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불교, 도교, 이슬람교에 비해 기독교에 대해 유독 신경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과거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래 부침(浮沈) 이 적지 않았다. 당(唐)나라 때나 원(元)나라 때에는 기독교가 지배계층의 옹호와 보호 속에서 일정 기간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민중 속으로 깊이 스며들지 못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청(清)나라 말기 중국 지식인들은 중국인과 외국인의 종교를 반드시 구별해야 하며 외래 문화가 결코 중화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중국인은 중국인 스스로의 종교가 있어, 중국인으로서 반드시 중국 성인의 가르침을 존경하며 실행해야 하고 오로지 외국인만이 외국 종교를 숭상해야 한다 (中国之人自有中国之教, 为中国之子民,即當尊重中国圣人之教,犹之为外国之人世守外国之教也).”
청나라 말기 유학자인 왕빙셰(王炳燮)의 말이다. 중화 문화가 외래 문화를 동화시킬 수는 있지만 외래 문화가 중화 문화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관점이다. 외적의 침략으로 외래 문화 또한 중국에 영향을 미쳤지만 중국 문화에 결국 동화되고 말았다. 역사가 이를 증명해 준다. 한(汉)나라 때의 흉노, 위진남북조 시대의 오호(흉노•선비•갈•저•강), 수당(隋唐)시대의 돌궐, 송(宋)나라 시대의 요(辽)•금(金)•하(夏), 원나라 시대의 몽고, 명(明)나라 시대의 달단과 만주족 등 변방 민족들은 모두 중국 문화에 동화됐다.
대학사(大学士) 워런(倭仁)도 기독교를 매우 경계했다. 청나라가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해 외국어 인재를 양성하는 것에 울분을 품은 그는 황제에게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예수교’가 성행한 이래 국가조차 오랑캐를 숭상하고 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탄했다. 수년 뒤 중화 문화는 쇠퇴하고 오랑캐 문화가 번창해 많은 중국인들이 오랑캐 문화로 귀의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正气为之不伸,邪气因而弥炽,数年之後,不尽驱 中国之众咸归于夷不止”).
기독교는 중국의 전통 사상과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중국의 오랜 관습과 사상에서 볼 때 조상숭배는 효의 표현으로 당연했지만 기독교는 이를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짐승보다 못한 종교라는 비난을 받았다. 특히 1715년 3월 19일 로마 가톨릭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공자께 드리는 모든 존경의식을 금하고 조상을 공경하는 의식과 제사 등은 집에서 거행하든지 무덤 앞에서 거행하든지 미신적 요소가 있으니 금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이에 청나라 강희제는 1717년 기독교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고 외래종교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관리들에 의해 기독교는 핍박을 받게 됐다.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아이들을 유괴해 눈을 빼고 뇌를 먹기도 한다. 심지어 아이를 먹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의 각종 자선행사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곤 했다. 중국 민간 사회에서 영신대회(迎神大会)가 있었다. 이 대회를 개최할 때 필요한 경비는 각 가정에서 조금씩 부담했다. 문제는 기독교인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비를 내지 않았던 것. 대회에도 참석하지 않으니 이웃관계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인들은 패륜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중국의 기존 윤리와 도덕으로는 남녀가 유별해야 하지만 교회에서는 함께 앉아 예배를 드리다 보니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서양의 도움을 받다 보니 교회가 재정이 넘쳐났는데 이 또한 비난의 꼬투리가 됐다. 중국인의 것을 빼앗아 기독인들의 배를 채우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중국인들은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보았을까. 기독교가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였다고 간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선교사들이 아편상들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무관심한 대신 선교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아편전쟁이라는 있을 수 없는 부정한 수단에 동조했다는 생각이 강하다. 중국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선교사들이 영국군의 작전까지 도왔다는 시각이다. 1840년 아편전쟁 발발 이후 체결되는 조약들 가운데 난징(南京)조약 외에는 기독교 집회와 선교의 자유가 주요 항목으로 포함됐다.
1844년 7월 청나라와 미국정부가 체결한 망하조약을 보면 의미심장하다. 난징조약을 통해 개항된 5개항(港), 즉 광저우(广州)•샤먼(厦门)•푸저우(福州)•닝보(宁波)•상하이(上海) 내에서 외국인을 위한 교회와 묘지를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같은 해 10월 청나라와 프랑스 간 황푸(黄埔)조약이 이뤄졌다. 프랑스 국민도 5개항에서 성당, 학교, 구호소, 묘소를 설치할 수 있게 됐다. 영국도 황푸조약에 의거해 1847년 교회 설립의 권리를 획득했다. 선교사들이 5개항 외에 내지로 들어가 선교활동을 하는 것을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선교사들은 홍콩과 마카오를 비롯해 5개항에서 포교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그중 홍콩은 선교의 근거지, 상하이는 선교의 중심지가 됐다. 1843년 홍콩에서 선교사들은 회의를 갖고 5개항 선교를 결의했다. 이후 1858년 중국에서 활동한 선교단체가 20여 개, 선교사가 200여 명에 달했다.
