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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  통권 141호  필자 : 서디모데  |  조회 : 2756   프린트   이메일 
[선교사의 삶과 사역]
중국선교의 막차, 선교중국의 첫차를 탄 남자

선교사자녀가 남긴 책 
감수성 예민하던 소년 시절, 소설 한 권을 접하게 되었다. 그 소설은 1900년대 초 중국 동북지역에서 사역하던 미국 선교사자녀 펄벅 여사가 쓴 ≪대지≫였다. 내 자신이 농부의 아들로 성장한 배경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인‘땅’이 주는 친밀함 때문에 이 소설에 빠져들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을 향한 동경이 점점 싹터 올랐다. 펄 벅 여사의 책이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내 마음에 중국에 대한 관심의 씨앗을 뿌려준 것이다. 이 동경과 관심을 더 키워준 것은 고등학교 입학 후 제2외국어로 접하기 시작한 중국어였다. 당시 한중수교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 병음이 아닌 타이완의 주음부호로 처음 중국어를 공부했지만, 웬일인지 전혀 어렵지가 않고 도리어 기쁨과 희열로 중국어를 공부했다. 

인간적 관심에서 선교적 관심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인천에 소재한 I대학에 진학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학생선교단체에 몸담게 되었다.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받은 훈련과 공동체생활은 나의 속사람을 성숙시켜주었으며, 무엇보다 향방 없이 지내오던 내 인생의 방향성을 갖게 해 주었다. 그 속에서 받은 제자 훈련, 전도, 기도, 선교 관련 세미나, 그리고 여러 가지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은 내 안에 싹트고 있던 중국에 대한 마음을 그저 인간적인 관심과 동경을 뛰어 넘어, 선교적인 부름으로 바꾸어 가셨다. 월미도에서 일몰을 바라보며 인천 앞바다를 통해 130여 년 전 여러 나라에서 들어와 이 땅을 위해 지불하신 선교사님들의 수고와 헌신을 우리가 다시 전 세계를 위해 지불할 수 있기를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했다.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점점 중국선교로 부르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한 외국인노동자선교가 한창 관심을 받던 90년대 중반 처음으로 인천 남동공단 중국인근로자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군 입대 전까지 약 1년 반 동안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던 중국인근로자 형님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소명을 더 굳세게 하였다. 

드디어 밟은 중국 땅 
감사하게도 3년이 넘는 군 생활 가운데서도 이러한 부르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2001년 제대 후 곧바로 일련의 준비를 마치고 당시 중국 변방이던 X시를 처음 밟았다. 현지 공항은 한국의 시골 중소도시 터미널 같이 작았고, 황토먼지와 석탄 태우는 연기가 가득했지만, 그 모든 것이 마치 펄벅의 대지의 공간적 배경을 밟는 듯 너무나도 친근하였다. 결혼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약혼녀를 만나는 그 이상의 희열과 기쁨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기분이었다. 

그 땅에서 보낸 1년의 시간은 행복 그 자체였다. 더욱이 X시는 실크로드(絲綢之路:silk road)의 기점이자 종착점인지라, 이곳을 통해 과거 2000여 년 전 동서양을 오가던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1년 동안 장기 선생님들과 함께 선교의 기초를 다시 닦고, 현지인과 현지 문화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마음으로, 영으로 체득하는 시간을 가졌다. 92년 8월 24일 한중수교 이후로 한국교회의 중국선교가 최고조에 다다랐던 시점이 아마도 이 시기이지 않나 싶다. 당시 수많은 단기팀이 실크로드선교의 비전 아래 이 지역을 방문했다. 초반 중국 동북의 조선족선교로 시작하여 점차 베이징, 칭다오, 상하이 등의 동부 연안 대도시 선교로 더 서진했다. 신임 선교사님들이 대거 X시를 거점 삼아 언어와 문화를 익히고, 중국 서남, 서북을 향해 나아갔던 것을 눈으로 보았다. 내 자신도 그 복음서진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하는 열망이 컸고, 이제는 단기선교가 아닌 장기선교사로 내 자신을 확인하고 재준비의 과정을 밟았다. 

장기선교사 준비의 길로 
2002년 말, 한국에 돌아와 가족들의 적극적인(?) 반대를 무릎 쓰고 신학대원에 진학했다. 신대원 재학 중에 조그만 개척교회(지금은 나의 파송교회가 되어 마치 친정집과 부모님처럼 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를 만나 사역자로 섬기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네 가지 호칭으로 불렸다. 전도사, 강도사, 목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교사이다. 그 네 가지 호칭 중에 내가 가장 영광스러워 하는 호칭이 있다면 당연‘선교사’이다. 

2008년 4월 드디어 한 여인(원래는 인도선교를 준비하던 자매였으나 남자를 잘못(?) 만난 덕에 중국을 품게 됨)과 8개월 된 여자 아이를 이끌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신 X시를 다시 밟았다. 단기선교 후 6년이라는 길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현지에서 발견한 변화는 과연 격변(激變)이라고 부를만 했다. 휘황찬란한 공항, 공항에서 도심으로 이어지는 잘 뻗은 고속도로, 하늘을 가릴 만한 마천루들, 도심 곳곳에 진행되고 있는 아파트 공사현장을 거쳐 새로운 보금자리를 이곳에 만들기 시작했다. 

