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여름, 선교지에 도착해서 첫 여름을 맞이하였다. 얼마나 더운지 5월에 벌써 35도를 웃돌고 있었다. 실내에서도 31-2도를 왔다 갔다 하는 더위는 정말로 사람을 무력하게 했다. 선교지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정착하기 위한 여러 가지 물품들이 필요했다. 당장 필요한 물건들을 우선순위를 두고 구입하다보니 에어컨을 구입할 형편은 되지 못했다. 동료 선교사님 한분이 우리가 보기에 딱했던지, 아이들도 많은데 더운 여름을 어떻게 날거냐고 하면서 돈을 빌려 줄 테니 에어컨을 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선교지에서 먼저 어려움을 겪어 보는 것이 앞으로의 긴 선교여정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에어컨을 사지 않기로 했다. 에어컨을 사지 않은 채, 선교지의 첫 여름을 보내게 됐다. 선교지의 5월은 한국의 한여름보다 더 더웠다. 그리고 7월이 되자 기온은 40도 가까이 껑충 뛰었다. 얼마나 더웠는지…….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할라 치면 온 몸이 땀범벅이 되고는 했다. 나는 먼저 가족들에게 밥상을 차려주고서는, 욕실로 직행하여 땀을 씻어내고서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여느 날처럼 더위와 치열하게 싸우던 어느 날.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막내딸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걱정하는 마음으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이리저리 찾았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자 화장실에서 막내딸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심을 하고서는 한참을 기다렸지만 딸아이는 나오지 않았다. 용변을 본 것이라면 나올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부를 때마다 아이는 여전히

“응…응….”

하고 대답을 하기는 하는데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 같았다. 나는 하도 이상하다 싶어 화장실문을 슬며시 열어 보았다. 그런데 화장실 안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짙은 코발트색 수영복을 입고 욕조에 하나 가득 물을 받아 놓고서는 빨래판을 욕조에 걸쳐 걸쳐진 빨래판을 책상 삼아 몸은 욕조에 담근 채,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더웠으면 그 자그마한 머리에서 이런 아이디어를 짜내었을까. 우리 식구들은 그 광경에 배꼽을 틀어잡고 웃을 수밖에. 모두들 역시 막내답다고 하면서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집 막내의 목욕탕 책읽기 피서를 즐기는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막내가 6살 되었을 때인 1990년, 나는 선교사로 가기 위한 준비 중의 하나로 장로회신학대학교(광나루)에 입학했다. 그 당시 두 아이는 초등학생이어서 걱정이 덜됐지만, 교회에서 운영하는 선교원을 다니고 있었던 막내의 걱정이 컸었다. 막내는 오후 2-3시경이면 집으로 돌아왔고 나는 서울에서 수업을 마치고 인천 집으로 서둘러 와도 오후 6-7시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니 막내가 선교원에서 돌아와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게 해야 하는가가 문제였다. 나는 궁리 끝에 책을 잔뜩 사 들였다. 아직 글을 모르는 막내를 위해서는 동화테이프를 사 주었다. 집에 돌아온 막내는 엄마를 기다리며 동화테이프를 듣고 또 들었다. 그렇게 반복해서 동화테이프를 들으면서 책을 보는 사이, 동화테이프에서 들리는 소리와 동화책 속의 글자를 대조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한글을 배우지 않은 막내가 동화테이프에서 나오는 소리와 동화책의 글자를 정확하게 손가락으로 짚어 내는 것을 바라보며 참 신기하다고 느꼈었다.

어릴 때부터 이런 독서습관이 몸에 베인 막내는 선교지에서 여고생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더 이상 목욕탕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수영복을 입고 책을 보지는 않지만, 지금은 운동을 하면서 책을 본다. 그런 막내는 이제는 시간을 아낀다며 훌라후프를 돌리면서 책을 읽는다. 우리 집에서는 훌라후프를 돌리면서 책에 빠져 있는 막내를 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선교지에 들어온 막내는 더 이상 한국어를 배우지 못했는데도 막내의 모국어 실력은 상당했다. 막내딸이 중학교 졸업반 때쯤 나는 남편과 함께 선교지에서 한인자녀들을 위한 한글주말학교를 열었다. 유치반부터 중학교반을 운영하였는데 막내도 한글주말학교 중학교반에 다니게 되었다. 한글주말학교는 1년에 1회 백일장을 열었다. 막내는 주재원 아이들보다 한국에서 훨씬 짧게 살았음에도 백일장에서 특상을 받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막내딸은 우리가 한글주말학교를 열기 전까지는 선교지에서 현지어로만 공부하였다. 그러는 동안 모국어를 특별히 가르치지는 못하였다. 선교지 생활이 바빴기에. 평소 책읽기를 좋아하는 습관을 가진 딸의 모국어 실력이 그만한 것이라 생각하니 그 또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가 시작한 신학공부 때문에 책을 벗 삼으며 자랄 수밖에 없었던 어린 막내딸. 그 막내딸은 어디를 가나 책을 꺼내 읽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때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도 없었으니 말이다. 막내는 내가 시장에 갈 때도 엄마와 함께 있고 싶어서 따라 나선다. 책을 옆에 끼고서. 시장엘 가면서도 막내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책 읽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장을 보는 동안 웬만한 두께의 책 한권을 다 읽어내곤 했다. 우리 집의 독서 왕답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시절, 욕조에서 씩 웃고는 책을 들여다보는 딸의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웃곤 한다. 더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막내딸의 탁월한 아이디어에 감탄도 나오고, 얼마나 더웠으면 그랬을까 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서 에어컨을 하나 장만해야 하는데, 에어컨을 사라고 돈을 빌려 주겠다던 선교사님에게 다시 말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그해는 온 가족이 더위와 전투 아닌 전투를 벌이면서 그냥저냥 지냈다. 결국 에어컨은 그 이듬해 여름에야 겨우 장만할 수 있었다. 막내의 ‘목욕탕독서삼매경피서’ 사건은 유난히 더웠던 선교지에서 보낸 첫 여름의 소중한 추억이다. ▩



♡ 저자 나은혜는 장로교(통합) 목사로서, 1997년 3월부터 2007년 5월까지 총회 세계선교부 파송선교 중국선교사로 사역하였다. 사역하던 곳에서 비자발적 입국거부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미국 인디애나 주 그레이스신학교에서 선교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현재는 중국선교 동원사역을 하고 있으며, 사이버 <선교문학>에 선교수필을 써서 복음을 전하는 일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