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중국에서 개봉한 《태평륜》 상편은 중화권과 할리우드에서 액션 영화로 유명한 우위썬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닥터지바고》와 같은 사랑의 서사시를 연출하였다. 우 감독은 비교적 젊은 나이인 26세에 쿵푸영화로 데뷔한 최연소 홍콩감독이다. 《영웅본색》, 《종횡사해》, 《미션임파서블》 등을 통해 세계에 이름을 알렸고, 《페이스 오프》[Face/Off, 1997]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A급 감독으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미국 영화계에서 호평을 받았다.
우 감독은 한국의 송혜교를 비롯한 중국, 대만, 일본 각지의 저명한 배우들을 캐스팅하였고 리안 감독의 《음식남녀》, 《와호장룡》, 《색계》에서 함께 작업했던 유명작가인 왕훼이링[王蕙玲]이 《태평륜》의 각색을 맡았다. 그가 《적벽대전 2부 - 최후의 결전[Red Cliff 2]》을 선보인 후 오랜만에 내놓은 이번 영화는, 임파선 종양제거수술 후 1년간 작업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국공내전과 항일전쟁, 중국 현대사의 커다란 두 개의 수레바퀴를 축으로 펼쳐지는 주인공들의 애틋한 러브 스토리를 2008년에서 2014년까지 6년간 준비하고 촬영했다.
《태평륜》상편은 1947년부터 1949년, 상하이와 대만을 배경으로 전쟁의 혼란한 시국 속에서 사랑하고 이별하는 세 커플의 이야기다. 국민당 군대 장교 레이팡[雷义方, 黄晓明 분]과 명문가의 아내 저우윈펀[周蕴芬, 송혜교 분]의 사랑은 낭만적 비극적으로, 국민당 군대 사병 통다칭[佟大庆, 佟大为 분]과 기생 위전[于真, 章子怡 분]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우정 같은 담백한 사랑을, 대만인 옌쩌쿤[严泽坤, 金城武 분]과 일본 여인 시무라 마사코[志村雅子, 长泽雅美 분]의 국경과 식민지를 초월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난국 속에 꽃피운 사랑이야기의 이 영화는 중국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올 여름에 하편이 개봉될 예정이라고 한다.
중국판 타이태닉호: 태평륜호 영화 《태평륜》은 2009년에 5년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대만 여성 작가 장뎬완[张典婉, 1959- ]의 소설 《태평륜1949 [太平轮一九四九]》를 개작한 것이다. 영화와 소설에서는 1949년 1월 27일 침몰한 태평륜호를 상하이 황푸장에서 대만 지롱[基隆]으로 향하는 해역에서 충돌해 천여 명의 승객이 조난을 당한 중국의 타이태닉호 사건이라 불린다.
태평륜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제작한 화물여객선으로 높이 80미터에 2500톤급이며 1948년 7월 14일 상하이 중롄[中联]기업이 매월 7천 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빌려서 사용하였다. 1949년 1월 27일 1천여 명을 태운 태평륜호는 대만 지롱항을 향해 출발했는데 야간통행금지를 피하기 위해 항해등을 켜지 않고 운행하다 저녁 23시 45분 매탄과 목재를 실은 건원륜[建元輪]호와 충돌해 932명이 조난을 당했다. 36명가량이 생환됐고 선장은 배에 타고 있지도 않았고, 부기장과 부부기장은 술에 만취해 조타를 제때 하지 못했기에 거대한 하중을 이기지 못한 배가 침몰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승선인원이 만원이어서 오후 4시에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2시간이 지연되어 6시에 출발하였다. 배표가 있는 승객이 508명, 선원이 124명, 배표가 없는 사람이 300여 명이었다. 1949년 배표의 가격이 폭등하여 몰래 승선한 사람이 적지 않았고 게다가 배에는 대만 건설에 사용할 철강자재 600톤, 중앙은행의 중요한 상자 18개, 동남일보[東南日報] 인쇄기자재 등이 실려 있었다.
