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의 과정을 즐기라
선교사 훈련은 특정 내용의 요약과정(summary process) 이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역의 다양함을 이해하고 자신의 은사를 발굴하며 연마하여 더욱 빛나게 하는 것으로, 사랑의 인내와 수고를 통해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학의 이해를 넘어 교회와 함께 선교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교사 훈련은 기도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사역 훈련의 기본이지 목표는 아닙니다. 사역자들은 훈련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지 훈련을 통해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역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태어납니다. 우리에게 항상 해결해야 할 문제, 꼭 해야 할 선택, 이루어야 할 재적응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경험을 수정하며 재조직하고, 재형성하며 노력해가는 것이 바로 훈련을 좀 더 깊이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별력을 훈련하라
선교사는 타문화권에서 순간순간 판단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의 문화에 내재해 있는 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으로 변혁시켜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거듭하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훈련이 없을 때, 순간 분별력이 없어 자민족 중심의 자국의 문화를 심는 것을 선교로 착각하게 되고 결국 많은 혼란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것과 거짓으로부터 오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이 구별되지 않고, 사랑과 분노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사역은 혼란만 가중됩니다. 이러한 경계 구분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경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비 보석감정사들은 가짜와 진짜가 판독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진짜만을 보고 집중적으로 훈련한다고 합니다. 비행사 훈련에서는 자신의 감각적 판단이 아니라 정밀한 계기를 통한 확신을 갖고 운행하는 비행기술을 익히기기까지 피눈물 나는 반복 훈련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선교사의 분별력 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별력 역시 반복 훈련을 통해 얻게 됩니다.
군대에서는 군견을 훈련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군부대 막사 안에 있다고 해서 다 군견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느 개가 군견이며, 폐견인지를 고참은 금방 알아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병은 구분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간단한 분별력만 있으면 쉽게 분별이 가능합니다. 즉 훈련에 참여하는 개는 군견이고, 막사 곁에서 먹고 노는 개는 폐견이라고 합니다. 그 생김새는 똑같지만 말입니다. 분별력 훈련은 개인 스스로 발전시킬 수도 있지만 선임자들의 도움을 받으면 그만큼 고생을 줄일 수 있습니다. 선임자들에게 현지 사역의 분별력을 위해 도움 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익숙한 훈련의 교본은 200년의 역사를 가진 서구단체의 매뉴얼이 주를 이룹니다. 그들은 훈련 과정에서 스스로 문제를 찾도록 하는 발견의 원리를 배우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 훈련의 원리에서 헌신의 원리를 찾아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마치 힘들었던 중세 시절 루터가 새로운 신학을 발견했지만, 평신도 사역자로 시작하여 나중에 서품한 로욜라는 그 관점을 이용하여 새로운 선교의 헌신을 발견했던 것과 같습니다. 당시의 청빈, 순결, 섬김 등의 모토는 마치 블루오션을 발견한 것과 같았습니다.
유혹은 훈련으로 이길 수 있다
선교 사역에는 성공에 대한 유혹이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과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일 사이에 혼란이 있게 되면 곧바로 성공에 대한 유혹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하나님 앞에 성공하는 사역자, 즉 복 있는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역의 양을 늘리는 데에 힘쓰기 전에 반드시 자신이 영적 세계의 동질성(Accountablity)을 갖출 필요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동질성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자신에게 녹아들어 경계가 없는 상태, 또한 자신을 벗어남으로서 경계가 없고 중심이 없는 무심(无心)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본연의 죄의 문제에 보다 분명한 경계심을 가지면서, 자신의 마음이 얼마만큼 하나님의 마음과 합해 있는가? 하는 것으로 부르심에 대한 반응의 역량을 측정하는 것입니다. 사역자가 놓쳐서는 안 되는 신념은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바로 섬김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은 약하고 힘이 없어 보이지만 그 집약된 메시지는 분명하고, 약한 소리 같지만 충분한 내용과 역량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역 평가 유혹에 주의하십시오
유혹당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유혹을 받기 전에 훈련해야 합니다. 선교사들은 사역보고를 통해 자신을 설명합니다. 자신에 관한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선교형태는 확연히 달라집니다. 사단은 보고서를 작성하는 테이블 곁에서, 또는 사역보고의 현장에서도 유혹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사단은 예수의 이름으로 힘차게 전개되는 사역현장에서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오히려 유혹과 미혹이라는 도구를 자주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려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와 개인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보고할 때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버린 일도 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 때문에 싸운 일도 있었고, 잘 양육한 제자가 떠나버린 일도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선교사의 모든 보고는 선교의 사령관이신 주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역이 다른 어떤 사역보다 크다고 생각하고 사역의 크기를 선교의 능력으로 설명하려 할 때 유혹의 사정권에 들게 됩니다. 