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웹진『중국을주께로』의 이번 달 특집은 지난달에 이어 ‘키워드로 본 중국선교(II)’이다. 그중에서 ‘동원’이란 키워드로 중국선교에 대한 생각을 써줄 것을 부탁받고, 말씀 안에서 선교와 동원의 의미를 묵상하고 나누고 싶었다. 이미 선교지에서 국내 목회로 전환했기에 현장성과 전문성은 선교사님들께 맡기고, 목회현장에서 느낀 선교와 동원에 대한 관점을 빌립보서 1장 12-21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일전에 무심결에 읽던 본문에서 선교에 관한 사전적 정의를 발견한 적이 있는데, 사도행전 21장 19절의 말씀이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이 구절은 바울이 예루살렘교회로 올라가 교회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선교보고를 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굵은 글씨의 밑줄 친 부분은 바울이 내린 선교의 정의로 선교란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이다. 또한 이 선교적 정의에서의 강조점은 이 문장의 주어가 하나님이시라는 점이다. 즉 선교의 주체는 선교사이기 전에, 교회이기 전에 먼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시다 라는 점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의 모든 사역은 그저 자기의 봉사라는 말로 낮추어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그가 보낸 선교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의 선교적 동원에 대한 이해
바울은 자신을 후원했던 빌립보교회를 향해 선교보고와 아울러 동역의 기도를 요청하고자 빌립보서신을 작성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이 쓴 빌립보서는 일종의 선교편지이다. 그 중 서론에서 바울은 선교보고를 하며 사역자로서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태도를 보여준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2절)
바울은 이 선교편지에서 자신이 당한 일을 알아 달라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 당한 일 때문에 일어난 결과, 즉 복음전파의 진전에 대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당한 일은 무엇인가? 이어지는 13절과 14절에 보면 나의 매임이라는 표현이 힌트다. 흔히 빌립보서가 옥중서신으로 일컬어지는 것처럼 바울은 지금 매여 있는 상황이다. 복음전파로 인해 잡히고 투옥되어 로마의 한 감옥에서 매여 있는 채 쓰여 진 편지가 빌립보서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생스러운 일, 즉 매여 있음을 알아 달라 말하지 않고, 그 일로 일어난 복음의 진전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어 성경을 보면, 복음의 진전을 복음의 흥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이 말하고 싶었던 내용은 ‘나는 갇혀있지만 복음은 활짝 열리게 되었고, 나는 묶여 있지만 그로 인해 복음은 더욱 날개달린 듯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이 가슴 벅찬 사실을 좀 알아달라는 것이다.
이처럼 선교보고에서의 주된 내용은 앞에서 살핀 선교의 정의에 따르면 그 주체가 나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기에 그 보고의 내용도 나의 어떠함보다는 그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어떠함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나의 개인적 어려움도 기도의 내용이요, 선교적 보고사항이 될 수 있지만, 바울은 그 당한 일보다는 그 일로 일어난 결과를 더욱 알리고 싶었고, 복음의 진전이 자기가 당한 그 고난마저 상쇄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신이 당한일로 일어난 복음의 진전이 결과적으로는 3가지 사역적 동원을 일으켰다고 말한다.
첫 번째 복음의 사역적 대상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13절에 나타난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으니”
바울이 당한 일로 인한 첫 번째 동원의 효과는 불신자들(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여기서 시위대는 로마 군인들과 간수들을 말하고,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과 함께 있는 죄수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내가 당한 이 매임 때문에 그들에게도 복음이 들려지게 되었고, 그들이 1차적 복음의 동원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황제사상에 투철한 로마 군인들이, 죄로 찌든 감옥에서 죄수들이 평생에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았을 것인데, 바울이 매여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고, 그것을 바울은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다라고 표현하며 첫 번째 보고의 내용으로 전하고 있다.
두 번째 복음 사역에서 동원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14절에 나온다. 이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동원의 1차적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바울이 매어있음으로 사역적 동원이 동역자들과 교회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각성으로 일어나고 있다. 아마도 감옥 밖의 형제자매들은 이렇게 서로 말하며 도전을 받았을 것이다. ‘바울도 저 감옥에서 이렇게 편지를 쓰며 우리를 격려하고, 심지어 그는 감옥에서도 이렇게 복음의 전파를 기뻐하며 애쓰고 있는데, 감옥 밖에 있는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 이들은 신앙의 각성과 함께 더욱 담대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다.
형제자매들을 동원의 대상으로 여기며 그들을 일으키고자 한다면 때로는 내게 바울과 같은 ‘매여 있음에도 불구하고의 열심’이 필요하다. 단순히 형제자매들을 동원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고, 내가 먼저 충분히 열심의 자리에 동원되고, 심지어 감옥에서도 불신자들을 복음의 자리로 동원시켰다는 그 감격과 수고가 또 다른 형제자매들에게는 사역적 동원의 큰 동기부여가 된다. 내가 어려운 형편에서도 신앙을 담대히 지켜나가면, 주변의 지체들은 반드시 영향을 받게 된다.