1856년부터 1860년까지 이뤄진 제2차 아편전쟁읕 통해 중국인의 자존심은 더할 나위 없이 상하게 됐다. 그 결과 톈진(天津)조약, 베이징(北京)조약이 이어졌다. 애로호 사건으로 이뤄진 톈진조약은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의해 청나라와 각각 체결됐다. 중미톈진조약, 중영톈진조약, 중불톈진조약, 중아톈진조약 등. 기독교 신앙•포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조항이 삽입됐다. 5개항 이외에 11개항을 개항하게 됐으며 사증을 소지한 외국인은 내지 여행을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됐다. 베이징조약은 청나라와 영국, 프랑스 간 각각 맺게 됐다. 중불베이징조약의 경우 청나라는 중국 내 가톨릭 성당과 부속 건물에 대한 손해배상을 해야 하고 프랑스 선교사는 개항장 외에서도 토지를 구입해 성당을 건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이처럼 서양에 의해 굴욕적인 문호 개방 역사는 기독교에 대한 곱지 않은 의식을 심게 됐다.
기독교이라면 중국인이면서도 중국 정부의 통치를 받지 않고 외국인의 보호를 받는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사역자이자 역사가인 에비 리빙스턴 원셔스는 이처럼 묘사했다. “법에 따르면 외국 정부는 단지 신자들의 신앙보호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신자들과 중국의 민중들을 나누는 결과를 초래했다. 중국인 신자들은 중국 안에서 외국인의 보호를 받고 중국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특수한 독립왕국을 설립했다. 이러한 선교자유의 조약은 중국의 위신과 주권을 완전히 말살하게 됐다. 중국 신자들이 외국 정부의 보호로 중국 정부의 통제를 완전히 받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서양 선교사들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중국 침략정책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 중국 정부가 원해 개방한 것이 아니다. 서방제국주의의 군사력으로 중국 정부로부터 무력으로 탈취한 조항이다. 이 때문에 그들이 전하는 복음과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850년부터 1864년까지 이어진 태평천국의 난은 기독교적 혁명 사상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청나라 정부의 실정과 관리들의 부패, 민생 불안에 따라 만주족과 청나라를 몰아내고 한족의 나라를 세우자는 태평천국은 훗날 쑨원(孙文)의 기독교신앙을 기초로 한 중화민국 건설과 정치 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지배층 입장에서는 중국에서 발생한 중요 민란들이 하나같이 기독교 등 종교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을 심각하게 바라보게 됐다.
태평천국의 난외에도 과거 종교집단에 의한 민란은 왕조의 문을 닫게 하거나 큰 위기에 빠뜨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도교의 원류가 된 후한(後汉) 말기 장자오(张角)의 태평도(太平道)와 황건(黄巾)의 난, 장링(张陵)의 오두미도(五斗米道)교의 난, 불교적 주술과 기복 성향의 백련교(白莲教)의 난, 청조 멸망을 예언하고 미륵신앙을 내세운 류쏭(刘松)의 제자인 류즈셰(刘之协), 쏭즈칭(宋之清)의 봉기, 외세 배격을 내세운 의화단(义和团)운동에 이르기까지 지배계급이라면 종교와 봉기, 농민은 언제든지 체제 위협요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됐다. 중국 정부입장에서 볼 때도 기독교는 제국주의 정치·경제 세력의 침략과 불평등조약을 연상시키고 언제든지 민란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의구심을 갖게 됐다. 기독교가 도교, 불교 등 보다는 체제 순응적이지 않았다는 역사는 현재 중국 기독인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짐과도 같다.
더욱이 지금 중국교회는 정부가 공인한 삼자교회와 정부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가정교회로 나눠 각각 존재한다. 사회 불안요소가 되기 충분한 이단은 교회라는 가면을 쓰고 활동하면서 중국 정부의 심기를 실제로 건드리기도 한다. 최근 들어 신흥도시가정교회의 부흥 속도가 가히 놀라울 정도다. 삼자교회에 비해 일부의 전통 가정교회나 신흥도시가정교회는 외국선교기관과의 관계가 매우 돈독한 편이다.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여러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하다.
중국 정부는 애국애교를 강조하고 사회에 적응하는 종교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중국 기독인들은 반정부 세력과는 거리가 멀고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집단인 것을 몸소 보여줘야 한다. 하나님나라를 갈망하지만 이 땅에서 살 동안에는 자신의 조국과 동포들을 사랑할 뿐 아니라 국가 발전의 동력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아울러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회 부흥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앞장서고 보다 건강한 교회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데 힘써야 한다. 기독교의 교리를 정확하게 사회에 전달하고 중국 상황에 맞는 교회의 토착화에도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중국에 세워져야 하는 교회는 특정 국가의 교회나 특정인만의 교회가 되면 안 된다. 요즘 중국을 묵상하다 보면, 1920년대 지식인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기독교운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속화의 길을 한국교회보다 더 빨리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길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중국 지도부가 국가발전과 사회 안정에 있어 기독교인들의 역할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도록 교회 지도자들이 좀 더 노력하면 좋겠다. 그렇다고 정부정책에 일일이 개입하는 우를 범해서는 결코 안 된다. 교회는 그 사명 완수에 만족하면 된다. 교회는 세력 확장에는 관심이 없고 복음의 확산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중국교회와 중국기독교인들, 파이팅(加油)!
한국교회도 중국복음화를 위한 도우미가 되는 것은 좋으나 중국과 중국인의 세계관까지 완전히 바꾸겠다는 생각은 지양해야 한다. 천 마디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복음은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 돼야 한다는 것을 실천하는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이 더 많아질 때 기독교는 중국사회에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방통행식이 아니라 중국의 상황을 고려한 보다 세련된 한국교회의 선교 모습이 중국인들을 감동시키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여, 감동과 공감이 넘쳐날 때 비기독교인들의 귀와 눈, 마음, 그리고 발이 움직인다는 점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왕빈 | 중국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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