크기로 말하는 능력은 타종교와 미신, 우상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우상은 100m 밖에서도 보이는데 다른 우상은 400m 밖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우매한 사람들은 그 크 기에 따라 우상의 능력이 더 큰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러한 유혹은 비교의식에서 생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은 세상의 위대한 모든 것을 제압합니다. 선교사의 사역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업적을 능가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하나님의 사역임을 인정하고 사랑으로 동료들과 함께 섬기며 나갈 때 사역평가의 유혹에서 안정을 찾게 됩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16)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자신의 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히 이루리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선교사)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2-33)
선교사는 먼저 죽는 법을 배워야 사는 법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죽는 법을 온전히 배우지 않게 되면, 그 죽음은 늘 삶을 지배하거나 괴롭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과 내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과 내일의 일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들은 하나님나라의 일들이 시작된 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만의 일을 목적으로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제삼일의 일을 말합니다. 그 길을 걸어야 구원의 길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과 내일의 일만 걸어서는 구원의 소식을 전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제삼일, 모레의 일을 위해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이미 이룬 것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아직도 잡으려고 하는 미래의 그 선교의 목표를 향해 계속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성령님 역시 하나님나라의 첫출발을 위해 그 길을 걸어야 할 이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선교사들의 공동체가 바로 단체로 성령을 의지하여 그 길을 걷는 선교적 순례단체와도 같습니다. 그 길은 추상적 공동체의 길이 아니라 실제 선교 지역 안에서 역사하는 힘을 따라 수고하며 끝까지 가야할 길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받은 사명, 많은 왕들 앞에 증언하리라는 그 약속을 확신하였기에 전도 여행 중에서도 확신 있게 일했습니다. 로마에 가서 왕들 앞에서 증언하기까지 자신의 사명이 중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일을 허락하신 분의 의지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목표의 길을 향해 걷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목표가 보이지 않았다면, 아직까지 달려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길은 푯대 없이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오직 내가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린다”(빌 3:12)
땅 끝에서 볼 수 있는 비전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다양한 직업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는 다양합니다. 각자 길을 가다가 일정한 곳에서 만나는 장소도 또한 다릅니다. 어부는 바다에서, 비행사는 하늘에서, 교수는 학교에서, 근로자는 산업현장에서, 선교사인 우리는 땅 끝에서 만나야 합니다. 그 만남은 서로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비전 때문입니다.
선교사에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가장 큰 비전이며, 최고의 슬로건은 “주여! 어서 오십시오!”일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때를 바라보며 우리는 오늘도 영혼구령을 열망해야 합니다. 계시록에서 본 것이 곧 우리의 비전입니다. 모든 열방이 주님의 보좌 앞에 모여 있고, 각 나라 모든 방언의 사람들이 모두 그 앞에 서 있습니다. 모두에게 구원을 베풀어 영광의 만남을 허락하신 주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릴 것입니다. 이 모습이 이 땅에서 선교사들의 비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부분을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부름을 받고 일하는 사역은 돈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비전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 비전을 따라 함께 영적 가치를 공유하고 그것이 선교의 삶으로 지속되도록 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복음이 옛날에는 유대인의 부담으로, 근대에는 백인들의 부담으로, 오늘날에는 아시아인들의 부담, 이런 순서로 설명되는 것은 곤란합니다. 복음은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부담이 되어야 합니다. 이 부담은 부름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에게 직접 진 빚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 빚에 대하여 부담을 갖는 우리에게 명령으로 그것을 책무로 삼도록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증인으로 돌아가라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저는 예전에 오랜 기간 동료사역자들을 섬겨 본 경험이 있습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이 멤버케어 사역이 끝나면 어떤 자리로 돌아가느냐고 묻곤 했습니다. 그러한 질문은 나에게 보다 더 발전하여 자신을 개발하라는 의미의 이야기지만, 솔직히 그런 질문은 저의 마음을 씁쓸하게, 슬프게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선교사의 본연의 임무인“전도인의 직무로 돌아간다”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전도란 일정한 공부와 과정을 마치면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 곧바로 삶에서 자연스럽게 표현해야 하는 실천이 전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자는‘전도자’입니다. 