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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30  통권 140호  필자 : 유관지  |  조회 : 1772   프린트   이메일 
[발행인통신]
『중주』와 독자들의 유대도 그런 것이겠지요?

‘궈칭제(國慶節)’라고 불리는 중국건국기념일과 종교개혁 496주년 기념일이 들어있는 달 10월이 막을 내렸습니다. 지난 10월과 11월은 부산에서 열린 WCC 제10차 총회를 보며 많은 것을 느낀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추수감사절에 생각나는 일
이제 우리는 추수감사절이 들어 있는 11월을 맞이하였습니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면 한국교회의 초기에, 장로교는 모든 교회들이 추수감사헌금 전액을 중국선교(산동선교)를 위해서, 감리교는 만주선교연회를 위해 쓰도록 교단적으로 방침을 정하고 시행한 일이 종종 생각납니다. 

지난 호까지『중국을주께로』에‘사진으로 보는 산동선교 100년’이 연재되었는데, 이것을 보충하는 마음으로 산동선교와 추수감사절에 대한 기록을 하나 여기에 옮기고 싶습니다. 장로교는 1912년에 산동선교를 결의하고, 그 이듬해에 이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1918년, 제7회 총회에서‘전도국 규칙’과 ‘조선선교사회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를 보면 전국의 장로교회는 추수감사연보와 특별헌금을 총회 전도국으로 입금하고, 책정된 예산과 결산안이 총회에서 확정되면 전도국이 선교비를 선교회의 회계에게 바로 보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7회 총회의 총회록에는“금년도 감사일(추수감사절을 의미함)에 대하여, 각 교회가 특별히 힘써 연보를 많이 하여 선교방침에 걸림이 없도록 되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오며”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전도국 규칙 제8조는“재산, 본 전도국의 일반용비(用費)는 각 교회의 감사금 연보금과 특별연보금으로 성립됨”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장로교의 산동선교를 보면 그 열의와 자세와 방법이 지금보다 앞섰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데 재정 문제에 있어서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외국의 선교지도자 한 분이 한국에 와서 이모저모를 살피고 난 다음에“나는 한국의 선교사 파송 시스템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어떻게 개 교회들이 선교사를 바로 파송할 수 있습니까? 교회들은 선교비를 총회로 보내고, 총회가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질서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산동선교는 그와 같은 원칙 밑에 진행되었습니다.

성탄절에 생각나는 일
12월은 성탄의 달인데 성탄절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일도 하나 있습니다. 중국선교에 남다른 기여를 한 극동방송은 1956년 12월 23일에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아니, 왜 그때 방송 을시작하셨습니까? 그때는 성탄휴가가 시작되는 때가 아닙니까? 바로 연말 휴가가 이어지는 때이기도 한데요…….”극동방송 설립자인 고 톰 왓슨(한국 이름 和道善) 선교사에게 물어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톰 왓슨 선교사가 한 대답은 지금도 제 귓전에 생생하게 감돌고 있습니다. “구세주가 태어나셨다는 기쁜 소식을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의 주민들에게 한 시라도 빨리 전하기 위해 정말 서둘렀습니다. 만일 그때 방송을 시작하지 못하면 1년 뒤에나 그 소식을 알릴 수 있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밤잠을 자지 않고 일했습니다. 첫 방송을 할 때 구원의 메시지가 담긴 로마서를 읽고서는 피곤을 이기지 못해 사택에 돌아가서 정신없이 잠을 잤습니다.”톰 왓슨 선교사를 비롯하여 윌리엄 윈첼(한국 이름 禹仁哲) 등 설립 당시의 선교사들은 직접 시멘트를 비벼 인천 학인동 바닷가에 연주소를 세우고 사택을 짓고 갯벌에 안테나를 세웠습니다. 

기독교방송(CBS)은 1954년 12월 15일이 설립일인데, 기독교방송 설립을 위해 수고한 분들도 성탄절 이전에 전파를 송출하기 위해 서둘렀다는 이야기를, 기독교방송 탄생의 산파역을 담당했던 고 엄요섭(嚴堯燮) 목사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우리는 선교와 관련하여 선배들의 이런 마음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전환기의 관점으로
중국교회의 역사를 시기 구분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약간씩 다릅니다. 동경여대의 아사하라 캔(石原謙) 교수와 총신대의 조훈 교수는 ①선교준비시대(1807·1842) ②개척시대(1842·1860) ③교회건설기대(1860·1895) ④발전시대(1895·1925) ⑤수난시대(1925·1950)으로 나누었고, 김화평 목사는 선교를 중심으로 해서 ①초기(1807·1842) ②성숙기(1842·1911) ③확장기(1911·1931) ④전환기(1931·1949) ⑤중단기(1949·1978) ⑥재개기(1978·현재)로 나누었습니다. 

저는 2010년대, 현재까지의 역사를 포함하여 ①전사(고대로부터 가톨릭의 전래까지) ②피선교기(1807·1911) ③자립기(1912·1948) ④전환기(1949·현재)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949년 이후를‘전환기’로 한 것은 이 시기에 중국교회가 두 가지의 전환을 이룩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회주의 국가의 교회로의 전환입니다. 또 하나의 전환은 -이 전환이 사실 중국교회역사 이백 여 년에서 가장 큰 변화이고, 의미가 있는 것인데- ‘중국선교’에서‘선교중국’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근 중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전환기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2013년에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분야에는 몇 가지 변화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선 국내에 들어와 있는 중국인들, 주로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한 것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최근 중국인유학생들이 줄어든다는 통계가 있기는 하지만(이에 대해서는 이상만 선교사가 본지 9·10월호에 기고한‘중국인유학생 수의 변화와 문서 사역의 중요성’을 참고하십시오.) 중국인유학생들은 앞으로 변함없이 중요한 선교대상이 될 것입니다. 

‘가서 선교하라’에서‘와 있는 사람들에게 선교하라’는 것은‘선교지 개념의 파괴’라고 해서 여러 해 전부터 이야기되었고, 본지에서도 이에 대해 언급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주로 중국의 도시에 몰려드는 여러 지역 사람들, 여러 계층들, 여러 소수민족들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에 와 있는 중국인들에 대해 이 말을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또 중국복음화 관련 집회에 국내거주 중국인들이 한국인보다 더 많이 참석하기 시작한 것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들을 전환기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에, 선교에 헌신하고 있는 분들 가운데 협동조합을 만든 그룹이 있습니다. 이들은 협동조합의 정신이 선교단체의 취지와 부합하기 때문에 협동조합을 만들게 되었다고 하면서“또 한국교회의 위기가 심화되고, 교세의 감소가 돌이키기 어려운 대세가 된 형편에서(올해 9월 장로교 각 교단의 총회에 보고된 교인 숫자 통계는 이런 말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선교단체나 선교사들은 예전과 같이 교회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어 가고 있어 우리는 이런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국선교 분야도 참고해야 할 말입니다. 교회의 지원 의존에서 자구책 강구로의 전환, 이런 전환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하고 지혜를 구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 되었습니다. 

뒤늦게 카카오톡을 배웠는데 중국복음화 분야에 헌신하고 있는 분들이 카카오톡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들의 유대감이 얼마나 끈끈한 것인가 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호로 140호를 기록하는『중국을주께로』와 독자들의 유대도 그런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유관지 |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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