마지막 세 번째 사역적 동원의 대상이 20절 말씀에 나온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여겨지는 것 그것이 복음 전파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마지막 복음전파를 말하며 누구를 동원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는가? 어디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어 진다고 간증하는가? 바로 내 몸에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고 있다. 그것도 살든지 죽든지의 각오로 생명을 담보하며 간절한 열망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선교동원을 말할 때 잊기 쉬운 것이 있고, 정말로 놓쳐서는 안 될, 사실 하나는 동원의 마지막 대상이자 가장 최우선적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복음은 나에게 날마다 증거 되어져야 한다. 이미 그 복음을 들었다가 마음이 굳은살로 반응할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그리스도가 내 삶에서 가장 존귀하게 여겨지도록 내 생각을 깨우고 행동을 살피며 맞추어야 한다. 그것이 세 번째이자, 역설적으로 가장 우선적으로 사역적 동원을 이루어야 할 대상이다.
이 세 번째 대상인 나 자신이 가장 선명하고도 가장 먼저 복음을 사역적 동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땅을 뒤흔드는 지진의 강력함은 처음 진앙지의 강도에서 결정되며 그 파동이 멀리까지 나아가듯이, 내안의 복음의 진원지에서 강력한 복음의 울림이 있어야 더 멀리, 더욱 선명하게 지체들과 불신자들에게까지도 그 복음의 파동을 기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중국의 사역적 동원을 위한 몇 가지의 적용을 나누며 글을 맺고자 한다.
첫 번째는 감옥에서 일어난 복음의 진전처럼 실제적으로 그들의 사역이 열매 맺고 복음의 전파가 각지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장단기의 사역자를 발굴하고 지속적으로 내보냄이 필요하다. 내보내야 그들의 수고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어진다. 특히 바울 사역의 초점은 회심과 교회개척이었다. 그래서 감옥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군인들과 죄수들의 변화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사역자는 이 한 가지 방향에 집중하여 자신의 당한 일뿐만 아니라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민감하게 살피며 나누고 기도제목으로 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편지를 받을 때마다 동역자들은 빌립보교회처럼 온 힘을 다해 읽어보고, 반응해주어야 한다.
두 번째는 형제들 안에서 복음의 진전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선교사들과 교회는 상하주종이 아닌 동역자 관계이다. 마음이 서로 통할 수 있는 협력교회가 되어주고, 신뢰해주고, 위로해주어야 한다. 그들의 사역을 감시하겠다, 점검하겠다는 태도는 옳지도 않고 효과도 없다.
그 이전에 말하지 않은 것까지 헤아리며 마음의 동참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자발적 점검을 하게 하는 지혜가 된다. 바울은 새로운 개척 사역을 감당할 때의 어려움을 생각하며, 그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빌립보서의 마지막 인사를 대신하고 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빌 4:15)” 즉 신뢰와 배려가 감사와 열심을 낳는 것이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한 적용으로 우리 안에 복음을 날마다 새롭게 새겨야 한다. 그것이 진원지가 되어 강한 파장을 일으킬 때, 내 기도가 힘 있게 되고, 나의 격려가 그들에게까지 마음의 위로로 들려질 수 있다. 점차 선교지로써의 영토적 경계선이 무너지고, 전후방의 구별이 사라지고 있다. 이미 우리 주변에는 타문화권 사람들이 우리에게 너무나 가까이 와있지 않는가. 그것도 그들이 먼저 한국말을 배우며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이런 시대적 변화 속에서 선교 사역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사역자 스스로 날마다의 갱신의 문제가 될 것이다.
글을 맺으며
이전에 사역지에 있을 때 선교편지의 서두에 늘 이런 마음의 바람을 전하며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동원의 대상에 있어 각성을 촉구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가 없는 영혼이 선교지이고, 그리스도가 있는 영혼이 선교사이다.
이미 선교지 개념에서 영토의 문제는 영혼의 문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선교사 개념에서 자격의 문제는 성도의 자격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것은 영토와 자격의 영역이 약화되고 물러지고 있다는 반성이 아니라, 그만큼 마지막 추수 때의 영적인 상황은 이미 전면전의 상황으로 확전되었고, 모든 교회가 모든 복음을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가운데 집중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각성의 표현이다.
세계적인 트럼펫 연주가 루이 암스트롱은 이런 말을 했다.
“당신 속에 음악이 있다면 음악에 대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 속에 음악이 없다면 음악에 대해 아무리 훌륭한 설명을 한다 해도 당신에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당신 속에 복음이 있다면 복음에 대한 정의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 속에 복음이 없다면 복음에 대해 아무리 훌륭한 설명을 한다 해도 당신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선교는 복음의 진전을 위해 하나님을 주어로 삼고, 모든 민족을 목적어로 삼아, 우리 자신을 동사로 드리는 헌신이다. 이 헌신이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동원의 요청도 무익하다. 그리고 그 헌신의 마음가짐을 먼저 내 안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 형제자매들, 그리고 주변의 불신자들과 땅 끝까지 품고 나아가는 것이 복음의 진전이고 동원의 의미이다. 이 새봄에, 다시 한 번 복음의 진전과 흥왕을 경험하는 계절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 광열 | 동인교회 담임목사, 전 중국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