그는 남루해 보여도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될 수 없는 영원한 가치를 소유한 자입니다. 제대로 된 전도자를 만나면 변화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저는 인생에 전할 분명한 도(道)를 가지고 있기에 전도자를 동경하는 것입니다. 삶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전해져야만 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마시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아니 하니라”(눅 9:62) 농번기가 되었을 때 밭에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며 고랑을 갈게 되면 파종 계획은 엉망이 됩니다. 또한 파종기를 놓치면 그만큼 농사 수확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먼저 쟁기를 잡은 자가 농부의 계획에 따라 올바르게 잘 객토하여 줄 때 파종은 그만큼 쉬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일을 위해 부름받은 일꾼들은 자신의 임무에 대한 가치순위를 분명히 갖고 있어야 합니다. 집안 일이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름받은 자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일보다 다른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 하나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라고 했을 때 어떤 젊은이는 먼저 집안일을 처리한 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집안일은 일상 가운데 늘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한 자는 결코 뒤돌아봐서는 안 됩니다. 아직 잡은 쟁기가 없는 자들은 여러 가지 도구를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쟁기를 잡고 밭에 있으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그 쟁기를 놓고 다른 것을 선택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뒤를 돌아보며 뒷걸음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하나님의 부르심은 다양합니다.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선교사로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 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 하라”(딤후 4:5)고 했습니다. 디모데의 핵심직무는 바로 전도자의 직분입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 7:20). 전도가 특별히 각색되어 이벤트에 묵이게 되면 전도는 삶이 아닌 하나의 행사가 되어 버립니다. 사역자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안전하고 노후가 보장된 자리로 회귀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최후의 순간까지 완전 보장된 직무는 바로 종신직인‘증인, 전도인 직분’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 부르심 그대로 직임을 받았다면 구할 것은 충성뿐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자가 누리게 될 면류관은 이미 보장되어 있습니다.
증인은 반드시 훈련을 통해 제자의 반열에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기에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구별된 삶으로 훈련을 받고, 또 다시 구별되지 않는 곳으로 돌아가서 섬기는 자리에 있는 자가 증인입니다. 제자들을 세상으로, 타문화권으로 떠나보내기 위해 예수님은 여러 번 권고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알아듣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심정이라고 하시며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여러 차례 만나주시면서 가슴에 꼭 새길 말씀을 거듭하셨습니다. “가라! 제자를 삼으라”이제 제자들이 상심하지 않고 약속한 성령을 믿고 기다리며 다시 오실 때까지 그 나라를 증언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새로운 형태의 만남을 약속하고 제자들을 떠나셨습니다. 그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리라.”
선교의 길에서 만난 사랑하는 나의 동역자 여러분! 선교사 바울은“너의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한다”(빌 2:17)고 했습니다. 자신의 선교적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끝 부분인 관제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은 땅 끝의 한 영혼이라도 모두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길 원하십니다. 그 기쁘신 소원을 우리 마음에 두시고 우리가 순종하여 땅 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남기신 마지막 소원의 말씀은 지금도 전 세계 젊은이들 가슴에 능력으로 남아 놀랍게 성취되고 있습니다.
선교의 동역자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파수꾼에게 새벽은 참으로 기다려지는 시간입니다. 새벽은 우리에게 반드시 옵니다. 우리는 날이 밝는 대로 땅 끝으로 나가서 주님 다시 오실 선교의 길을 예비해야 합니다. 예수가 없는 모든 영혼을 땅 끝에서 우리가 만나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주님의 구원을 베푸셔서 땅 끝까지 이르도록 명령하셨습니다(사 49:6). 우리는 그곳에서 주님을 뵐 것입니다. 땅 끝까지 나아가 증언하라고 명령하신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주님이 명령하시고 약속하신 땅 끝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증언하면서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땅 끝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를 반드시 찾아내실 것입니다.“ 영광의 주님 곧 오시리라”
선교사의 길을 걸으려는 우리를 주님은 잘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수고를 다 아십니다. 언어 배우시느라 고생한 것도 아십니다. 가족들과 힘든 환경에서 분투하는 것도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헌신과 결단, 인내도 아십니다. 선교사로 낮아져 섬기기로 한 겸손도 아시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남 몰래 흘린 눈물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우리 귀에 들려오는 이 음성이어야 합니다. 선교사, 너는 나를 따르라!
로렌즈 림 | 중국선교사
이번 호로 연재를 끝마칩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도전해 주신 로렌즈 림 선교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