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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1  통권 152호  필자 : 김석주  |  조회 : 4288   프린트   이메일 
[중국교회사 클래스]
기독교(복음)는 언제 중국에 처음 도래하였을까? (3)

사도 도마가 수행원을 최소한 한 사람 이상 데리고 65년 중국 쟝수성 롄윈강에 도착하였으며 또한 이런 역사적 사실이 콩왕산의 마애상 중에 남겨져 있다는 페리에와 월터의 주장에 대해, 대다수 중국 학자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이런 가능성이 있음을 페리에와 월터보다도 10여 년 전부터 주장해온 중국 신학자가 있다. 그가 바로 중국기독교양회(中國基督教兩會)에서는 상무위원으로, 난징협화신학원(南京金陵協和神學院)에서는 신학자로 사역한 왕웨이판(汪維藩, 1927~현재) 교수이다.

 

 

 

 

 난징협화신학교의
왕웨이판(汪維藩) 교수

 장수성 수저우 한화상석예술관(漢畫像石藝術館)]

 한화상석예술관의 기독교 관련
화상석 중 하나


그는 우연찮게 오랜 기간 쟝수성(江蘇省) 수저우(徐州)의 한화상석예술관(漢畫像石藝術館)의 여러 석상, 특히 후한(後漢 혹은 東漢, 25-220) 때의 묘지석을 연구하였다. 당시 수저우를 포함하여 근방 4개 지역에서 온전하게 발굴된 후한 시절의 묘가 20여기 있었는데, 거기서 나온 500여개의 화상석에는 다채로운 문양과 그림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화상석이란 고대 중국의 묘실, 묘 앞의 사당이나 석궐 등의 분묘건축에 장식하는 석재에 여러 가지 문양이나 그림을 선각하거나 얕은 부조로 조각한 것이다. 전한(前漢 혹은 西漢) 중엽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전한 말부터 후한 초까지는 그 수량이 급증하다가, 후한 말 사회 혼란기에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다채롭고 다양하게 표현된 화상석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당시 장원경제의 생산활동상이다. 농경, 뽕나무 재배, 옷감 만들기, 소금 채취 등이 그것이다. 둘째는 묘의 주인 되는 사람의 공적 활동상이다. 가마를 타고 출행하는 모습, 지위가 높은 관리 알현하기, 세금 거두기, 강학 등이 그것이다. 셋째는 묘의 주인 되는 사람의 일상생활상이다. 손님을 맞아들이기, 한가롭게 휴가 보내기, 장기나 바둑 두기 등이다. 넷째는 경전이나 역사고사에 나오는 인물들의 활동상이다. 성왕(成王)을 잘 보필한 주공(周公)의 이야기, 공자와 그 제자들의 이야기, 그 지방의 열녀와 효자 이야기 등이다. 마지막 다섯째로는 중국의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인물이나 상서로운 생물, 선초(仙草) 혹은 천상도 등이다.

그런데 왕웨이판 교수가 주목한 것은 이 다섯째 범주로 분류된 화상석이었다. 사회가 극도로 어지러웠던 후한시대에 참위사상이 범람하여 천인합일하는 우주관이 소개되고 영혼이 승천하는 염원이 크게 반영되었다고는 하지만 많은 문양과 그림이 중국 그 자체에서 생성된 사상이나 이야기로 해석되지 않는 것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도 이런 화상석이 그의 눈에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그가 당시까지 수십 년을 묵상해온 성경의 이야기나 기독교의 문양 그 자체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당시 1~2세기 시리아, 이라크, 중동아시아에서 발견되는 기독교 문양과 비교 연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2002년 “중국 후한시대 화상석에서 발견된 기독교 문양”이란 논문과 2007년 “중국 고대 기물에 새겨진 십자가 문양”이란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며 적어도 후한 장제(章帝, 재위 75-88년) 때인 86년에는 기독교가 중국에 도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왕 교수의 논문은 구체적으로 사도 도마의 중국 선교와 중국 교회 설립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경교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중국에 들어와 거류하며 선교를 시작했다는 당 태종 때인 635년보다 거의 550년 이전, 다시 말하여 1세기경에 이미 기독교가 중국에 도래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페리에와 월터의 주장이나 왕 교수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도 그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이란 것은 어떤 결론을 미리 생각하고 바라볼 때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우리에게 보여줄 때가 종종 있다. 그렇기에 객관적이고도 중립적으로 그 내용을 해석할 고고학자나 역사가의 도움에 의존하게 되고, 나아가 학계의 공감을 얻어야 한다. 물론 학계란 것이 일반적으로 보수적이어서 획기적인 주장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면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대체 기독교(복음)는 언제 중국에 처음 도래하였을까? 이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앞으로도 여전히 계속되어야만 할 것이다.



김석주 | 장로회신학대학교 아시아교회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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