전쟁과 명예 그리고 가족 영화 《태평륜》은 전쟁의 비참함과 인간성 말살을 고발하며 혼란한 시국 속 큰 인물부터 소시민까지 겪는 아픔을 입체적이고 집체적인 기억의 형태로 노출시켰다. 일본은 1931년 918사변을 일으키고 중국 동북지방을 점령하고 위(僞)만주국을 세우고 1937년 일본군이 루거우차오[芦沟桥]사건을 일으켜 중일 전면전이 발발하였다. 중국은 일본과 8년간의 전쟁을 치렀다. 국공내전은 1927년에서 1949년까지 국민당과 공산당이 경내에서 벌인 전투로 공산당이 승리해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대만인 일본군은 1942년에서 1945년 사이에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대만인으로 외관상 지원병 형식을 취했지만 사병으로 8만여 명이 징집되었고 학도병을 포함하면 10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1943년 한 해에 5천여 명의 원주민이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끌려갔다고 전해진다. 일본군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명분으로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청년들을 전쟁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일본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2만8천 명 가량의 대만인 일본군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데 그 가운데 2천여 명은 대만의 원주민이다.
1945년 여름 국민당의 장군인 레이팡은 일본군을 대파하고 상하이로 돌아가 훈장을 추서 받는다. 그는 파티에서 명문가 딸인 저우윈펀을 만나 왈츠를 추다 첫 눈에 반해 결혼을 하지만 내전이 그치지 않자 전장에 나갔다. 그는 아내를 먼저 대만으로 보내고 그곳에서 함께 살 집을 설계하고 아내와 함께 다시 춤을 추겠다는 꿈을 꾸었다. 혼자 대만으로 온 저우윈펀은 〈가을날의 갈대[秋日芒草]〉을 작곡하며 남편과의 해후를 기다렸다. 레이팡은 전쟁 속에서도 아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버텼다. 하지만 전세는 국민당 군대에게 불리해지면서 군인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다. 그들이 땅의 눈을 먹고서 병이 나자 레이팡은 자신의 애마를 총으로 사살하여 사병들이 먹도록 하였다.
1949년 1월 화동[華東]지구전투에서 지원군이었던 108사단이 적군에게 투항하자 레이팡 군대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공산당 군대는 투항을 권유하는 선전노래를 부르며 국민당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니 사면초가의 레이팡의 부하들은 도망병이 속출하고, 배신을 하여도 그들을 내버려뒀다. 공산당 군대 장교인 친구가 레이팡에게 미국이 국민당을 버렸으니 투항을 권고했으나 레이팡은 적의 포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저우윈펀에게 안락하고 평안한 대만의 아름다운 정원은 이제 아무 소용없는 허무만을 안겨주었다.
1940년대 대만에서 유행한 민난어 [閩南語]로 된 노래 〈어서 돌아오세요[望你早歸]〉는 일본군으로 참전한 대만인의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들이 남편의 무사귀환의 희망을 담은 노래이다. 영화에서는 화동지구전투에서 국민당 군대의 5개 병단 22개 군단 56개 사단 55만 5천 명이 55일간 전투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30일간 포위당하고 전군이 패전하였다.
영화 속의 국민당 장군 레이팡은 항일전쟁의 영웅이며 국민당 군대의 제74사단장인 장링푸[张灵甫, 1903—1947]을 떠오르게 했다. 장링푸는 1947년 5월 16일 전사할 때 44세로 포화에 사망했거나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전쟁의 참상과 사랑 위전은 상하이의 젊은 노숙인의 삶을 대변하였다. 그녀는 낮에는 부상병을 돌보는 간호사로, 밤엔 자신의 몸을 팔아 생활을 꾸려나갔다. 국민당 군대의 통신병인 통다칭은 자상한 간호사 위전을 좋아하게 되었다. 더 많은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길에서 만난 위전과 찍은 가족사진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위전과 국수를 먹을 때 그녀가 그를 위해 소금을 뿌려주는 따뜻함에 반해 소금이 담긴 양념병도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녀는 헤어진 애인을 찾으려고 비싼 태평륜호의 배표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했다.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위전이지만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남의 것을 탐내지는 않았다.
