이 높아지려는 인간의 탐욕과 자기우상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오히려 신의 인격과 주권 아래 인간성을 구속시키고 인간이 스스로 추구하는 자기실현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 곧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서의 인간을 추구합니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직시와 하나님에 대한 영접이 곧 자기를 만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께 이끌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법과 질서보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살아갑니다.
나를 찾아 나서는 길 모든 종교와 사상은 고통스러운 현실의 ‘지금의 나’를 넘어선 지고지순한 ‘본래의 나’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다른 길은 단순히 허망한 것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물어야 할 것은 다른 길을 보며 우리도 여전히 우리의 길을 진지하게 나서는 구도자인가 하는 점입니다. 구도자는 ‘본래의 나’를 찾는 과정에서 고군분투합니다. 본래의 나를 찾는 세상의 종교와 철학도 ‘사람’과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세심하게 귀 기울여야 할 주제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사람을 향해 있고 사랑에 기초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편집자 주> *몽배원(蒙培元)은 1938년 중국 감숙성의 장랑(莊浪)에서 태어났다. 1963년 북경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6년 북경대학 대학원에서 중국철학사를 전공하고 졸업하였다.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연구원이며, 박사지도 교수이다. 중국철학연구실의 주임, 중국철학사 학회의 부회장, 『中國哲學史』의 편집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작으로는 『理學的演變』, 『理學範疇系統』, 『中國心性論』, 『中國哲學主題思維』, 『心靈超越與境界』, 『情感與理性』, 『國學擧要․儒卷』(공저), 『人與自然―中国哲學生態觀』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200여 편에 달하는 논문이 있다.
♧ 출처 | 『성리학의 개념들 몽배원/ 홍원식, 황지원, 이기훈, 이상호/ 예문서원
♣ 김주한 | 길가에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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