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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1  통권 152호  필자 : 유관지  |  조회 : 2537   프린트   이메일 
[발행인통신]
중국교회, 그 기년(紀年)은

웹진『중국을주께로』가족 여러분께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또 중국의 성도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넘치고, 중국 대륙의 14억 가까운 영혼들이 부활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중주』가족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분주하고 활기찬 한국교회의 4월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입국한 첫 선교사인 미국 북장로회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미국 감리회의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당시 이름 제물포)에 발을 디딘 것이 1885년 4월 5일입니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올해 이들의 입국 130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을 많이 하고 있는데 특히 이들이 도착한 4월에 행사들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언․아 두 선교사의 내한을 한국교회의 출발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와 감리교뿐이 아니고 한국교회 전체가 올해를 ‘한국 기독교 130년의 해’라고 부르며 뜻있게 보내려고 애쓰는 가운데 있어서 올해는, 특히 4월은 매우 분주하고 활기찬 분위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기년(紀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논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년’은 ‘기원이 되는 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 문제는 먼저, 한국교회를 ‘수용’(受容)의 입장에서 보느냐, ‘전래’(傳來)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언․아 두 선교사의 입국 이전에도 한국교회에는 의미 있는 사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1816년 9월 충청도 마량진에 영국 함선 알세스트호와 리라호가 도착하여 한국 관리들에게 성경을 전달한 일, 1832년 7월 귀츨라프 선교사가 황해도 장산곶을 거쳐 충청도 고대도 앞에 도착해서 20일 가량 머물면서 한문성경과 전도 문서를 전하기 위해 애쓴 일, 1866년 9월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에서 순교한 일, 1874년 로스 선교사가 고려문에서 한국인에게 신약성경을 전달하고 이어 이응찬과 함께 성경 번역에 착수한 일, 1879년 중국 대륙 동북 지역에서 백홍준․이응찬 등이 세례를 받은 일, 1882년 서상륜이 최초의 권서인(勸書人)으로 국내에 파송된 일, 1883년 이수정이 일본에서 성경 번역에 착수하고, 미국교회 앞으로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한 일, 1884년 6월에 매클레이 선교사가 내한하여 고종황제로부터 의료와 교육사업 윤허를 받은 일, 같은 해 9월에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이 내한하여 활동을 시작한 일 등등. 이 가운데 하나를 택해 기년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데 특히 교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순교나 성례가 있었던 해를 출발로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매클레이와 알렌이 입국한 1884년은 이미 기년의 하나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역사 연구의 중추기관 가운데 하나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는 매월 첫 토요일에 학술발표회를 갖고 있는데, 지난달 2월에 열린 제332차 학술발표회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기년 문제를 주제로 발표하고 토론을 했습니다. 개신교의 기년 문제를 발표한 한 학자는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松川)교회가 설립된 해를 한국 개신교의 기년으로 삼아야 한다. 소래교회가 언제 설립되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1883년 설, 1884년 설, 1885년 설, 그밖에도 여러 주장이 있는데 여러 가지를 살펴볼 때 1885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1885년을 한국 개신교의 기년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1885년을 기년으로 보는 점은 종래의 많은 사람들과 같으나 다른 근거를 내세운 것입니다.

소래교회는 잘 아시는 것과 같이 서상륜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서상륜은 평안북도 의주 사람으로서 중국 동북 지역에서 세례를 받고 성경 번역활동을 하고 권서인으로 임명을 받아 국내에 들어와서 전도활동을 했는데, 당시 국내의 형편으로는 이 같은 전도활동이 용인되지 않아 친척이 사는 황해도 장연군 소래에 와 있으면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를 통해서 신앙공동체가 이뤄졌고 소래교회가 출발하게 되었는데 한국교회사 연구의 개척자인 백낙준 박사는 이 교회를 ‘한국 개신교의 요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설립 초기에는 교역자가 없었고, 따라서 성례를 집행할 수 없어서 초기의 소래교회에 대해 말할 때는 ‘미조직교회’라는 말이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 개신교 역사의 재해석과 재발굴이 필요합니다
한국교회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4월을 맞으면서 ‘중국교회의 기년은 언제인가’ 하는 것이 궁금해졌습니다. 앞에서 한국교회의 기년 문제를 길게 언급할 때 ‘중국선교 전문잡지인 『중국을주께로』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닌가!’ 하다가, 여기에 와서 ‘아, 중국교회의 기년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 그랬구나!’ 하고 눈치 챈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중국 개신교의 첫 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손은 1807년 9월 4일에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따라서 1807년을 중국교회의 기년으로 잡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 듯합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인 1950년 9월 23일, <인민일보>에 우야오쫑(吳耀宗)이 기초한 ‘중국 기독교가 신중국 건설의 과정에서 노력해야 할 길’(中國基督敎在新中國建設中努力的途徑)이 실렸습니다. 이 글은 ‘중국기독교선언’ 또는 ‘혁신선언’이라고 불리는데 현재의 중국 기독교는 이 글이 발표된 날을 삼자운동의 발기일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해오고 있습니다. 중국의 관변(官邊)에서는 이 1950년을 퍽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중국교회의 기년은 1807년이나 1950년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인가. 앞의 한국교회를 예로 들면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선교사의 입국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열거했는데 중국 개신교에는 그런 일들은 없었는가. 이런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을 주기 위해서는 중국 개신교 역사의 재해석과 재발굴이 요청됩니다. 한마디로 해서 중국 개신교 역사 연구의 활성화가 이뤄져야 합니다.

한국의 감리교는 올해를 공식적으로 ‘감리회선교 131년 아펜젤러․스크랜턴 모자(母子) 선교 130년’으로 정했습니다. 이 이름은 매우 길어서 혼선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1884년 매클레이 선교사의 내한과 1885년의 아펜젤러 선교사 내한, 그리고 스크랜턴 선교사 모자의 내한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에 대해 이해가 있는 분들에게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종전에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이름만 나오는 일이 많았는데 올해는 스크랜턴 선교사 모자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 눈을 끕니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서울에 제일 먼저 들어온 감리교 선교사입니다. 4월 5일에 인천에 내린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는, 한국의 정세가 매우 불안하여 여성이 들어오는 것은 곤란하다는 미국 공사의 의견에 따라 일본으로 돌아갔고, 5월 3일에 인천에 온 스크랜턴 선교사가 6일에 서울에 첫 발을 디뎠던 것입니다.  
                                                                                                          


스크랜턴은 상동교회․아현교회․동대문교회 등을 설립하며 선교활동을 했고, 그의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은 이화학당을 설립했고 한국에서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한국을 지극히 사랑했던 스크랜턴 선교사는 해리슨이라는 지나치게 친일적이었던 감독과 대립각을 세우다가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거기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크랜턴은 오랫동안 ‘비운의 선교사’ ‘잊혀 진 선교사’라는 말을 들어오다가 최근 그에 대한 집중적인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중국 개신교의 역사에서는 이렇게 재조명되어야 할 인물이나 사건은 없는지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4월은 이런 과제를 우리에게 주는 달입니다. 『중주』는 중국 개신교의 기년 문제를 다뤄볼 것도 약속합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이번 호의 특집 역시 중국선교의 키워드 몇 개를 중심으로 엮었습니다. 모두 실제적이고 중요한 문제들입니다.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유관지|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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