한 부상병이 자신의 가족들이 배가 고프니 자신의 반지를 그들에게 보내줄 것을 부탁받고 가보니 아이들은 굶주림으로 이미 죽어 있었기에 죽은 병사의 금반지를 다시 끼워주었다. 내전이 장기화 되면서 국민당 군대에서는 배신자들이 속출했는데 공산당은 좋은 사람들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배고픔에 시달리던 국민당의 한 통신병이 사냥을 나갔다가 공산당 병사와 마주쳤는데 처음에는 서로 총을 겨누다가 나중에는 사냥한 토끼를 함께 나눠먹고 헤어졌다. 그들에게 아군과 적군,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 배고픔을 충족시키는데 사력을 다하였다.
혹자는 감독이 2009년에 롱잉타이[龙应台]가 《대강대해1949[大江大海一九四九]》에서 국공내전 중에 국민당의 노선을 견지하였다고 했지만 영화에서는 사람들이 자본가나 국민당 정부에 항의하고 공산군에게 환호하는 장면들도 있다. 우위썬 감독은 대만과 국민당의 입장에서 내전과 항전을 바라보지만 중국인관객들을 의식해 정치적 입장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영화는 적군의 사악한 행위를 고발하고 아군의 영웅적 행위를 선전하는 역할을 거부하고 전쟁의 잔인성 고발하였다. 전쟁과 식민지 그리고 사랑 옌쩌쿤은 대만인이지만 일본군 군의관이었는데 레이팡의 국민당 군대에 의해 포로가 되어, 대만으로 돌아왔다. 옌쩌쿤은 일본 군인으로 출전하여 같은 민족 중국인에게 총부리를 겨누기도 했다. 그를 경멸하는 눈초리와 불편함을 영화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일본 식민통치하의 대만에서 옌쩌쿤은 아무리 그림을 멋지게 그려도 1등은 항상 일본인에게 돌아갔고, 열등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그는 중국인도 대만인도 일본인에도 속하지 못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옌쩌쿤은 학생시절 사랑했던 여인 시무라 마사코를 찾아보았지만 일본이 패전 후 떠났기에 만나지 못했다. 그가 일본 여인을 사랑하자 가족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쳤다. 심지어 어머니는 그가 집에 없을 때 시무라 마사코의 수많은 편지를 전부 불살라버렸다.
《태평륜》에 나오는 세 커플은 전쟁 때문에 이별하고 서로를 그리워함을 편지와 사진을 매개체로 삼았다. 국민당 장군 레이팡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의 끝자락에서 아내 저우윈펀의 편지와 결혼사진을 움켜쥐고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사병 통다칭과 기생 위전의 만남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었던 생활의 궁핍과 두려움을 이기게 도와주었고 통다칭은 그녀와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언젠가 퇴역하고 농사지으며 배부르게 먹는 나날을 기대하였다. 일본 여인 시무라 마사코는 군에 징집되었던 옌쩌쿤을 기다리며 수없이 편지를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남자친구는 한 통의 편지도 받지 못했다. 옌쩌쿤은 자신의 얼굴이 찍힌 사진과 일본여자 친구의 사진과 합성해서 간직하였다.
우위썬 감독은 하얀 갈매기가 태평륜호 곁을 날아오르는 장면을 인상 깊게 연출하여 평화를 갈구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사상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영화 《태평륜》은 중국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였던 전쟁과 재난이 빚어낸 이산가족의 고통, 연인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죽음 등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도 세 남녀의 변함없는 사랑을 감동을 담아 그려냈다. 끝으로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끝없는 아픔과 고통 속에 있는 가족들의 상처가 아물기를 기원한다.
김영철 |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 중국학과 교육전담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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