재적응의 시기를 거치며 사역으로 
6년 만에 혼자가 아닌 가정을 이끌고 낯선 타문화에 적응한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순간순간 하나님은 현지인들과 동료들을 통해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셨다. 특별히 아내는 중국어를 힘들어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공부해 주었다. 아내가 배운 중국어를 사용하던 중 낯선 남자에게 키스를 요청한(?) 적도 있었다. 어느 장소를 찾아가던 중 그곳 지리에 생소하던 터라 경비를 서고 있던 어떤 젊은 남자에게 중국어로‘실례합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의 뜻이 담긴‘問一下’라고 발음했어야 했는데, 아내는 똑같은 발음이지만 성조(중국어의 높낮이)가 다른‘우리 뽀뽀할까요!’의 뜻이 담긴‘吻一下’ 라고 발음해 버린 것이다. 다행히 그 젊은 경비가 아내에게 뽀뽀하지는 않았지만, 순간 쑥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렇게 어렵게 공부한 중국어로 아내는 1차 사역 끝 무렵에는 한 명의 중국영혼을 품고 양육해 보는 귀한 경험도 갖게 되었다. 

수원지(水源池) 선교인 캠퍼스 사역 
중국 전역에는 약 3000만 명의 대학생이 있다. 그리고 내가 살았던 X시에도 약 100만 명의 대학생과 대학원생이 있다. 내가 캠퍼스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 이상 부모님의 주, 부모님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것을 떠올리며, 20대 초반 가족을 떠나 인생을 준비하는 과정 중에 있는 이 수많은 중국대학생들을 바라보며 사역적 부담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도 대학은 여전히 황금어장인 것이다. 

오전에 학교 중국어 수업을 마치면 집으로 가지 않고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드는 학생식당으로 이동한다. 내가 먹을 식사를 준비하면 이제는 목표물(?)을 포착한다. 주로 혼자 밥을 먹는 학생들이다. 그들에게 먼저 다가간 후 나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임을 소개한 후 동석하고 친구로 사귄다. 아니면 식사 후 운동장에 나가 현지 대학생들이 좋아하는 배드민턴이나, 탁구를 통해 친구가 된다. 이렇게 사귐이 시작되면 여러 달 공을 들여 신뢰관계를 형성하고 집으로 초대하거나 기회를 엿보아 복음을 제시한다. 그중에 감사하게 영접하는 이들도 있고, 잠시 주저하거나 거절하는 친구들도 있다. 나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영접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것은 나의 영역이 아님을 안다. 그저 그들을 마음에 품고, 친구가 되어 주며, 같이 동고동락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지금은 본국 사역 차 한국에 와 있지만, 이들이 너무 보고 싶다. 지금도 나를 徐哥!(서형!)라고 부르며 나타날 것 같다. 나의 동생들이여, 내가 다시 그 땅을 밟을 때까지 건강하게 기다려 다오! 

선교하는 교회로 발돋움하고 있는 한족교회 
처음 중국선교를 준비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에는 선교중국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2007년 정도인가부터 선교중국이라는 구호를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다가오지 않았다. 2008년 X시에 들어가 사역을 준비하며 실제로 현지교회 지도자들과 사역적으로 교류하면서‘선교중국의 비전’이 허상이 아닌 실상임을 깨달았다. 대학생 사역과 더불어 현지 선배선교사들과 팀을 이루어 현지교회와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선교동원, Mission Perspectives(미션 퍼스팩티브스) 세미나, 지도자 대상 선교학교, 현지인 선교사 후보생 훈련 사역 등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혹자는 아직 중국 한족교회가 선교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라고 선교할 준비가 온전히 되어서 선교하였던가? 1907년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인 이기풍 목사님을 제주도로 파송했고 몇 년 후에는 만주에도 선교사를 보냈다. 지난 2012년은 한국교회가 해외에 선교사를 보낸 지 100주년이었다. 선교사를 받은 지 20여 년이 막 지나 선교사를 보낸 나라가 우리 한국 아닌가? 중국교회는 선교사를 받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비록 현재의 한국선교계가 보기에는 문제가 많고 연약하지만 중국 한족교회 안에 성령님께서 부어주신 선교의 비전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으랴! 

한족교회가 자국 내 타문화 소수민족을 품고 기도하며 사람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더 이상 외국인은 합법적으로 거주조차 할 수 없는 중국 내 소수 민족사역의 현실 가운데서 한족교회와 형제자매들을 선교적으로 훈련하고 구비시켜, 그들 교회의 힘으로, 그들의 선교단체를 통해서 복음의 진군을 할 수 있도록 미력하나마 도울 수 있다면, 그리고 그들과 함께 복음이 필요한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동행이며 동역일까 생각해 본다. 비록 중국선교는 막차를 탄 것 같지만, 선교중국을 위한 사역에는 첫 차를 탄 듯한 기분이다. 

출구전략(出口戰略) 
본국 사역으로 한국에 있는 동안 줄곧 중국에 관한 제반소식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중 가장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은 비자문제로 인한 선교사들의 철수 소식이었다. 정확한 통계조차 나오지 못할 정도로 수고한 현장에서 묵묵히 사역해 오신 선생님들의 철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제는 중국 내 선교사들을 조금씩 재배치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많이 섭섭하다. 10년 넘게 중국선교를 준비했는 데, 겨우 5년 사역하고 중국을 떠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아직까지는 다시 X시에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른 길로 인도하신다면 순종해야 할 것이다. 

파도타기를 잘하는 선수는 자신이 파도를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고, 밀려오는 파도 중에 자신이 타아야 할 파도를 선별하는 안목과, 그것을 과감히 올라타는 용기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선교사는 어떤 면에서 영적 파도타기 선수이어야 한다. 선교의 궁극적인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영적 파도를 보고, 그중에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선교적 상황의 파도를 분별하며, 거기에 자신을 과감히 던질 수 있는 결단과 헌신이 내 자신에게 있어야 함을 다시금 확인한다.


서디모데 | 중국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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